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막 시작되던 서른만 해도, 프리랜서인 내가 30대 내내 검은 양복을 자주 입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0대처럼 처절한 푸르름은 아니더라도 30대는 여전히 청년이고, 기껏해야 친구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부고를 듣는 게 전부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해 가을, 내 목에서도 당장 제거해야 할 혹이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해 놓고도 그랬다. 자다 일어난 부스스한 몰골로 병문안을 온 친구들을 맞이하면서도, 우리 또래 중에 먼저 먼 길을 가는 친구들이 많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수술이 잘 되어 이렇게 금방 회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세대에서도 때로 아프고 다치는 이들이 있을 것이나 이내 회복할 거라고, 정말 막연하게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바로 그다음 해부터, 30대는 또래 친구들의 부고를 듣거나, 투병 소식을 들으며 간절히 쾌유를 기원하는 일로 빼곡해졌다. 그토록 원하던 직장에 들어간 뒤 몇 주 만에 자다가 조용히 숨을 거둔 친구부터, 세상을 견디는 일이 버거워 그만 주저앉아버린 친구, 온몸에 퍼진 종양과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우다가 세상을 떠난 친구, 일터로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한 친구,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친구, 치료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이제 회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던 순간 다시 재발한 친구…. 떠난 친구가 이토록 많으니, 아직 여기 남아서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보려고 싸우고 있는 친구의 수는 다 헤아리기 어렵다. 언젠가 보험을 팔던 친구가 꼬부라진 혀로 “내가 이러려고 친구에게 보험을 파는 게 아닌데”라며 울었을 때, 나도 전화기의 마이크를 막고 조용히 울었다.
이별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도 그랬다. 그래서 어쩌면 이별하게 될지도 모르는 환자나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마음을 주기보다는,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더 열심히 줬던 것 같다. 나 또한 오랫동안 환자의 가족이었고 그 뒤로는 더 오랫동안 유가족이었으니까. 친구들의 병실이나 빈소를 찾을 때마다 자꾸 가족들에게 눈이 갔다. 떠난 이의 기억을 안고 오래오래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유가족을 만나는 빈소도 그랬지만, 병실일 경우가 더더욱 그랬다. 환자의 투병 기간을 함께 견뎌내는 가족들의 얼굴, 익숙해진 절망과 피로와 매일 새롭게 싸우는 가족들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환자는 옆에서 병구완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포착한다. 옆에서 버티는 사람들이 흔들리면 환자도 흔들린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징글징글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아픈 사람보다 아픈 사람 주변의 이들에게 더 많이 마음을 주곤 했다. 빌려줄 만한 목돈이 없으니 대신 푼돈으로 살 수 있는 건강식품을 사서 쥐여 준다거나, 그럴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괜히 더 자주 연락해서 말 한마디라도 건네는 식의 서툰 위로. 하지만 가장 외로운 건 병과 싸우고 있는 당사자였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 외면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환자에게 직접 감정을 이입하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오랜 시간 환자의 가족이었던 경험을 꺼내서, 내가 다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로만 감정을 통제한 거였겠지.
그래서 김보통 작가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카카오TV 드라마 〈아만자〉를 보는 건 여러모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원작 웹툰조차 볼 엄두가 안 나서 처음 몇 편만 읽고는 열심히 피해 다녔는데, 그걸 실사로 본다는 건 상상도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위암 말기 선고를 받은 청년을 주인공으로 세워 그의 투병기를 다룬 〈아만자〉는, 특유의 담담한 톤 때문에 더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작품이다. 작품이 먼저 통렬하게 울어준다면 보는 사람도 함께 따라 울어버릴 수 있을 텐데, 간결한 선과 느릿느릿한 리듬으로 일관하는 김보통 작가의 스토리텔링은 좀처럼 먼저 울지도 않는다. 주인공은 살아 있느라 온 힘을 다 써서 울 기력도 안 남아 있고, 그래서 독자가 먼저 울자니 어쩐지 죄스러워지는 그런 작품이다.
실사로 보면 좀 나을까 했던 나의 바람은, 주인공을 연기하는 지수가 가족들에게 암 선고 소식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어쭙잖게 웃는 표정을 연습하는 장면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맞다. 그렇지. 주변의 가족들을 가장 많이 걱정하는 것도, 그래서 제 마음을 다 토로할 겨를이 없는 것도, 그런 탓에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도 사실은 환자 본인이었지. 이제 막 인생이 피어나는 시기라고 하는 20대 후반에, 희망이 없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그 충격을 완화해서 전할 방도를 궁리하는 청년을 연기하는 지수의 얼굴 앞에서 나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수년간 애써 피해왔던 원작 웹툰을 결제해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세상을 먼저 떠난 나의 누나도, 먼저 떠나간 친구들도 다 그렇게 외로웠을까. 산 내가 죽은 그들에게 물어볼 방법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저, 애써 마음을 추스른답시고 환자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시간을 후회할 뿐.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친구와 병원에서 만날 일은 더 늘어날 것이다. 아픈 친구를 위로하거나, 빈소를 찾아 친구의 가족들을 위로하거나, 혹은 나를 찾아온 친구를 병원 침대 위에서 만나게 되거나. 생각하기 싫은 일이지만, 싫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프리랜서니까 검은 양복 따위 입을 일도 별로 없으리라 생각했던 30대에도 벌써 한 해에 한두 차례는 친구들 때문에 양복을 꺼내 입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다가올 40대와 50대에는 그 빈도가 더 잦아지겠지. 그때가 되면, 나는 그들의 손을 더 힘내서 잡을 수 있을까. 더 용기 내서 마음과 마음을 잇고, 조금이라도 덜 외로운 순간들을 남길 수 있을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