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의 허진호 감독에 매료됐던 사람이라면 지금 [덕혜옹주] 같은 영화를 만드는 허진호 감독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의 질이 아니라 영화의 소재 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로 혜성같이 등장한 뒤 연이어 [봄날은 간다]를 만들어냈을 때의 허진호 감독은 멜로 영화의 한 정점 같았다. 물론 그는 이에 부담감을 언급하기도 했고 언제고 다른 소재의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를 연이어 본 관객이라면 허진호란 이름에서 결코 멜로란 흔적을 지워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건 마치 연관검색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계속해서 [외출]과 [행복] 같은 멜로 영화를 만들며 그 반짝임이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만들어내는 남녀의 이야기는 탁월하고 아련했다. 

[봄날은 간다]는 [8월의 크리스마스]와 함께 허진호 감독의 가장 빛나던 순간이다. [봄날은 간다]와 [8월의 크리스마스]는 다른 듯 닮은 영화다. 만남과 헤어짐을 하는 남녀가 있고, 그 과정을 통해 봄날이 가는 것처럼 생(生)의 한때와 그것이 지나감을 보여준다. 허진호의 영화에는 계절의 배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는 뚜렷한 계절의 색을 보여주며 사람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기도 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이름, 은수(이영애)와 상우(유지태)는 겨울에 처음 만나 봄에 사랑을 하고 여름에 헤어진다. 이 뻔하디 뻔한 이야기 속에서 남녀의 각기 다른 상황과 언어를 배울 수도 있고 소년 같은 상우의 성장을 볼 수도 있다. 이야기를 감싸는 아름다운 풍경은 덤이다. 뻔한 통속이라 부를 만한 영화의 여운은 뻔하지 않게 참으로 길게 이어지고, "라면 먹을래요?"("라면 먹고 갈래요?"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은 이 대사가 맞다)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같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 명대사를 만들어냈다. 연출과 각본의 힘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음악의 힘도 빼놓을 수 없다. 

음악감독 조성우의 음악은 영화의 풍경 곳곳에, 그리고 은수와 상우의 감정 사이사이에 선율과 분위기를 채워 넣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이미 호흡을 맞췄던 허진호와 조성우는 [봄날은 간다]에서 다시 만났다. 이때의 허진호가 반짝였던 것처럼 조성우(와 그의 음악) 역시 이때 가장 반짝였다. [8월의 크리스마스] 역시 훌륭했지만 이즈음 조성우가 만들었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봄날은 간다] 영화음악은 특히 돋보였다.

사운드트랙에선 두 말 할 것 없이 김윤아가 부른 주제가 '봄날은 간다'가 가장 유명하지만, 앨범의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처럼 서정적이면서 길게 여운을 남기는 곡들이 이어진다. 유지태가 특유의 멋진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해 봄에'는 노래에서 가창력보다 음색과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해주는 듯하고, 심성락의 아스라한 아코디언 소리가 곡을 이끄는 메인 테마 'One Fine Spring Day' 역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채워왔다. 이 세 곡을 기둥으로 피아노와 기타 등 다양한 악기들의 변주가 사운드트랙을 채운다. 

훌륭한 사운드트랙이 그렇듯 각 곡들마다 영화의 장면 장면이 담겨있다. 영화가 나온 지 벌써 15년,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찾는다. 이제 조금 더 추워지면 은수와 상우가 처음 만나는 겨울이 시작된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둘의 여정을 음악은 더 설레게도 더 슬프게도 한다. 좋은 영화음악은 그런 것이다.


김학선 /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