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사람들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한국사회의 권력구조는 <빈센조>가 그린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선악의 구도 또한 그렇게 명쾌하지 않다는 것을.

“중앙집권 구조가 강력한 국가에서는 슈퍼 히어로물이 나올 수 없다.” 한국에서 슈퍼 히어로물이 잘 안 만들어지는 이유로 가장 쉽게 언급되는 이유다. 위험에 처한 이들을 구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지켜내는 영웅이 나오기 위해서는 권력의 공백이 필수적이다. 카우보이 서사는 미국 서부시대의 혼란과 치안 공백으로부터 나왔고, 슈퍼맨과 배트맨 서사는 가난을 피해 도시로 몰려온 이들과 때마침 일어난 대공황으로 인해 도시의 치안이 위태로울 때 탄생했다. 일본의 사무라이 서사 또한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낭인들이 득세했다는 역사적 배경이 존재하고, 중화권의 무협 서사 또한 어지럽게 왕조가 바뀌던 시기 속세를 등지고 무예를 연마하던 초절정 고수들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 중앙정부의 권력이 약하거나 혹은 그 권력이 체제의 말단까지 가 닿기 어려울 만큼 땅덩이가 큰 탓에 전체를 아우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그 빈 자리를 채워 질서를 제공해 줄 만한 슈퍼 히어로를 상상한다.

일찌감치 뉘 집 부엌에 놋그릇이 몇 개가 있는지까지 국가가 파악할 수 있는 중앙집권 구조를 완성한 한반도에서는, 그래서 슈퍼 히어로 대신 ‘반영웅’들이 많이 등장했다. 권력의 공백이 아니라 권력의 과잉이 문제였던 땅이라, 사람들이 분노하는 대상이 정부 그 자체인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정부의 수탈에 들고 일어나는 임꺽정이나 홍길동, 장길산과 같은 의적들, 임금과 양반님네들을 도술로 골려 먹는 전우치,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함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진 사람들을 털어먹은 희대의 사기꾼 봉이 김선달…. 정부의 필요로 인해 발주된 ‘반공영웅’ <간첩 잡는 똘이장군>(1979)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의 히어로들은 정부나 체제의 편에 서서 싸우지 않는다. 그나마 체제의 편에서 싸우는 존재로 호명되곤 하는 이순신 장군조차도, 사악한 대신들의 모함과 무능한 선조 임금의 변덕으로 고생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나라 아닌가. 미디어는 반복해서 홍길동이나 임꺽정처럼 권력을 뒤집어 엎는 반영웅들을 호출하고, ‘부패한 고려’를 끝장내고 새 시대를 여는 ‘건국 영웅’ 이성계와 정도전을 그렸다.

tvN <빈센조>(2021)도 마찬가지다. 박재범 작가의 전작 <열혈사제>(2019)가 그랬듯, <빈센조>의 세계도 썩을 대로 썩어서 정석적인 대응이 불가능한 세계다. 경찰과 검찰, 언론은 모두 썩었고, 자본의 힘으로 굳건하게 뭉친 카르텔은 서로가 서로의 비행을 알뜰살뜰하게 봐준다. 정의로운 마음을 간직한 시민들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을 잃지 않은 인권변호사 홍유찬(유재명)은 보아하니 승소율이 그렇게 높지 않은 것 같고, 거대자본 바벨그룹은 마음먹은 대로 팩트를 조작하고 사법권력을 제 수하처럼 부리며 승승장구한다. 이렇게 체제 전체가 다 썩었다는 인식의 끝에, <빈센조>는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의 고문 변호사로 일하던 한국계 이탈리아인 빈센조 카사노(송중기)를 불러낸다. 누구보다 악랄하고 셈에 철저하며 보복에 거리낌이 없는 마피아 조직의 최고 전략가라면, 그 강력한 악랄함으로 거악과 맞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는 말을 전면에 내건 <빈센조>는, 빈센조가 바벨제약의 원료 공장을 폭파하고 바벨그룹 회장의 침소에 주사기를 잔뜩 박은 쿠션을 경고조로 전시해두는 장면들을 전시하며 묻는다. 이제 좀 속이 시원하냐고.

글쎄, 속이 시원한지는 잘 모르겠다. 작품은 마피아가 진짜 마피아의 방식으로 탐욕의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그리겠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들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한국사회의 권력구조는 <빈센조>가 그린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선악의 구도 또한 그렇게 명쾌하지 않다는 것을. <빈센조>가 앞으로 얼마나 더 통쾌한 장면들을 그려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의 접근이 현실세계에서는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실현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큰 효과가 없을 거란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안다. 게다가 빈센조의 활약은 기존에 권력과 싸워 온 홍유찬 변호사 같은 사람들의 방식이 ‘정의롭지만 무력한’ 방식이라는 전제가 깔려야 하는 것이니, 함께 킬킬거리며 웃는 것도 조금은 망설여진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 하겠지만, 오늘도 정석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고생하는 변호사들, 활동가들, 기자들,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이 다 헛일이라는 식의 발상 같아서.

그래도 굳이 <빈센조>에 마음을 준다면, 그건 마피아의 방식으로 카르텔과 싸우는 빈센조 카사노 변호사보다는, 그와 함께 바벨그룹과 맞서 싸우는 금가프라자 세입자들 때문일 것이다. 워낙 오랜 시간 동안 배운 사람들과 돈 많은 사람들에게 속고 당해온 탓에 좀처럼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하는, 때로는 비겁하고 자주 무심한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바벨그룹을 상대로 한 싸움에 기꺼이 동참해 조금씩 짐을 나눠 지는 그 평범한 사람들 말이다. 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염불을 외고, 법정에 나가는 변호사들의 옷에 칼 각을 잡아 다림질을 해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참여와 참여를 아끼지 않는 금가프라자 세입자들. 어쩌면 평범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현실 세계에선 존재하기 어려운 빈센조 카사노의 방식이 아니라, 조금씩 마음을 낸다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도 실천이 가능한 금가프라자 세입자들의 방식이 아닐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