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흑백 고전 영화에는 엔딩 크레딧이 없다. 그냥 영화가 끝난다. 타이틀 시퀀스라고도 부르는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있다. 제목, 배급사, 제작자, 촬영, 음악, 미술, 배우, 각본, 감독 등 주요 스태프의 이름이 표시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엔딩 크레딧이 중요해졌다. 반면 오프닝 크레딧의 비중은 줄어드는 느낌이다. 오프닝 크레딧 말고 바로 영화가 시작하는 오프닝 시퀀스가 먼저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이 분야의 강자다. 오프닝 크레딧이 천대받는 시대가 된 것 같지만 그래도 근사한 오프닝 크레딧을 가진 영화가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이 있을지 찾아보자. 2000년 이후에 개봉한 작품 가운데 골라봤다.


<카우보이 비밥: 천국의 문>(2003)

고백하자면 <카우보이 비밥: 천국의 문>(이하 <천국의 문>)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 때문에 이 포스트가 기획됐다. 이 오래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를 다시 보게 된 계기는 넷플릭스 때문이다. 최근 넷플릭스에 업데이트된 <천국의 문>은 식료품점에서 주인공 스파이크가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약 9분 여간의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한다. 우주비행선을 타고 다니는 미래 우주 시대의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주인공 캐릭터를 설명하는 오프닝 액션 시퀀스 이후에 제목과 함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시작된다. <천국의 문>은 미래 배경의 SF 장르 애니메이션이지만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1990년대로 추정되는) 뉴욕의 풍경과 칸노 요코가 <천국의 문>을 위해 만든 프로젝트 밴드 시트벨츠(Seatbelts)의 노래 ‘애스크 DNA’(Ask DNA)가 어우러져 있다. 스파이크 역에 존 조를 캐스팅한 <카우보이 비밥> 리메이크 TV시리즈가 올가을 넷플릭스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혹시 <천국의 문>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를 활용한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좀비랜드>(2009)

<좀비랜드>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친절하다. 뒤짚혀 있는 화면에 성조기가 보이고 일그러진 전자 기타 사운드로 만든 미국의 애국가 ‘더 스타-스팽글드 배너’(The Star-Spangled Banner)가 흘러나온다. 카메라가 빙그르 돌아 화면이 제대로 돌아오면 멀리 미국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좀비가 달려온다. 영화의 주인공인 콜럼버스 역의 제시 아이젠버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좀비들에게 점령당한 미국을 좀비랜드라고 명명하고 자신만의 생존 법칙을 소개한다. 몇 가지 생존 법칙 소개 이후에 메탈리카의 노래 ‘포 훔 더 벨 톨스’(For Whom The Bell Tolls)와 함께 느린 화면의 좀비 아수라장이 스태프 이름의 타이포그래피와 함께 펼쳐진다. <좀비랜드>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루벤 플레셔 감독 특유의 좀비 아포칼립스를 단 4분 여만에 완벽하게 친절히 보여준다. 참고로 <좀비랜드>의 속편 <좀비랜드: 더블탭>에서는 영화가 시작되고 컬럼비아 픽쳐스의 로고가 등장하는데 자유의 여신상을 닮은 토치 레이디(Torch Lady)에게 좀비가 달려들고 토치 레이디는 손에 들고 있던 횃불로 좀비를 내려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1)

데이빗 핀처 감독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하 <밀레니엄>)은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핀처 감독은 광고계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이는 곧 감각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재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밀레니엄>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딱 그렇다. 영국의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뮤직비디오 감독인 크리스 커닝햄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듯한 이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최근에 <토르: 라그나로크>에 삽입되면서 더 익숙해진 레드 제플린의 노래 ‘이미그랜트 송’(Immigrant Song)과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007> 시리즈의 영화를 제외하고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감독은 거의 없어 보인다. 참고로 뉴욕 맨해튼의 빌딩 숲과 타이포그래피를 결합한 <패닉룸>(2002)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도 인상적이다.


<고질라>(2014)

앞서 소개한 <천국의 문>과 <밀레니엄>에서 볼 수 있는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뮤직비디오 같은 구성을 보여줬다. <고질라>는 다르다. <고질라>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다큐멘터리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고대 벽화부터 시작해 각종 뉴스릴(Newsreel)과 푸티지(Footage) 영상이 삽입된다. 스태프들의 이름은 기밀문서의 그것처럼 나타났다가 지워진다. 이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고질라가 고대부터 존재해 왔으며, 현대에 이르러 어떻게 그 존재가 비밀에 부쳐졌는지는 보여주는 듯하다. <고질라>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사실은 과거 일본에서 태어난) 거대 괴물에게 신비로움을 부여하면서 관객을 영화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데드풀>(2016)

<데드풀>의 오프닝 크레딧은 농담으로 가득하다. 전혀 진지하지 않다. 책장이 넘어가는 마블의 로고가 나오면서 쥬시 뉴턴의 노래 ‘앤젤 오브 더 모닝’(Angel of the Mornig)이 잔잔하게 흐르는 시작하면 카메라가 자동차 안의 엉망진창이 된 상황을 보여준다. 빨갛게 달궈진 차량용 시가잭 라이터와 이마에 시가잭 라이터 자국이 있는 악당이 등장한다. 데드풀(라이언 레이놀즈)이 쏜 권총의 총알도 보이고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커피컵도 보인다. 사실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에서 빠질 수 없는 스태프 리스트다. <데프풀>에서는 이 스태프 리스트에 온갖 농담을 담았다. 그래서 <데드풀>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면 자막이 꼭 필요하다. 이를테면 제작 개허접 필름(Some Douchebag’s Film), 주연 신이 내린 또라이(Starring God’s Perfect Idiot) 이런 식으로 스태프 리스트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압권은 '제작비 지원 호구들과 각본팀 우리가 진짜 영웅들'이다. 참고로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 이후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를 보면 이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먼저 보여주는 플래쉬 포워드(Flash Forward)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상적인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 몇 편을 살펴봤다. 음악, 타이포그래피, 그래픽디자인 등이 결합된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영화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장치다. 여기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영화의 멋진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있을 것이다. <007> 시리즈가 이 분야의 전통적인 강자다. 알프레드 히치콧 감독의 <현기증>(Vertigo) 같은 고전 영화에서도 흥미로운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많다. 해당 유튜브 채널은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만 모아놓은 곳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멋진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를 소개하고 싶다면 댓글을 달아주길 바란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