한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1월 초. 여느 때였다면 한창 시상식 시즌으로 바쁠 터였다. 각 도시별 비평가협회들이 한 해 영화들을 복기하고, 시상식에 맞춰 개봉한 작품성 높은 영화들의 선전에 연초에 있을 빅 3 - 골든 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오스카로 이어질 결과에 흥분하고 설렐 상황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유례없이 시상식들은 죄다 뒤로 밀렸고, 그에 따라 신작들 구경하기는 힘들어졌다. 수익을 내기 위해 제작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VOD(그것도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서비스)의 문을 두드렸고, 시상식들에서 찬밥 대우를 받던 넷플릭스용 영화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시상식들에서 가장 선전할 작품들이 되었다. 지난 늦가을부터 이번 겨울 2021년 시상식들을 노리며 공개된 가장 강력한 넷플릭스 영화들의 사운드트랙들을 소개해본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다니엘 펨버턴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 다니엘 펨버턴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일어난 폭동에 얽힌 주동자 7명의 악명 높은 재판을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탁월한 각본가로 손꼽히는 아론 소킨이 2007년 스티븐 스필버그를 위해 썼던 작품이다. 하지만 작가조합 파업과 예산 문제로 스필버그가 하차한 후 한동안 표류되던 프로젝트는 소킨이 <소셜 네트워크>로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하고, HBO의 <뉴스룸>이 화제를 모으며, <몰리의 게임>으로 성공적인 연출 입봉을 하자 두 번째 연출작으로 택하며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에디 레드메인과 사챠 바론 코헨, 조셉 고든 래빗, 마이클 키튼, 프랭크 란젤라, 마크 라일런스 등 쟁쟁한 연기자들을 포진시켜 놀라운 앙상블을 선사한 이 영화는 원래 파라마운트에서 배급될 예정이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음악은 아론 소킨과 데뷔작에서 작업했던 다니엘 펨버턴이 다시 합류했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소킨이 각본을 맡았던 <스티브 잡스>까지 포함하면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펨버턴은 그 시절 담배연기까지 담아낸 듯한 레트로한 사운드와 영국의 떠오르는 신성 설레스트(Celeste)의 영혼을 울리는 보컬 그리고 묵직하면서도 진심을 담아낸 꽉 찬 관현악 사운드로 피 말리는 재판의 긴장감 넘치는 과정과 진정한 자유와 정의에 대해 놀랍도록 명징하게 설파한다. 이미 <맨 프롬 Uncle>과 <골드>, <올 더 머니>, <오션스 에이트>, <예스터데이> 등 지나간 시절을 다룬 영화들 속에서 복고지향적인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포착하고 구현했던 전력이 있는 그는 7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던 퀸시 존스나 랄로 쉬프린, 데이빗 샤이어, 마이클 스몰 등이 들려줬던 리드미컬한 소리들과 사회파 스릴러의 장르적 색채를 짜릿하게 복구해내며 자신의 진가를 마구 발휘해낸다. 시카고로 출발하는 여러 캐릭터들을 실제 클립과 교차하는 몽타주에서 휘몰아치는 음악을 비롯해 재판을 거치며 점점 고조시키는 정의감의 사운드는 (매번 가능성만 인정받았던) 다니엘 펨버턴을 이번에야말로 시상식장으로 향하게 만들 듯 싶다.


<맹크>

트렌트 레즈너 & 애티커스 로스

맹크

: 트렌트 레즈너 & 애티커스 로스

세계영화사를 통 털어 걸작을 뽑으면 언제나 상위권에 랭크되는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 탄생기라 볼 수 있는 <맹크>는 꽤 오래전부터 데이빗 핀처가 준비해 온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97년 <더 게임>을 완성한 직후 아버지 잭 핀처가 쓴 각본을 가지고 흑백에 모노 사운드로 케빈 스페이시와 조디 포스터를 데리고 찍으려고 했지만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이를 승낙할 리 만무했고, 넷플릭스에서 작업하던 <마인드헌터>의 세 번째 시즌이 어렵게 되자 이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핀처의 오랜 숙원을 넷플릭스가 들어준 셈이었다. <시민 케인>을 쓴 각본가 허먼 맹키위츠를 통해 당시 연예계와 정재계를 아우르며 진정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역동적인 편집과 뛰어난 공간 연출, 좋은 배우들로 완성해내는 이 영화는 가히 영화를 위한 영화라 할만하다. 여기에 방점을 찍는 건 바로 음악이다.

<맹크>

이 영화 전에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의 대부인 나인 인치 네일이 1940년대 할리우드 스코어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면 비웃었을지 모른다. 존 윌리엄스를 비롯해 정상급 영화음악가들의 편곡자이자 자신 역시 영화음악가이기도 한 콘래드 포프와 전설적인 빅밴드 편곡자인 댄 히긴스, 스윙과 폭스트롯을 책임진 팀 길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일렉트릭 사운드 안에만 갇혀있던 이들이 들려준 재즈와 관현악의 아날로그 소리들은 가히 놀랍다고 할 정도다. 막스 스타이너와 에리히 볼프강 고른골드, 알프레드 뉴먼, 빅터 영, 프란츠 왁스먼과 디미트리 티옴킨, 미클로스 로자 등이 건재하던 시절 역시 전설 중에 한명이었던 버나드 허먼이 음악을 맡았던 <시민 케인>에 근접하고자 이 엠비언트 고수들이 노이즈와 인공적인 소리들을 내려놓고 만든 고풍적이고 재지한 분위기는 흑백으로 촬영하고 모노 믹싱한 핀처의 고집만큼이나 외향적인 테크닉에 신경 써 이뤄낸 경이로운 도전이자 성취다. 비록 메인 테마의 부재와 소스 음악에 그칠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이들을 시상식 후보에서 밀어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힐빌리의 노래>

한스 짐머

힐빌리의 노래

: 한스 짐머 & 데이브 플레밍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 밸리에서 자수성가한 J.D. 밴스가 2016년에 발표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자서전을 바탕으로 베테랑 론 하워드 감독이 연출한 <힐빌리의 노래>는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난과 소외, 방치와 가족 붕괴라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탈출한 한 청년의 성장기를 담아낸다. 최근 연출작들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한 론 하워드의 부진이 이어지듯 트럼프 시대의 현실을 반추하고, 정책 대안과 방법론을 논하던 원작과 달리 단순한 감동물로 일차원화 시킨 영화는 비록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아직까지 무관이지만) 오스카 후보 경력이 말해주듯 7차례 오른 글렌 클로스와 6차례 오른 에이미 아담스의 열연만큼은 비판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분노의 역류>를 시작으로 론 하워드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한스 짐머가 8번째로 손잡은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사운드도 빼놓을 수 없다.

<힐빌리의 노래>

이전의 <원더 우먼 1984>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2020년 한스 짐머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내야 했기에 자신의 리모트 콘트롤 프로덕션 소속 뮤지션들과 공동 작업을 유기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번엔 데이브 플레밍이란 신인에게 그 기회를 안겼다. 한스 짐머가 영화음악에 입성할 당시 영국에서 스탠리 마미어즈를 도와 작성했던 작품들이 대개 드라마 장르들이었고, 할리우드 입성한 후 초기작들인 <레인맨>과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그린카드>, <헨리 이야기> 등 휴머니즘 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낸 바 있기에 오랜만에 블록버스터가 아닌 그의 소품과 만나는 반가움이 무엇보다 크다. 티나 구오의 일렉트릭 첼로 솔로를 앞세워 감정의 파고를 만들어내고, 일렉과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와 섬세한 스트링을 벤조나 슬라이드 기타 등 블루그래스 색채의 악기들과 버무려 아이오와 시골 풍광을 묘사한 아름다운 사운드는 힐빌리 레드넥의 계급 차와 좌절, 고난과 시련을 대비시켜 더 깊은 성장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인위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한스 짐머의 스코어만이 이 밋밋한 감동 드라마에서 진정한 힐링을 안겨준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브랜포드 마샬리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 브랜포드 마샬리스

작년 8월 대장암으로 훌쩍 세상을 떠난 채드윅 보스만의 유작으로 더 유명해진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1982년 어거스트 윌슨이 쓴 동명의 희곡을 바탕으로 공연된 연극을 영화화했다. ‘블루스의 어머니’라 불리는 전설적인 가수인 마 레이니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흑인 예술가들의 핍박과 착취, 차별에 대해 다루는 이 영화는 인권에 관심이 많은 지성파 배우 덴젤 워싱턴이 제작하고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조지 C. 울프가 연출했다. 옥타비아 스펜서와 함께 오스카 연기상에 3번이나 후보로 오른 흑인 여배우며, 오스카와 토니, 에미상을 모두 석권해 트리플 크라운을 이룩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인 비올라 데이비스와 더 이상 스크린에서 만날 수 없는 채드윅 보스만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이 팽팽하게 펼쳐진다. 이에 기름을 붓는 건 재즈의 명가 마샬리스 가문의 장남 브랜포드 마샬리스가 담당한 흥겹고도 애달픈 선율이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감독은 밴드가 마 레이니와 함께 시그니처 곡들을 녹음하는 과정이 영화의 주된 내용인 만큼 블루스와 재즈에 능통한 이가 음악을 맡길 바랬다. 전작을 함께 한 작곡가이자 그 유명한 <모 베터 블루스>에서 테렌스 블랜차드와 함께 피처링으로 참여했던 색소포니스트인 브랜포드는 재즈와 클래식에 걸쳐 정통적이면서 천부적인 솜씨를 드러냈던 둘째 윈튼 마샬리스에 가려지긴 했어도 락과 힙합 등 다양한 장르에 대한 음악적 친화력과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정신을 드러냈던 뮤지션이라, 안전하고 보수적인 길을 고집하는 ‘마 레이니’와 새롭고 신선한 방식을 선호하는 ‘레비’와의 갈등을 표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자연스런 본질이 뉴올리언즈의 문화적, 지역적 특성과 인종차별 속에 쌓여온 분노와 울분, 순발력 그리고 긍지와 어우러지며 단단하며 살아 숨 쉬는 듯한 활력을 드러낸다. 아울러 마 레이니의 실제 원곡을 연구하며 비올라 데이비스가 직접 부른 목소리뿐만 아니라 깊고 걸걸하고 파워풀한 목소리를 위해 소울 가수인 맥시언 루이스를 영입해 더 완성도를 높였다. 브랜포드의 스코어는 음악영화로도 손색없는 만족감을 선사한다.


<미드나이트 스카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미드나이트 스카이

: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배우이자 제작자이며 감독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조지 클루니의 7번째 장편 연출작은 마치 <그래비티>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만난 것 같은, <인터스텔라>와 <노인과 바다>가 이종교배된 듯한 SF생존물인 <미드나이트 스카이>다. 마침 주연배우는 <그래비티>에 출연했고, 각본가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썼다. 릴리 브룩스-돌턴의 소설 데뷔작 “굿모닝 미드나이트”를 원작으로 대재앙이 닥친 처연한 슬픔과 극한의 상황 속에서 비극에 방점을 두기보단 아이러니하게 광활하고 압도적인 자연의 스케일에 주목해 사색적이고 성찰적인 자세를 이끌어낸다. 이는 잠시 멈춰버린 현시점의 황량한 판데믹 상황과 비교되며 기묘한 감흥을 안긴다. 인간의 삶과 구원, 후회와 사랑에 대한 익숙한 기시감과 디스토피아적인 클리셰들이 영화 내 가득하지만, 아이맥스 상영을 염두하고 아리 알렉사 65로 촬영된 시원스런 비주얼과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감성적인 음악만큼은 일품이다.

<미드나이트 스카이>

<킹메이커>를 시작으로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과 <서버비콘>에 이어 이번이 클루니와 4번째 만남인 데스플라는 코로나19로 인해 감독과 제작자가 있는 미국과 연주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있는 영국, 작곡가인 자신이 있는 프랑스 3개국에서 원격으로 레코딩을 진행하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런 코로나 시대의 고립감이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미드나이트 스카이>의 고독과 회한, 두려움과 절묘하게 공명하며 생생한 전율을 안겼다. <마지막 황제>의 메인 테마 주제부를 연상시키는 절제되고 반성적이며 애잔한 현악과 기존 세대의 몰락과 반성을 머금은 듯 혼악기의 호소력 짙은 울림은 이제 끝나버린 인류의 마지막 심경을 담아낸 것처럼 절절하게 다가온다. 여기에 날카롭고 혼돈스런 불협화음과 전자 펄스 노이즈가 섞인 긴장감 넘치는 잿빛의 서스펜스 스코어들은 낭만적인 선율에 가려진 비관적인 현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섬뜩한 알람이자 흉포한 그림자로 기저에 남은 불안감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데스플라와 클루니는 일말의 긍정적인 요소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마치 인류라는 듯. 그것이 바로 음악의 힘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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