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 할 것 없이 뜨거운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는 한여름을 무기력하게 버티면서 문득 <멍하고 혼돈스러운>(1993)을 떠올렸다. <비포> 시리즈, <스쿨 오브 락>, <보이후드> 등을 연출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초기작. 청춘과 여름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는 작품이지만, 온전히 무력함을 펼쳐놓는 데에 집중한 영화다. 음악을 중심으로 <멍하고 혼돈스러운> 속 기묘한 여름의 공기를 곱씹어보자.


Sweet Emotion

AEROSMITH

1975년 5월 텍사스 오스틴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청춘 영화 <멍하고 혼돈스러운>의 문을 여는 노래는 에어로스미스의 'Sweet Emotion'이다. 그해 4월에 발매된 밴드의 세 번째 앨범 <Toys in the Attic>에 수록되고, 그 다음달 싱글로도 발매된 곡이니, 영화 속 시간대로 따지자면 완전 최신곡인 셈. 느슨한 베이스 리프로 시작해 점차 박력을 더해가는 구성의 곡인데, 정작 영화가 보여주는 학생들의 일상은 지극히 단조롭기만 하다. 실제로 우더슨(매튜 맥커너히)을 비롯한 많은 캐릭터들이 내일 아침엔 에어로스미스 공연 티켓을 사러 갈 거라고 말하고, 오로지 티켓을 구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계획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 제목 '멍하고 혼돈스러운'(Dazed and Confused)를 보자마자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노래를 떠올리는 사람은 레드 제플린 음악이 영화에선 언제 쓰이나 생각할 테지만, 쓰이지 못했다. 링클레이터는 살아 있는 레드 제플린 멤버들에게 'Rock and Roll' 사용 허가를 요청했는데,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와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는 허락했지만, 보컬 로버트 플랜트가 반대해 결국 사용할 수 없었다.


School's Out

ALICE COOPER

<멍하고 혼돈스러운>의 오늘은 학기 마지막 날이다. 수업의 끝을 알리자마자 학생들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교실을 빠져나간다. 책을 박박 찢어져서 허공으로 날리고, 제 취향을 가득 담아 꾸민 사물함도 난장판을 만들어놓는다. 환희 그 자체! 방학이 반가운 건 고등학생만이 아니다.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될 중학생들이 기쁨을 발산하는 열기도 만만치 않다. 다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 학교 바깥에선 고등학교 3학년 형들이 신입생 신고식을 잔뜩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꼼수를 부리면서 선배들의 레이더를 피해다녀야 하고, 재수없게 걸리면 엉덩이가 터지도록 맞아야 한다. 이 정신 사나운 풍경을 꾸미는 건 앨리스 쿠퍼의 'School's Out'이다. "연필도 그만! 책도 그만! 선생님의 못생긴 얼굴도 이제 그만!" 외치는 노래는 앨리스 쿠퍼가 인생에서 가장 위대했던 3분이 어느 순간이었냐는 질문에 마지막 학기 직전의 3분이었다고 대답하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야구장까지 찾아와 지키고 있는 선배들한테 미치(윌리 위긴스)가 붙잡혀 엉덩이를 맞을 땐 앨리스 쿠퍼의 또 다른 곡 'No More Mr. Nice Guy'가 쓰였다.


Why Can't We Be Friends

WAR

여자들도 신입생 신고식엔 예외가 아니다. 남자가 엉덩이를 맞는다면, 여자는 땡볕에서 가혹행위를 당한다. 입에 젖병꼭지를 물리고는 주차장 한복판에 눕혀 온몸에 케첩, 머스타드, 날계란, 밀가루를 뿌리고 뒹굴게 한다. 영화는 이런 모습을 그다지 나쁘게만 여기진 않는 것 같다. <멍하고 혼돈스러운>에 대부분 1970년대 하드록이 쓰인 데에 반해, 이 대목에선 훵크 밴드 워가 1975년 발표한 'Why Can't We Be Friends'가 쓰였고, 어떤 폭력적인 뉘앙스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레게 풍의 리듬이 반복되는 가운데 노래 제목을 (40번이나) 흥겹게 반복할 뿐이다.


Hurricane

BOB DYLAN

비록 지독하게 아프긴 했지만, 미치는 엉덩이를 맞은 후에 자연스럽게 여름밤을 즐기는 형들과 합류해 난생 처음인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축구를 계속 할지 말지 고민인 축구부 핑크, 졸업한 지가 언젠데 계속 10대들과 어울려 노는 한량 우더슨과 함께 동네 10대들의 아지트인 '엠포리움'에 의기양양하게 들어설 때 거기선 밥 딜런의 'Hurricane'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서 'Hurricane'이 빵빵하게 울리고 있는 건 밥 딜런 노래들 가운데서도 특히 댄서블 하다는 점에선 분위기에 잘 맞을지는 모르나, 팩트를 좀 살펴보면 좀 더 복잡한 아이러니와 오류가 작용한다는 걸 알게 된다. 'Hurricane'은 흑인 복싱 선수 루빈 카터('허리케인'은 그의 별명이다)가 인종차별 때문에 억울하게 복역 생활을 하는 걸 비판하는 다소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Hurricane'은 1975년 11월에 발표됐기 때문에 그해 5월로 설정된 시간대와도 어긋난다.


Lord Have Mercy On My Soul

BLACK OAK ARKANSAS

신입생들이라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건 아니다.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꽤나 자신감을 얻은 미치는 엠포리움에 찾아온 친구들에게 낙제를 하는 바람에 2년 연속 신고식을 맡아 더 심한 폭행을 일삼는 오배니언(벤 애플렉)에게 복수하자고 제안한다. 잘도 도망 다니던 신입생들이 제 발로 엠포리움에 찾아왔다는 얘기를 듣자 오배니언은 바깥으로 나가고 아주 신나서 때리려고 드는데, 신입생들은 저 높은 곳에서 오배니언에게 페인트를 쏟아부어버린다. 영화에 사용된 음악들 가운데 가장 발표 시기가 이른 (1971년) 블랙 오크 아칸서스의 'Lord Have Mercy on My Soul'이 형들에게 피해 눈치만 보던 남자 애들이 복수에 성공하는 대목에 쓰여서 더 재미있는 인용. 별일 없이 지나가고 있는 한밤을 짜릿하게 만드는 일탈인 한편, 영화 내내 감돌던 권위와 폭력을 일거에 무너트려 버리는 에피소드다. 오배니언이 씩씩대면서 영화에서 빠져나간 이후로 <멍하고 혼돈스러운> 속 일탈은 조금 더 받아들이기 편해진다.


Right Place, Wrong Time

DR. JOHN

파티는 끝나지 않는다. 우더스의 제안으로 달빛 타워에서 열리는 맥주 파티로 향한다. 한참을 달려와 도착한 이 파티에서도 특별한 뭔가가 있는 건 아니다. 실내가 아닌 바깥이라는 것 정도뿐, 여기저기 흩어져 맥주와 대마초를 입에 떼지 않고 느긋하게 한밤을 통과하는 건 마찬가지다. 로큰롤과 훵크의 접목한 스타일로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한 닥터 존의 최고 히트곡 'Right Place, Wrong Time'과 함께 한가로운 시간이 슬렁슬렁 지나가고 있다. 미치는 여기저기를 배회하다가 마음이 통한 줄리를 만나고, 여자 애들은 별별 방법으로 맥주를 마시고 있고, 핑크는 친구와 함께 축구를 계속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 노래 제목은 '알맞은 장소, 잘못된 시간'이지만, 영화 속 10대들이 보내는 시간엔 옳고그름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다. 즐거움을 좇는 젊은이들의 여름밤만이 있을 뿐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멍하고 혼돈스러운>이 30년 넘게 청춘영화의 바이블로 손꼽히는 것도 바로 그걸 가능케 했기 때문일 것이다.


Tuesday's Gone

LYNYRD SKYNYRD

원래 계획했던 하우스 파티가 어그러져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면서 보낸 여름밤도 서서히 지고 있다. 누구 하나 시계를 보거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하진 않지만,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맥주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걸로 단번에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드러낸다. 레너드 스키너드의 'Tuesday's Gone'은 미적지근하게 지나간 밤에 보내는 작별인사로서 딱이다. 프로듀서 알 쿠퍼의 멜로트론 연주가 후렴부에 보태져 이별하는 순간의 아련함이 한껏 짙어지기 때문일 터. 레너드 스키너드의 데뷔 앨범의 두 번째 트랙인 'Tuesday's Gone'은 메탈리카(Metallica)가 1998년 발표한 라이브 앨범을 통해 커버 되면서 오랜 생명력을 얻었다.


Slow Ride

FOGHAT

언덕 위에서 줄리와 키스를 하며 아침을 맞이한 미치는 집에 돌아와 누나 말대로 깨어 있던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는 침대에 누워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포거트의 'Slow Ride'는 비단 미치만의 것이 아니라, 화면을 바꾸어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고 어디론가 웃으면서 달리고 있는 우더슨, 핑크, 슬레이터의 아침을 이어놓는다. 밤을 지나 아침이 왔지만 여전히 아무런 목적도 없이 저 앞으로 향하는 자유분방한 모습과도 꽤나 잘 어울린다. 이정표도 없이 그저 앞만 보이는 저 길을 달려가고 있는 엔딩은 정처없음의 막막함보다는 예정된 것이 없는 상황에 대한 설렘이 먼저 닿는다. 'Slow Ride'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점차 속도와 에너지를 높여가는 음악이 주는 효과라 할 만하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