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150억년만 기다리면, 모든 헤어졌던 만물이 결국 다시 만난다. 이건 CNN에도 뉴스로 나왔어요. 그런 희망이 있어요, 나는.

대체 마크 저커버그는 무슨 생각으로 ‘과거의 오늘’ 기능을 만든 걸까? 가끔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과거의 오늘’을 볼 때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망각이 좋은 이유가 뭔가. 생각만으로도 이불킥을 하게 만드는 온갖 삽질의 흑역사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미는 듯 아픈 이름들을 안 떠올리고 살 수 있게 해줘서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페이스북은, 굳이 수 년 전 오늘 있었던 일들을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내서, 먼지를 털어내고 광을 내서는 내 눈 앞에 자랑스럽게 전시해준다. 이제는 사이가 온통 뒤틀려서 말도 섞지 않는 사람과 사이 좋게 희희낙락 점심을 먹고 인증샷을 올린 4년 전 오늘의 나, 지금은 세상을 떠나 화해하고 싶어도 화해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서운했던 경험담을 토로하던 7년 전 오늘의 나 같은 기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딸려 나온다. 너는 잊고 살았는지 몰라도 우리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면서. 정말이지 사악하기 짝이 없다.

너무 자주 인용되어 이젠 그 울림을 많이 잃어버린 격언이지만, 그래도 비극적인 개인사를 딛고 희극의 왕이 된 찰리 채플린의 말이니 한 번 더 인용해보자.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인 인생도 롱숏으로 보면 희극이다. 불과 수 년 만에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질 일들로, 그 때의 나는 왜 그렇게 크게 열을 내고 크게 화를 내고 의욕적으로 움직였던 걸까? 나는 마치 추리소설의 결말을 다 알고 있어서 심드렁해진 독자마냥, 수 년 전의 내가 남긴 기록을 무심히 바라보며 혼자 과거의 나를 향해 중얼거린다. 너가 지금 별 일 아닐 거라고 무심하게 넘어간 그 일은 6개월 뒤에 후회할 만한 결과를 낳게 될 거야. 그렇게 사이 좋게 지내던 그 후배와는 몇 년째 연락하고 싶어도 연락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단다. 그때는 삽질인 줄 몰랐던 그 모든 삽질과 실수인 줄 몰랐던 그 모든 실수들. 나는 어쩐지 착잡한 마음이 되어 브라우저 창을 닫으며 중얼거린다. 삶이 이처럼 의미 없는 실수의 연속이라면 대체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이 너무 길어져 우울해질 때면 나는 윤성호 감독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던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0)를 떠올린다. 배우 혁권(박혁권)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재민(황제성)이 헤어진 전처 하라(공효진)의 전화를 받고는 마음이 뒤숭숭해지는 며칠을 그린 이 작품 안에는,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고민에 몰두하고 있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감독 앞에서 시나리오 속 등장인물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다가 그만 자신의 젖꼭지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늘어놓은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혁권이나, 자신의 매니저들에게 매번 같은 패딩점퍼를 입히며 “이거 입은 매니저랑 일할 때마다 일이 잘 됐다”고 말하는 배우 용근(배용근) 같은 인물들. 재민은 “배우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라서 헛소리를 해대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이들에겐 그 ‘헛소리’ 같은 일들이 몹시도 실존적인 고민이다.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헛소리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실존적인 고민을 겪고 있는 게 어디 배우들뿐이랴.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서는 툭툭 시비를 걸다가 끊어버리는 전처 하라를 대하는 재민의 대응도,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겐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그때 하라가 집앞 텃밭에 열린 토마토를 보러 오라고 했을 때, 구두에 흙 묻을 거라 안 된다고 말하는 대신 하라와 함께 토마토를 땄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붙잡았더라면 뭔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는 재민은 하라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절박한 마음으로 받지만, 말은 마음과 달리 자꾸만 헛나오고 사정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좀처럼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 멀리서 보면,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면,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 의미 없는 것만 같은 일들도, 그 순간의 당사자들에겐 너무도 절박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하라를 붙잡고 싶었던 재민이 그랬던 것처럼.

하라와의 통화가 안 좋게 끝나서 의기소침해 있던 재민에게, 재민의 단골 카페 가화의 아르바이트생 재영(박희본)은 말한다. “우주가 무한한 거 같아도 실은 유한해요. 150억년 전에 그 어떤 무언가가 폭발하면서 태어난 거, 그게 우주잖아요. 그렇게 태어난 우주가 아직도 어리다고. 계속 커야 해. 그렇게 자꾸 팽창하다가 결국 한 점으로 돌아가는데 그 주기가 얼마냐. 그게 150억년이에요. 그러니까 150억년만 기다리면, 모든 헤어졌던 만물이 결국 다시 만난다. 이건 CNN에도 뉴스로 나왔어요. 그런 희망이 있어요, 나는. 그래서 난 아무 걱정이 없어요.” 150억년 뒤면 모두 만날 거라 괜찮다니.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어이없는 위로지만 이상하게 곱씹을수록 안심이 된다. 어쩌면 이 모든 우스꽝스러움이, 절박함이, 의미 없음이, 잊고 살았던 과거와 지우고 싶었던 후회가, 한 점으로 모여서 까닭이나 의미가 없어도 그 자체로 충분한 결론이 된다고 생각하면, 꾸역꾸역 살아보는 게 나쁜 일은 아니겠다 싶은 것이다. 비록 실수와 삽질로 가득한 삶이라도 말이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