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부부가 맞벌이로 가정을 부양하고 하고 있는 지금도 그 폭력적인 구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수신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2020~ )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분노를 토한 순간이 있었다. 원작을 읽었던 터라 주인공 민사린(박하선)이 겪는 ‘며느라期’ 수난사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봤는데, 원작에 없던 디테일들이 자꾸만 나를 쿡쿡 찔렀다. 6화의 한 장면, 다음 날 출장을 가야 하는데도 남자직원들이 떠 넘긴 일을 마무리하느라 밤 늦게야 집에 돌아온 사린은, 남편 무구영(권율)이 혼자 밥을 차려 먹은 흔적을 발견한다. 플라스틱 밀폐용기에 담긴 반찬들은 냉장고 안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고스란히 식탁 위에 놓여 있고, 배달음식 용기 뚜껑은 바닥에 나뒹군다. 대체 뭘 시켜 먹은 건지, 기름기 가득한 빨간 국물이 묻은 나무젓가락이 흰색 식탁 상판 위에 널브러져 있다. 흰색, 상판, 위에.

밀폐용기에 밴 김치 냄새를 지우려고 설탕물을 채우며 드라마를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화면을 향해 육성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니 저 미친 새끼가. 먹었으면 치워야 할 거 아냐! 냉장고에 반찬 넣고, 쓰레기통에 쓰레기 넣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나의 분노는 식탁 상판이 흰색이라는 이유로 더더욱 증폭됐는데, 얼핏 보니 하이글로스 코팅이 된 것도 아니어서 빨리 안 치우면 상판에 노랗게 국물 자국이 밸 것만 같았다. 세상에, 저거 뒷정리는 누가 다 하라고! 이 모든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구영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팔자 좋게 자고 있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사린씨, 대체 구영이가 어디가 그렇게 예뻐 보여서 결혼한 건가요?

원작에 없던 장면인 탓에 마음의 준비를 못 해서 더 크게 분노한 것도 있었겠지만, 원작이 나왔을 때는 내가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살았고, 드라마가 나온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는 차이점도 그 분노에 한 몫 했을 것이다.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살던 시절엔 각자 자신이 점유한 공간 정도만 청소하며 소꿉놀이처럼 어영부영 살던 나는, 혼자 살림을 살게 된 뒤에야 비로소 가사노동이 무섭다는 걸 관념이 아니라 현실로 깨닫게 됐다. 치워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유통기한 지나기 전에 요리해야 할 것을 다 챙기다보면 하루가 훌쩍 가는데, 가사노동은 해도 티가 안 난다. 하루 종일 치우고 나서 뒤돌아보면 또 생활먼지가 내려앉고, 싱크대엔 설거지감이 쌓이기 시작한다. 환장할 노릇이다.

혼자 살림을 살기 전까지는 가사노동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나도, 구영을 마냥 개운하게 욕할 수 있을 만큼 떳떳한 사람은 아니다. 극 중 구영은 결혼 전에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결혼한 뒤에는 사린과 함께 살고 있다. 나 또한 구영처럼 혼자 살림을 살아보는 경험 없이 계속 살았다면, 지금 어떤 꼬락서니로 살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혼자 살림을 살기 전에도 나는 구영보다는 조금 나은 사람이었지만, 구영보다 나은 거로는 충분치 않다. 사람이라면 응당 구영보다는 나아야 하니까. 더 일찍 가사노동을 하고 더 일찍 사람처럼 살았어야 했다. 이걸 혼자 살기 전까진 온전히 체감하지 못했다니, 이 얼마나 팔자 좋은 특권이었나.

가사노동에 무심할 수 있는 건 특권이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 여자들은 그 특권을 독점한 남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들이 흘린 젓가락을 주워 대신 버려주고, 그들이 아무렇게나 뒤집어 벗어 둔 양말을 대신 뒤집어 빨아주며 살았다. 바깥에서 돈을 벌어오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우월한 남자의 일, 집안에서 살림을 하는 것은 열등한 여자의 일이라고 선을 그어 놓은 세상의 편견은 아주 오랫동안 대를 이어 내려왔다. 그 착취가 당연한 일이라는 오래 된 믿음이 제대로 뿌리 뽑힌 적 없이 대를 이어 내려온 끝에, 사린은 21세기가 되도록 ‘며느라期’를 겪으며 산다. 고분고분하게, 시댁의 대소사 일정에 맞춰 시댁의 부름을 받고 시댁의 일을 해야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된다는 압박을 느끼면서.

아무리 부부가 성평등한 삶을 살자고 결의해도 쉽지 않다. 시어머니(문희경)는 “애는 엄마가 봐야지”라는 말에 넉살 좋게 웃으며 “기저귀 갈고 젖병 소독하고 목욕도 시키고. 아빠라도 할 줄 알거든요?”라고 답하는 큰아들(조완기)이 낯설고, 한 마디도 지지 않는 큰며느리(백은혜)가 당혹스럽다. 그 서운함을 시어머니는 자꾸 둘째 며느리 사린에게 돌린다. 사실 시어머니만 탓할 일도 아니다. 일평생 같이 산 남편이라는 작자(김종구)는 명절 음식 차리느라 피곤해서 “저녁은 시켜 먹자”는 말을 “사 먹는 음식은 영양가도 없고 순 조미료 맛만 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인간인 것을. 그 모든 걸 견뎌내며 사는 게 당연하다고 배운 시어머니는 그 당연함을 물려받길 거부하는 며느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걸 부당한 착취라고 한다면 그걸 다 견딘 자신은 일평생 착취당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진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부부가 맞벌이로 가정을 부양하고 하고 있는 지금도 그 폭력적인 구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사노동을 나누어 실천한다고 말하는 부부들은 많지만, 통계를 내보면 여전히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다. 오래 된 특권을 누리는 인간들이 그러지 못한 인간들에게 모성이니 시댁에 대한 도리니 하는 말로 희생을 요구하며 일방적인 착취를 계속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사노동을 떠맡느라 잠시 자리를 비우면, 염치도 눈치도 없는 남자 상사(김정팔)는 혀를 차며 말한다. “이래서 내가 여자들이랑 일하기 싫다니까.” 한번이라도 제 손으로 가스레인지 상판 기름때는 벗겨봤을까 싶은 게으른 얼굴의 남자들이, 흰색 식탁 상판 위에 굴러다니는 국물 묻은 나무 젓가락처럼 편견을 여기저기 묻히고 다니며 세상에 얼룩을 낸다.

“저희는 둘째 생각은 없어요.” 큰아들의 말을 들은 시아버지는 언짢은 말투로 말한다. “그래도 아들 하나는 있어야지!” 글쎄요, 아버님. 왜 꼭 아들이어야 할까요. 아버님처럼 어머님이랑 며느리 분들 자리 비우고 나면 혼자서는 밥도 못 차려 먹는 존재로 키울 거면, 대대손손 물려져 내려온 착취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존재로 키울 거면 그런 손자 봐서 뭐하시려고요. 일평생 해 온 일이 그거라서 사내라고 유세 떠는 것밖에 못하는 시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중얼거린다. 이제 아버님부터 특권을 버리셔야 할 차례입니다. 일단 고무장갑부터 좀 껴보세요.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