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기혼 여성의 삶이 어떤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대의 맨 앞자리에 박하선이 있는 것이다
결혼한 남자들은 종종 엄살을 섞어 농담처럼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라는 말을 하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저 말로는 남자보단 여자 쪽이 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여자 연예인들이 결혼하고 난 뒤 자연스레 섭외가 줄어들거나 무대가 줄어들면서 ‘가정 생활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고, 복귀해서 활동하려 하면 개런티가 깎이는 걸 경험했던 게 바로 엊그제 아닌가.
“저도 잠깐씩 일을, 오빠 따라서 2년 반 딱 끊고 돌아와서 다시 하는데, 출연료도 많이 깎이고…” MBN에서 방영되었던 예능 <자연스럽게>에 출연한 배우 한지혜는, 결혼 후 2년 반 정도 공백기를 가지고 복귀했더니 당장 출연료가 깎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글픈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잇는 한지혜에게 동료 소유진이 대꾸했다. “애 낳으면 더 깎여!” 오래전의 이야기도 아니다. 한지혜가 결혼한 것이 2010년, 소유진이 첫째 딸을 출산한 게 2014년의 일이다.
남자 연예인도 결혼 뒤 예전만큼의 인기를 구가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여자 연예인만큼 그 낙차가 심하진 않다. 여자 연예인이 비혼 상태로 지낼 때는 마치 무슨 여지가 있는 상대를 찔러보듯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세상은, 결혼을 하고 나면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듯 관심을 뚝 끊곤 했다. 사람이 무슨 포장 뜯자마자 값어치가 떨어지는 식료품도 아니고. 그런 세월이 무척이나 길었고, 사실은 아직도 다 안 끝났다.
2015년 열애설이 나고 1년 6개월, 2017년 결혼 후 채널A <평일 오후 3시의 연인>(2019)으로 복귀하기까지 2년 6개월 정도 공백기를 가졌던 박하선 또한 비슷한 고민이 있었으리라. 데뷔 후 처음으로 자의와 무관한 경력단절을 경험한 박하선은, 카카오TV <톡이나 할까>에서 결혼 뒤 한동안 캐스팅 순위에서 밀렸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아직 난 박하선 자체로 젊고 매력 쩌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나, 인생의 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텐데.
흥미롭게도, 박하선이 복귀한 뒤 보여준 일련의 출연작들은 마치 계획이라도 한 듯 일관된 궤적을 그린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무심한 남편에게 받은 상처를 다른 남자와의 만남에서 치유 받는 주부 지은의 삶을 그린 <평일 오후 3시의 연인>부터, 프로 골퍼인 남편의 커리어를 빛내는 배경으로 살 것을 강요당하며 ‘완벽한 현모양처’의 삶 속에 갇힌 은정 역할을 맡았던 tvN <산후조리원>(2020), 분명 둘이 같이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시댁 식구들의 눈에 들기 위해 버둥대다가 자신만 외로워지는 사린 역할을 맡은 카카오TV <며느라기>(2020~2021)까지. 박하선이 분한 인물들은 기혼 여성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고충과 외로움, 설움을 전에 없이 근거리에서 체험하고 증언한다.
결혼한 뒤에 맡게 된 배역들이 다 기혼 여성이고, 결혼 제도 안에서 경험하는 고충을 서사의 중심에 놓고 가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결혼한 여자 배우에겐 돌아가는 배역이 한정되는 현실을 개탄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박하선이 분한 인물들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어머니 같은 수식어만으로 요약이 가능한 주변부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제도 안에서 발버둥치며 투쟁하는 인물들이다. 기혼 여성의 삶을 ‘다 뻔한 이야기이고 모두가 아는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던 시절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기혼 여성의 삶이 어떤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대의 맨 앞자리에 박하선이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31일 방영된 tvN <드라마 스테이지 2021 – 산부인과로 가는 길> 속 화영 또한 그렇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 화영이 산부인과로 향하던 날, 하필이면 전국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다. 이 세계의 좀비는 다행히도 조지 로메로 감독 시절의 좀비들이 그렇듯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덕분에 재빠르게 움직이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지만, 5분 간격으로 규칙적인 진통이 찾아오는 중인 화영은 도저히 빨리 걸을 수 없다. 설상가상 택시 기사나 군인은 느릿느릿 걷는 화영을 좀비로 오인하고 승차를 거부하거나 사살하려 든다. 세상은 느리게 걷는 임산부 화영에게 불친절하고, 그 불친절을 뚫고 어떻게든 출산을 하기 위해 산부인과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다.
물론 좀비 아포칼립스보다야 상황이 낫긴 하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화영이 사는 세상보다 크게 나은 것 같지는 않다. 곳곳에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이나, 임신이 벼슬이냐며 임산부 배려석에 매직으로 X자를 그리고 ‘배려를 강요하지 말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는 사회 아닌가. 머릿수만 세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적의를 지닌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의를 지닌 사람이 그 적의를 이마에 써 붙여 놓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인류에 대한 희망만으로 그 공포를 극복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적의로 가득 찬 세상 속으로, 화영은 만삭의 배를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때로는 요구르트 판매원 여성 재숙(김재화)처럼 생판 타인의 호의에 기대기도 하고, 직업 윤리 하나로 목숨을 걸고 화영을 기다리는 산부인과 간호사 소진(배윤경)의 윤리관에 기대기도 하면서. 공포를 딛고 아이를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발걸음을 떼는 화영의 얼굴은 비장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최근 몇 년간 젊은 기혼 여성의 삶을 가장 근거리에서 묘사해 온 박하선의 육체를 빌린 얼굴이라서 더 비장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