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라 말하더니, 감수성의 유통기한 역시 만 년인 모양이다. 1990년대 관객의 평균 감성 수치를 상승시킨 왕가위 감독의 연출작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2020년대 관객마저 그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니, 왕가위 감독 대표작들이 4K 버전으로 리마스터링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중경삼림> <화양연화> <해피 투게더> <타락천사> <2046>까지 총 다섯 편의 리마스터링 버전을 왓챠에서 독점 공개했다.

모든 숏을 엽서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장센과 홍콩을 대표하는 배우들의 열연.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사랑할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1990년대 홍콩의 풍경과 인물들의 불안정한 심리를 한 데 녹여내 포착한 쓸쓸한 무드는 그만이 지닌 독보적인 무기다. 세대불문 모든 청춘의 마음에 스며들 수밖에 없는 왕가위의 영화들, 왓챠에서 공개한 리마스터링 작품들에 감성 지수를 매겨봤다. 보다 더 담백하거나, 비틀어 짜면 물이 나올 정도로 축축하거나. 본인의 감정 지수와 취향에 맞는 왕가위 감독의 리마스터링 대표작들을 골라보는 데 도움이 되길!


<중경삼림>

중경삼림 重慶森林, 1994

싱그럽고 청량한 외사랑들

감성 지수 70 ■■■■■■■□□□

<중경삼림>엔 이제 막 이별을 겪은 두 경찰이 등장한다. 경찰 233, 하지무(금성무)는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고 있다.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 애인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그녀가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한꺼번에 먹고 지난 기억을 깨끗이 잊을 생각이다. 곧 그의 앞에 나타나는 여인이 있었으니, 레인 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금발의 마약 밀매상(임청하). 하지무는 그녀를 사랑하겠다 다짐하지만, 금발의 킬러의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있다. 두 번째 주인공은 스튜어디스 애인에게 차인 경찰 663(양조위)다. 그는 집안 곳곳의 사물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정도로 연인의 공백에 심한 외로움을 느낀다. 샐러드 가게의 직원 페이(왕페이)는 가게의 단골인 경찰 663을 짝사랑한다. 페이는 경찰 663의 집에 몰래 들어가 자신의 흔적을 채워 넣고, 경찰 663은 점차 실연의 아픔을 극복해간다.

<중경삼림>

외로움에 적당히 취할 줄 알고, 범람하는 감정 속에서 저만의 방식으로 헤엄치는 법을 아는 청춘들의 여름은 청량하고 싱그럽다. 대담한 색채와 감각적인 편집, 한 치 앞을 모를 운명처럼 흔들리는 카메라는 이들의 초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담아낸다. 무엇보다 관객의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만드는 건 <중경삼림>의 음악. 샐러드 가게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던 경찰 663의 등장 신이 레전드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엔 마마스 앤 파파스가 부른 ‘캘리포니아 드리밍’의 힘이 컸다. 이제는 쉬이 느낄 수 없어 더 소중한 홍콩의 여름. 1990년대 특유의 낭만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중경삼림>은 충분한 만족을 전할 선택지다.


<타락천사>

타락천사 墮落天使, 1995

홍콩의 밤, 방황하는 청춘들

감성 지수 100 ■■■■■■■■■■

기억상실증에 걸린 킬러 재민(여명)에겐 자신의 일을 돕는 파트너(이가흔)가 있다. 파트너와 동업한 지 155주가 되었지만, 일하는 사이엔 이성의 감정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룰을 지닌 두 사람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재민의 파트너는 그가 일을 나간 사이, 주인 없는 방에서 그가 버린 쓰레기를 통해 재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짐작하며 혼자만의 사랑을 키운다. 한편 5살에 유통기한 지난 파인애플을 먹고 말을 잃은 하지무(금성무)는 밤마다 주인 없는 상점에 침입해 사장 행세를 한다. 밤거리에서 다양한 사람을 마주하던 어느 날, 그의 앞에 이별로 힘들어하는 찰리(양채니)가 나타난다. 우는 그녀를 위해 어깨를 빌려준 하지무는 그녀의 완전한 이별을 돕기 위해 밤거리를 헤맨다.

<타락천사>

“내 이름은 하지무. 수감 번호는 233이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과 번호. 유통기한 지난 파인애플을 먹고 말을 잃은 하지무 위로 <중경삼림>의 첫 번째 에피소드 속 주인공, 경찰 233 하지무가 떠오른다. 북적이던 모든 것이 빠져나간 홍콩의 휑한 밤거리. 목적지 없이 그를 돌아다니는 청춘의 방황을 탐미적으로 담아낸 <타락천사>는 <중경삼림>의 세 번째 에피소드로 구성됐던 작품이다. <중경삼림>의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져 따로 독립됐다. 장면과 장면 사이 행간이 넓은 <타락천사>의 전개를 불친절하게 느끼는 관객도 있을 터. 반대로 스타일리시한 미장센 아래 투영된 인물들의 심리, 영화가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이야기의 빈칸을 관객이 직접 채워나갈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감성 지수 100%.


<해피 투게더>

해피 투게더 春光乍洩, 1997

눈빛으로 말해요

감성 지수 80 ■■■■■■■■□□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은 만남과 이별을 자주 반복한다. 책임감이 강한 아휘와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인 보영, 극과 극에 놓인 성격 탓이다. 다시 잘해보자는 마음을 품은 두 사람은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아르헨티나에 새로운 터를 잡는다.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 이별 후 탱고 바에서 호객 행위를 하던 아휘는 새로운 남자와 함께하는 보영을 만난다. 보영은 아휘의 곁을 자꾸 맴돈다. 급기야 누군가에게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 아휘를 찾아온 보영. “다시 시작하자”는 말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휘는 보영을 받아줄 수밖에 없다. 아휘는 아픈 연인을 정성껏 돌본다. 언젠가 또 떠날지도 모를 그의 변심을 두려워하면서.

<해피 투게더>

왕가위 월드의 인물들은 상대에게 품은 뜨거운 마음을 홀로 끌어안고 쓸쓸히 방황한다. 시간이 흐르며 마음의 온도는 낮아지기 마련이지만, 그 자리엔 화상 자국 같은 감정의 잔재들이 남는다. 아휘와 보영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순간은 재회 이후 앞으로의 행복을 약속하던 순간도, 탱고를 추던 순간도 아니다. 잠든 연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순간. 온전히 상대방만을 위한, 가장 진한 사랑을 담아낸 그 눈빛이 상대방에게만 닿지 않는다는 사실은 보는 이의 마음에도 생채기를 남긴다. 눈빛으로 더 많은 대사를 전하는 장국영과 양조위의 뛰어난 연기에 많은 빚을 진 장면이다. 격정적인 탱고 선율처럼 요동치는 이들의 감정선을 섬세히 포착한 왕가위 감독은 이 작품으로 제50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화양연화>

화양연화 花樣年華, 2000

그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빛날 시간들

감성 지수 90 ■■■■■■■■■□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첸 부인(장만옥)과 차우(양조위). 두 사람의 배우자는 같은 날, 같은 시기에 집을 비우는 일이 잦다. 차우는 첸 부인의 핸드백이 자신의 아내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첸 부인은 차우의 넥타이가 자신의 남편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의 관계를 눈치챈다. 동병상련의 위치에 선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많아진다. 차우와 첸 부인의 만남은 어쩐지 계속 비밀스러워진다. 우리는 배우자들의 관계와 다르다고 계속 되뇌지만, 이들이 서로를 향해 품은 마음은 점점 더 깊어진다.

<화양연화>

첸 부인과 차우는 서로를 향해 자라나는 감정을 끊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마음은 재단될 수 없는 것. <화양연화>는 이렇게 소리 없이 침범해 일상을 뒤흔드는 폭발 직전의 사랑을 99분 안에 밀봉시킨 영화다. 서로의 어깨를 스칠 수밖에 없던 좁은 골목, 첸 부인에게 차곡차곡 쌓인 제 감정을 토해내던 차우의 대사 위로 쏟아지던 빗소리… 영화의 모든 순간엔 첸 부인과 차우의 감정이 녹아있다. 왕가위 감독은 결정적인 장면에 슬로우 모션을 활용해 캐릭터들의 절제를 담아냈다. 첸 부인과 차우로 완벽하게 변신한 장만옥과 양조위는 뒷모습에 많은 말을 담아내는 놀라운 연기를 펼친다. 특히 눈빛은 물론, 걸음걸이부터 손끝까지 온몸으로 첸 부인의 감정을 표현한 장만옥은 첸 부인이 어떻게 1990년대 시네마의 아이콘으로 남을 수 있었는지 짐작 가능케 할 만큼 밀도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


<2046>

2046 2046, 2004

왕가위표 감성 블록버스터

감성 지수 80 ■■■■■■■■□□

차우(양조위)는 2046년 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고 있다. 과거 사랑에 대한 상처를 안고 있는 그는 진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2046>은 차우와 그를 스쳐 간 세 여인의 이야기를 담는다. 차우의 첫 번째 연인은 같은 호텔 옆 호실에 묵고 있는 바이 링(장쯔이)이다. 차우처럼 가벼운 만남을 원했던 바이 링은 어느새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호텔 사장의 딸 징웬(왕페이)은 종종 일본어를 중얼거린다. 일본인 연인 탁(기무라 타쿠야)과 원치 않은 이별을 한 뒤의 후유증이다. 차우는 징웬과 탁의 관계 개선을 돕고, 징웬은 차우의 소설을 함께 쓰며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한편 차우는 싱가포르에서 만난 도박판의 여인을 회상하기도 한다. 검은 거미란 별명을 지닌 그녀의 이름은 수리 첸(공리). 차우는 그녀에게서 과거의 연인을 떠올린다.

<2046>

차우와 수리 첸이란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맞다. 1966년을 배경으로 한 <2046>은 1962년을 배경으로 한 <화양연화>의 세계관을 잇는 일종의 후속편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상냥함과 다정함의 끝이었던 차우가 매우 냉소적인 인물로 변했다는 것. 세 여인을 만나는 차우의 현재, 그들과의 연애담이 반영된 차우의 소설 속 장면들이 교차되어 전개되는 <2046>은 뒤죽박죽 뒤섞인 에피소드의 순서를 바로 짜 맞추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다. 곳곳에 <아비정전> <화양연화> <해피 투게더> <중경삼림>의 흔적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배치되어 있으니, 팬들에겐 종합선물세트나 다름없을 터. 왕가위 감독의 페르소나 양조위를 필두로 장쯔이, 왕페이, 유가령, 기무라 타쿠야, 공리, 짧은 출연으로 함께한 장만옥까지 만날 수 있는 초호화 캐스팅도 놓칠 수 없는 관전 포인트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