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깨어나서는 안 될 것의 봉인이 풀린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이 어둠의 존재를 막기 위해 분주한 이들을 쫓는 남자가 있다. 괴이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알 수 없는 사건의 비밀을 하나씩 들춰내며 미스터리한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그가 바로 박해준이 연기하는 강력계 형사 호태다. 그런데 열정에 비해 뭔가 부족하고 허술해 보인다. 한껏 날이 서 있던 그동안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전에는 자신과 거리가 먼 캐릭터에 더 마음이 끌렸다면 이제는 나와 닮아 내게 딱 붙은 캐릭터에도 자신이 생겼다는 박해준의 말에 힘을 뺀 연기에 대한 재미가 느껴졌다. 일그러지고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수사에 임하는 호태가 어느 틈에 슬쩍 빈틈을 보여주는 모습이 이 말을 충분히 설명한다.

매체 연기의 시작점이 된 <화차>, 배우를 믿는 현장이기에 연기에 완벽하게 몰입했던 <4등>의 터닝포인트를 지나 드라마 <부부의 세계>로 이제 모든 사람이 알아보는 배우가 된 박해준은 좀 더 다양한 역할로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그의 행보의 한 장면을 담아낸 <제8일의 밤>에 대해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전한다.


<제8일의 밤>은 2019년 말 촬영을 마쳤다. 개봉을 많이 기다렸을 것 같다.

극장에서 공개하지 못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 관객들과 만난다는 점은 반갑다. 우리 영화가 넷플릭스가 원하는, 또 잘 어울리는 영화라 생각한다.

<제8일의 밤>에서 맡은 역할은 형사 호태다. 형사 역할을 여러 번 했다. 영화 <명왕성>(2012) <탐정: 더 비기닝>(2015), 드라마 <아름다운 나의 신부>(2015)가 생각난다. 이번엔 또 전과 다른 결이다. 약간 허당기가 있다고 할까.

그동안 연기를 해오며 카메라 앞에서 조금 편해진 것도 있다. (웃음) 이 영화가 흘러가야 하는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조력해줘야 하는 역할이 바로 호태가 아닌가 싶었다. 호태는 어떤 부분은 좀 헐렁하게 넘어가기도 하고, 또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황당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호태는 관객의 반응을 대신해주는 거란 느낌이 들 수 있을 거다. 관객과 같이 공감하면서 ‘그렇지! 맞지!’ 이런 느낌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다 보니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후배 형사 동진(김동영)이 준 덧신을 머리에 쓰던 장면이 기억난다.

실제로 덧신을 준다는 것은 대본에 없었다. 리허설하는데 뭘 주더라. 그래서 이게 뭐야 하면서 머리에 썼는데 감독님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며 재미있어 하시더라. 그렇게 탄생한 장면이다.

정지우 감독도 이해영 감독도 박해준의 자연인으로서의 매력은 약간 허당 같기도 하고 정말 웃기는 멘트도 잘 날리는 ‘반전’이라고 하던데.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말 잘 듣는다. (웃음) 허당기가 있긴 하다. 근데 그게 재미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난 사람 웃기는 재주가 없는데 가끔 한 번씩 말도 안 되는 데서 웃으시기는 하더라. 정말 말도 안 되지 않나? 나는 하나도 재미없던데. 왜지? (일동 웃음)

드라마 <미생>

이성민 배우와 <미생>(2014) 이후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어땠나.

좋다. 이성민 선배님이 하신다고 해서 나도 대본을 더 깊게 봤을 수도 있고, 이거 해야지 하는 생각도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대본을 보니 내용이 신선했다. 왜 이성민 선배가 이 작품을 하고 싶으셨는지 알 수 있겠더라. 상대 배우와 호흡이 잘 맞는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말을 주고받을 때 에너지 같은 게 전해지는 기분 같은 거. 선배님과 연기할 때 딱 그게 느껴진다.

<미생> 촬영 중 이성민 배우가 후배들에게 쓴 쪽지가 화제였다. 박해준 배우에겐 “니가 NG 안 내야 빨리 끝난다”라고 썼다고 했다. 이번 촬영은 순조로웠나.

"어! 네!" (당황하며) 그렇게 NG 날 부분도 없고. 여전히 NG 많이 내는 편이긴 한데 영화와 드라마는 속도도 다르니까. 이번엔 전혀 이야기 없으셨다. (웃음)

이번에는 이성민 배우와 말보다 몸으로 많이 부딪치던데 액션 합은 잘 맞았나.

이번에 찍으면서 많이 놀랐다. 이성민 선배님이 액션을 많이 안 해보셨지 않나. 같이 연극도 하고 드라마도 했지만 몸으로 부딪치는 장면은 처음인데 정말 (엄지를 치켜세우며) 잘하시더라. 나는 솔직히 못 하실 줄 알았는데 운동 신경도 좋으시고 유연하셔서. 확실히 연기를 잘하면 액션도 잘하는 것 같다. 이 두 가지가 달리 가는 게 아닌 것 같다.

<아름다운 나의 신부> 촬영 중 유리에 베인 적이 있다. <악질경찰>(2019) 때는 이선균 배우와의 격투신 후 목에 멍이 들었다고 하던데 이번 작품 액션신에서 힘든 점은 없었나.

계절상 여름으로 넘어가는 때라 벌레들? 아! 이런 걸 어렵다고 하면 안 된다. (웃음) 밤 촬영이 계속 이어지는 것? 아! 이것도 어렵다고 하면 안 되는데. 밤 촬영은 보상이 있다. 촬영하며 밤을 꼴딱 새우고 해가 뜰 때쯤 모여서 간단하게 소주 한 잔 먹는 즐거움이 있었으니까. (일동 웃음)

이성민 배우는 술을 안 드시지 않나.

술은 안 드셔도 안주는 잘 드시니까. (웃음)

(왼쪽부터) <힘을 내요, 미스터 리> <정가네 목장>.

악역 위주의 작품이 이어지다가 <힘을 내요, 미스터 리>(2018) 이후 역할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이 작품 <제8일의 밤>부터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부부의 세계> <비상선언> <정가네 목장> 등 공통점을 찾기 힘든 캐릭터들이 이어진다.

지금 나와 먼 곳부터 가까운 곳까지 점점 연기의 영역이 넓혀지는 것 같다. 나와 가까운 역할이라는 것은 지금 나의 모습과 닮은 역할을 말한다. 예전엔 이런 역할을 연기하는 게 어려웠다. 오히려 악역 같은 것이 더 쉽다는 생각을 했다. 나랑 먼 일이니까 거리를 두고 연기해 좀 더 편했다. 그런데 이젠 어떤 역할이든 재미있어졌다.

지금 촬영 중인 jtbc 드라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에서 만화를 그리기 위해 대책 없이 직장을 때려치운 40대 가장을 연기한다. 어떤 드라마인가.

대본이 정말 좋다. 재미있기도 하고. 그리고 웃긴다. 작품에 깔려 있는 슬픔도 있다. 내겐 도전 같은 작품이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야 하는 입장이라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요즘 보기 드문 드라마가 될 것 같아 즐겁게 촬영 중이다.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작품이다. 사전 제작이라 11월까지 촬영하고 그 이후에 방송될 예정이다. 연말에 바로 나갈지 내년으로 넘어갈지는 모르겠다. 웹툰 작가를 꿈꾸며 회사를 때려치우고 백수가 된 철없는 아빠다. 딸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아버지한테는 걱정스러운 아들이고 딸에게는 철부지 아빠다. 친구들에겐 자유롭게 사는 영혼이라며 부러움을 사고. 지금 내게 이 작품이 몸에 깊이 밴 것 같다. 계속 까불고 잘 못 알아듣고. 아무래도 사람이 좀 바뀐 것 같다. (일동 웃음)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었나. 고3 때 이모의 권유로 한예종에 진학했다고 들었다.

공부도 안 했고 너무 놀아서 대학을 가려고 해도 갈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예종이라는 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예종 공부 못해서 가는 대학 절대 아니다. 다 공부 잘한다. 나만 빼고. 이거 오해 없게 써주셔야 한다. (일동 웃음) 당시 한예종 입시에는 수능성적이 필요 없었고 내신 성적이 아주 작은 비율로 들어갔다. 거의 90%가 실기 성적이었기 때문에 내가 지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험을 봤는데 1차 붙더니 2차 붙고 3차까지 가더라.

(왼쪽부터) 젊은 시절의 박해준, 윤상의 <이사> 뮤직비디오 속 박해준.

비주얼로 붙은 건가. (웃음)

수업 때 교수님이 내가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편도 아닌데 왜 뽑았는지 아냐고 가끔 이야기했었다. ‘한 학년이 공연을 하나 올리려면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같은. 그러면 왕자도 있어야 하고 거지도 있어야 하고 신하도 있어야 하지. 작품 속 인물에게 맞는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모두 있어야 공연이 될 것 아니냐’ 하시면서 ‘거기에 좀 잘생긴 청년 역할을 시키려고 뽑아 놨는데 근데 얘는 안 되겠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핍박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일동 웃음)

95학번 한예종 2기다. 제대 후 00학번으로 재입학했다. 제적당하고 군대 갔다가 다시 입학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학교에 일단 들어가긴 했는데 재미가 없었다. 연기를 못했으니까. 못하기도 했었고 또 연극을 보러 다니는데 저걸 잘할 자신도 없었다.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밤을 새우며 고민은 많이 했지만 결국 학교도 안 나가고 그러다가 제적이 됐다. 그리곤 군대에 갔는데 전역을 앞두고 이제 뭐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연기가 다시 하고 싶어지더라. 졸업한 선배도 계셔서 전역을 하고 극단에 가보고 하다가 학교에 다시 들어가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학교에 재입학 가능한지 알아보러 갔는데 교수님이 날 못 믿겠다면서 각오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험을 다시 보라 하시더라. 그래서 몇 개월 준비하고 시험을 봤다. 시험 보고 00학번으로 다시 시작했다.

(왼쪽부터) <화차>, <4등>.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화면 캡처.

<독전>(2018)의 이해영 감독은 박해준을 <화차>(2012)에서 처음 봤을 때 <초록물고기>(1997)의 송강호 배우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이었다고 했다. 어떤 점을 좋게 봤을까.

(당황하며)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가. 약간 경상도 억양이 있는 역할이라 그런가. 최근 송강호 선배님과 작품을 함께 했는데 선배님은 나같이 헐렁한 사람이 아니다. 연기를 위해 엄청난 준비와 고민을 하신다. 그래서 그 집중도가 남다른 것 같다.

박해준에게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내가 처음 이렇게 현실적인 연기를 할 수 있구나 알게 된 것은 이상우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다. 차이무에서 연극을 하면서 리얼한 연기를 알게 됐고, 그걸 바탕으로 <화차>라는 작품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화차>는 영화를 시작하게 해준 소중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에 <화차>의 영향으로 비슷한 역할들을 몇 개 하다가 내가 딱 오픈된 것은 <4등>(2015) 이란 영화였다. 정지우 감독님은 나한테 어디 한번 맘대로 해보라 하시며 카메라를 뻗쳐 놓으셨는데 이때 배수관이 터지듯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느끼게 됐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2020)는 예전보다 더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신 계기가 됐고.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때가 됐다. 캐릭터도 다양해지고. 이것만은 꼭 해보고 싶다는 역할이 있다면.

최근에 조금 편안하고 재미있는, 약간 헐렁한 역할을 하다 보니까 다시 한번 기가 막힌 악역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온통 시뻘건 빛으로 물든 그런 악역을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다.

멜로는 어떤가.

부끄러워서. (웃음) 불러주신다면야. 내가 작품 속에서 어떤 가치가 있고 그게 부합하는 작품이라면 뭐든 하고 싶다.


글 · 씨네플레이 심규한 기자

사진 · 넷플릭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