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영화들의 고군분투가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고 있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블랙 위도우>, <모가디슈>, <싱크홀>, <인질> 등 대형 영화가 연이어 개봉해 관객들을 모으면서 또 다른 곳에선 관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안겨주는 독립·예술 영화들이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극장가의 단단한 토대를 만들었다. 2021년, 어떤 영화들이 적은 스크린으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주목받았을까. 200개 이하 스크린으로 1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가성비 영화 10편을 소개한다.
피닉스 50개 상영관 / 10,939명
최근 한국 극장가에서 갑자기 재발굴 중인 감독이 있다. 2000년에 데뷔작을 포함해 9편의 장편 영화를 공개한 독일의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이다. 우리나라에선 2013년 <바바라> 이후 7년 후인 2020년에 <트랜짓>과 <운디네>가 개봉해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다. 2021년 7월 22일 개봉한 <피닉스>도 2014년 영화지만 이전 작품들의 개봉으로 펫졸드의 명성이 조금씩 높아진 결과, 그의 작품 중 최초로 1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것도 고작 50개 상영관에서 거둔 성과였다. 코로나19 시대에 이르러 자주 사용되는 '영화는 죽지 않는다', '극장은 죽지 않는다'는 구호가 <피닉스>에게 딱 어울리는 듯하다.
레 미제라블 97개 상영관 / 10,578명
'원 데이 모어~'를 외치는 그 레 미제라블이 아니다. 그 작품처럼 프랑스 사회 속 소외계층의 비참한 면모를 담은 영화긴 하다. 래드 리 감독의 <레 미제라블>은 이민자들과 경찰이 대립각을 세운 몽페르메유를 그린다. 2019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후보 등 2019년 영화 중 화려한 이력을 가졌지만, 지난해 극장가가 어려웠기 때문인지 2021년 4월 15일에 개봉했다. 몇몇 배우를 제외하면 길거리 캐스팅으로 비연기자들을 섭외해 영화의 사실성을 다졌고, 자신의 고향을 배경으로 삼은 감독 스스로의 경험을 녹여 지역 안에 잠든 긴장감을 또렷하게 전달했다.
스파이의 아내 120개 상영관 / 11,151명
2020년 부산 영화제 최고 화제작 <스파이의 아내>, 3월 25일 개봉하며 기다리는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서스펜스를 활용한 스릴러이자 둘도 없는 멜로드라마의 균형을 기막히게 잡아 기요시 감독의 귀환을 환호케 했다. 드라마계에서 종횡무진 활약 중인 타카하시 잇세이의 존재감과 유독 미모에만 방점이 찍히는 아오이 유우의 연기력 또한 영화의 무게감을 더한다. 극 중 필름과 영화라는 소재가 주요하게 사용돼 각자가 생각하는 '영화'의 관념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작품.
사랑하고 사랑받고 차고 차이고 155개 상영관 / 16,139명
답답한 현실에 조금이나마 청량감을 얻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차고 차이고>라는 길고 복잡한 이 일본 멜로 영화는 친구이자 서로에게 호감을 품은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다. 한국 관객들도 사랑한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두 주역 하마베 미나미와 키타무라 타쿠미가 재회했고, 요즘 가장 핫한 청춘 배우 아카소 에이지와 후쿠모토 리코가 합류했다. 네 주인공의 순하디순한 성격이 갑갑할 수도 있지만, 막장 드라마에 지쳤다면 발암 캐릭터, 악역 캐릭터 없는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을 응원하고 싶어질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 159개 상영관 12,447명
한국 사회에서 어느새 사라진 말, '핵가족'. 그리고 그 자리를 '1인 가구'가 대신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1인 가구 생활이 편한 진아(공승연)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혼자이기에 서로를 보듬어야 하지만, 혼자라서 서로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홀로 사는 사람들의 미묘한 거리감을 캐릭터들의 관계로, 화두가 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제점을 스토리로 승화시켜 지금 이 시기를 영화에 녹였다. 1인 가구뿐만 아니라 혼자라는 외로움을 아우르는 이야기로 현대 사회의 고독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로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준다는 평을 받았다.
빛과 철 161개 상영관 / 10,079명
한 건의 교통사고로 전혀 다른 삶을 맞이한 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빛과 철>은 제목처럼 묵직하다. 겹겹이 쌓인 사고의 진상을 토대로 각 인물들의 죄의식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스릴러이자 심리 드라마를 완성시켰다. 2007년 데뷔 이래 첫 장편을 꺼낸 배종대 감독의 연출력이 인상적이다. 염혜란, 김시은, 박지후 등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이 영화를 가득 채워 어느 배우와 캐릭터에 몰입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포인트. 2021년 2월 18일 개봉했는데, 하필 개봉 전후로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더욱 어려운 싸움을 강행해야 했던 안타까운 작품.
페어웰 162개 상영관 / 12,626명
룰루 왕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 <페어웰>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를 위해 가족들이 벌이는 작은 소동을 그렸다. 미국 이민자인 빌리(아콰피나)와 여전히 중국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을 대비해 동양과 서양의 정서적 차이를 이야기 곳곳에 활용했고, 그 결과 슬프지만 가슴 따듯한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굳이 따지자면 <페어웰>은 해외 대비 국내에선 크게 화제가 되지 못해 다소 적은 스크린을 배정받았는데, 코로나19로 반중 정서가 강해졌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정말 독특하고, 유니크한 작품을 원한다면 결코 놓쳐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동양도 서양도 아닌 어딘가에 위치한 독특한 영화다.
북스마트 163개 상영관 / 16,380명
일탈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코미디 영화는 대체로 재밌다. 거기다 그들이 '범생이'라면? 재미없을 수가 있을까. <북스마트>는 졸업을 앞둔 모범생 절친들이 졸업파티에서 신나게 놀자고 의기투합하는 코미디 영화. 비니 펠드스타인과 케이틀린 디버는 절친 연기를 위해 실제로 2개월가량 동거했고, 그 결과 안 그래도 다재다능한 매력을 뽐내는 두 배우의 티키타카가 영화 전체를 장악한다. 주인공이 고등학생이라지만 은근히 수위 높은 농담들을 쏟아내 한국에선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으나 북미 현지에선 '시대에 길이 남을 청춘물'이란 극찬까지 받았다.
노매드랜드 181개 상영관 / 84,659명
2021년 미국 아카데미를 요약하자면 (윤여정과) <노매드랜드>였다. <노매드랜드>는 작품상, 여우주연상, 감독상까지 주요 부문 3관왕에 성공하며 현재 미국 사회에 또 다른 충격을 안겼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급증한 홈리스의 삶을 관찰한 동명의 논픽션을 클로이 자오 감독은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이란 가상의 인물에 투영시켰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 대부분은 실제 홈리스인데, 이들 속에 녹아든 프란시스 맥도맨드의 깊이 있는 연기가 화룡점정이다. 미국 대지의 풍경을 포착한 영상미는 극장에서 봐야 진국인데, 개봉 스크린 수는 적었던 편. 그래도 작품상 수상작으로 화제를 모아 8만 관객을 돌파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198개 상영관 / 37,477명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도이 노부히로 감독과 <마더>의 사카모토 유지 각본가가 합심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운명처럼 만나 사랑하다가 현실에 부딪힌 한 커플의 이야기를 그린다. 스다 마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가 연애의 달달함부터 위태로운 갈등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며 진한 케미스트리를 발산한다. 사카모토 유지의 감성적인 대사와 디테일한 설정을 도이 노부히로 감독이 감각적인 이미지로 승화시켜 누구라도 사랑의 달콤함과 아릿함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일본 현지에서도 2021년 개봉작 중 흥행 순위에 들었는데, 국내에서도 많은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