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도 삶도 마음처럼은 안 흘러가니까. 마음먹은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삶에 끌려다니며 사는 기분이 뭔지 안다.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종종 그런 말을 한다. 캐릭터들에게 충분한 배경과 동기를 부여해주면, 그다음부터는 캐릭터들이 알아서 제 갈 길을 향해 살아 움직인다고. 칼럼을 쓰는 나로서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한 세계를 충분히 디테일하게 설계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알아서 작동한다니, 과연 그런 세계를 만드는 창조주가 되는 기분은 어떤 걸까? 자기가 쓴 글이 알아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는 기분은 얼마나 근사할까?
막연하게 부러워하던 내게 소설가 A씨는 말했다. 그거 하나도 좋은 일 아니라고. 쓰다 보면 캐릭터가 추구하는 개연성과 작가인 내가 추구하는 개연성이 충돌하는 바람에, 자꾸 사건 전개가 처음 구상하고는 멀어진다고. 그런 거라면 나도 알 거 같았다. 나도 칼럼을 쓰다 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전개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글이 전개될 때가 있었으니까. 한참 차곡차곡 논지를 쌓아 올리다 보면, 어쩐지 이 논지로는 원래 생각했던 결론으로 가는 게 애매하겠다 싶은 순간들.
A씨의 말을 듣고 나는 막연한 환상을 거뒀다. 캐릭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시계태엽장치처럼 알아서 움직이며 작가가 바라던 결말을 향해 전진하는 기적을 상상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내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망함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던 것이다. 나만 혼자 이렇게 망하는 건 아닌 걸 확인해서 반갑다가도, 상상했던 것과 같은 마법 같은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해서 김이 새기도 했다. 픽션의 세계나 논픽션의 세계나, 마음대로 안 흘러가는 건 비슷하구나.
MBC 드라마 〈W〉(이하 <더블유>, 2016) 속 웹툰 〈더블유〉를 그리던 만화가 오성무(김의성)가 겪는 일들도 같은 맥락이다. 이혼으로 홀로 남겨진 뒤 폐인이 되어 더 이상 연재를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오성무는, 연재 중단을 위해 주인공 강철(이종석)을 죽이기로 한다. 좀 갑작스럽긴 해도 영 무리한 설정은 아니었다. 극 중 강철도 마침 제 가족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재판을 받는 동안 폐인이 되었고,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뒤에도 의혹을 거두지 못한 세간의 시선 때문에 괴로워하던 참이었으니까. 강철한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 널 죽이면 연재를 멈출 수 있겠지.
그런데 어쩌지? 강철이 죽지 않는다. 강철이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 죽는 장면을 분명 그렸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강철이 난간에 매달려 있는 장면으로 둔갑해 있다. 마지막 순간 생각을 바꿔 생의 의지를 불태운 강철은, 컷 속에서 팔을 힘껏 뻗어 난간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술김에 기억이 뒤엉킨 건가 싶었고, 포기하지 말고 힘내서 연재를 계속하라는 시그널인가 하는 마음으로 넘어갔다. 그래, 너도 여기서 죽고 싶진 않겠지. 같이 힘내서 살아보자. 그런데 그리면 그릴수록 오성무는 강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같이 힘내서 사는 건 괜찮은데, 얘가 자꾸 내 뜻처럼 안 움직이는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 끌려다닌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은 오성무는 어떻게든 강철을 죽이려 하지만, 기묘하게도 강철은 매번 살아난다. 맞은 편에서 돌진해 오는 대형 트럭과 정면충돌해 죽는 장면을 그렸는데, 잠시 쉬고 돌아와 보면 강철이 핸들을 현란하게 꺾으며 드리프트로 트럭을 피해 가는 장면으로 둔갑해 있다. 괴한한테 찔려 죽는 장면을 그려 넣으면, 다음 컷에 의사가 등장해서 강철을 살려낸다. 이놈의 주인공은 생의 의지가 쇠심줄이다.
피조물에게 끌려다니느니 막장 엔딩으로라도 연재를 끝내려는 창조주와, 영문은 모르지만 자꾸만 맥락도 없이 제 앞에 던져지는 재앙을 피해내는 주인공이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웹툰 〈더블유〉의 스토리는 자꾸만 산으로 간다. 죽었던 주인공이 갑자기 살아 돌아오질 않나. 몇십 회 분량을 죄다 주인공이 꿨던 꿈인 것으로 퉁 치고 지나가버리질 않나. 안 그래도 아슬아슬했던 개연성은 연재를 거듭하면서 죄다 구멍이 났다. 작가 마음은 원래 작가가 제일 잘 아는 법, 자기 이름 달고 나오는 물건이 흉하게 나오길 바라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 오작가님, 정말 힘드셨겠다.
종방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송재정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글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면 너무 괴로운데, 20년가량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자신이 뿌린 씨앗도 결국엔 스스로 자란다는 것이었다고.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 세상에 나온 작품은, 보는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해석했다면 그게 맞는 거라고. 그런 마음을 담아 〈더블유〉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복잡한 트릭으로 가득한 세계를 설계하는 작가님조차도, 글이 뜻처럼 풀리지 않아 자기가 쓴 글에 끌려다니는 순간이 있으셨던 거군요.
하긴, 생각해보면 그게 꼭 작가들만 겪는 악몽은 아닌 지도 모른다. 글은 차라리 통제가 쉽지. 삶은 글의 반의반도 통제가 안 되지 않던가. 인생은 기승전결의 서사적 리듬을 타고 전개되는 글과는 달라서, 개연성도 없이 빵빵 터지는 변수들이 도처에서 튀어나오고, 계획한 일들도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사정을 모르는 남들이야 너무 쉽게 “넌 왜 그 모양으로 살아?”라고 하겠지만, 자기 삶이 갈피가 안 잡히는 걸 즐거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라고. 웹툰 〈더블유〉 전개가 산으로 가는 게 가장 안타까울 사람이 오성무 작가이듯, 우리 삶이 산으로 가는 게 가장 안타까울 것 또한 우리 아니겠나.
1월의 마지막 화요일, 아마 벌써부터 연초의 계획들을 지키지 못해 좌절하신 분들 많으실 테다. 내가 생각한 1월 말은 이런 모양새가 아니었는데 싶어서 자신의 의지박약을 걱정하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 그 마음 잘 안다. 나도 그러고 사니까. 글도 삶도 마음처럼은 안 흘러가니까. 마음먹은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삶에 끌려다니며 사는 기분이 뭔지 안다. 괜찮다. 아직 2021년은 11개월이나 남았고, 처음 예상했던 대로의 결말은 아니어도 어떻게든 그럭저럭 결말을 맺을 기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거 아는가? 우리끼리니까 말씀드리는 비밀인데, 나도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결론이 이렇게 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어떻게든 끝은 맺지 않았나.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