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제이크 질렌할이 <더 길티>로 돌아온 가운데 그의 또 다른 신작, 마이클 베이 감독이 연출한 액션 스릴러 <앰뷸런스>의 예고편이 공개됐다. 며칠 전에는 아프간전을 다룬 가이 리치 감독 영화 <인터프리터>에 그가 합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밖에도 <대부> 시리즈의 제작 비하인드를 담은 <프란시스 앤 더 갓파더>, <익스트랙션> 감독 샘 하그레이브의 히어로 영화 <프로핏> 등 차기작이 일곱 편이다.

10월 내내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TV 쇼 시청 순위 1위를 달릴 때, 영화 시청 순위 1위를 차지한 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더 길티>였다. <더 길티>는 뜻밖의 사고로 911 전화 교환원으로 좌천된 형사 조 베일러(제이크 질렌할)가, 위험에 처한 한 여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사건을 추적하며 조가 마주하는 진실은, 어쩐지 그가 저지른 과거의 과오를 떠올리게 해 그를 괴롭힌다. 영화는 911 콜센터라는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오직 조의 목소리 그리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형식은,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책을 읽는듯한 체험을 하게 한다. 심각성, 긴박성, 폭력성의 미세한 정도 차이는 그것을 상상하는 우리의 몫인 것인데. 직관적인 비주얼을 제했음에도 관객이 몰입을 이어갈 수 있던 이유는, 믿음직한 화자 제이크 질렌할 덕이다. <더 길티>는 러닝타임을 홀로 온전히 소화하는 질렌할의 원맨쇼나 다름없으며, 여기서도 그의 역할은 (또)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인물이었다. 심리 스릴러는 질렌할에게 아주 익숙한 장르다. 그 진폭은 조금씩 달랐지만, 섬세하거나 폭발적인 감정선을 겪는 인물을 그는 종종 연기해왔다. 60편이 넘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미묘한 감정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 일곱 편을 골랐다. 흡인력이 짙은 영화 속 장면과 함께 작품을 돌아보자.


프리즈너스

로키 형사 役 │ 감독 드니 빌뇌브 │ 출연 휴 잭맨, 제이크 질렌할, 폴 다노, 비올라 데이비스2013153분

<프리즈너스>는 딸을 유괴한 납치범을 쫓는 아버지 캘러 도버(휴 잭맨)와 진범을 찾아 헤매는 형사 로키(제이크 질렌할)의 이야기다. 드니 빌뇌브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같은 사건에서 이성을 잃어가는 두 남자에 주목했다. 과거 로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에 자세히 드러나진 않지만, 미궁을 헤멜수록 슬금슬금 밀려드는 남모를 죄책감은 그를 더 괴롭게 한다. 여기에 무력감, 좌절감까지 뒤섞인 분노에 그는 결국 압도당한다. 시야에 들어온 모든 걸 소리 없이 깨부수다가 새 단서를 발견하는 아래 장면은, 캘러가 망치를 들고 의미 없이 알렉스(폴 다노)를 겁박하는 장면과 함께 <프리즈너스>에서 배우의 열연이 특히 돋보인 순간으로 꼽힌다.


나이트 크롤러

루이스 블룸 役 │ 감독 댄 길로이 │ 출연 제이크 질렌할, 르네 루소, 빌 팩스톤, 리즈 아메드2014117분

밤거리를 서성이며 각종 사건사고의 현장을 촬영해 TV 방송사에 파는 사람들, 나이트 크롤러. 수척한 얼굴의 루 블룸(제이크 질렌할)은 LA의 나이트 크롤러다. 그는 소시오패스다. 남의 불행이 그의 돈줄이고, 자극적인 이미지의 값이 더 많이 나가는 세상에서, 종이 한 장 차이인 관찰자와 범죄자의 사이를 가볍게 넘어버린다. 실제로 벌어진 비극이 아닌 픽션의 한 장면을 다루듯 자의적으로 현장에 개입한다. 스스로 연출자가 되어 현장을 더 드라마틱하게 조작한다. 자본주의와 왜곡된 저널리즘이 낳은 괴물, 루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꼭 피가 낭자 하는 호러가 아니더라도 영화가 충분히 섬뜩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목줄을 담보로 니나(르네 루소)에게 연인 관계가 될 것을 미소지으며 협박하는 루의 비인간성은 질렌할의 매서운 연기 덕분에 더 소름 끼친다.


조디악

로버트 그레이스미스 役 │ 감독 데이빗 핀처 │ 출연 제이크 질렌할, 마크 러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안소니 에드워즈2007157분

<프리즈너스>의 로키 형사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조디악>의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도 어딘가에 몰두해 있다. <조디악>은 실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한 연쇄살인범 조디악 킬러 사건을 담았다. 차분하게 파고드는 사람이 더 지독하던가. 데이빗 핀처는 크로니클 신문사의 만평가 로버트를 통해 집착을 탐구했다. 몇 해가 지나도록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사건 특집 기사 담당 기자, 담당 형사가 지쳐 떨어져 나가는 동안에도 로버트는 홀로 범인을 추적했다. 그 집착은 과해서, 그가 인식할 새도 없이 그를 범인일지도 모르는 이의 소굴에 데려다 놓았다. 긴장을 고조하는 배경 음악 하나 없이 조용하면서도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이 지하실 장면은, 제이크 질렌할의 텅 빈 표정에 두려움이 서리는 것으로 완성됐다.


브로크백 마운틴

잭 트위스트 役 │ 감독 이안 │ 출연 제이크 질렌할, 히스 레저, 미셸 윌리엄스, 앤 해서웨이2005134분

1963년 8월 여름, 양떼 방목으로 한철 돈벌이하려 깊은 산속 브로크백 마운틴에 오른 에니스 델마(히스 레저)와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 둘은 평생 잊지 못할 여름을 함께 보낸다. 적극적인 잭은 산에서 내려와서도 같이 살기를 바라지만 에니스에겐 그럴 용기가 없었다. 어쩌다 한번 낚시를 핑계로 밀회를 즐기는 것으로 20년을 보낸 둘. 드문 만남으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차라리 그만 만나는 법을 좀 알았으면 좋겠어”(I wish I knew how to quit you)라는 잭의 말로 이어지고 마는 호숫가에서의 둘의 다툼은, 아직까지도 보는 이들의 목이 메게 한다. 뒤따라 붙는 20년 전 플래시백, 그때나 지금이나 산속에서만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둘이 더 애처롭다.


녹터널 애니멀스

에드워드 셰필드, 토니 헤이스팅스 役 │ 감독 톰 포드 │ 출연 에이미 아담스, 제이크 질렌할, 마이클 섀넌, 애런 존슨2016116분

호화롭지만 공허한 삶을 살고 있는 아트 딜러 수잔 모로우(에이미 아담스)에게,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제목의 소설 원고가 도착한다. 작가인 전남편 에드워드 셰필드(제이크 질렌할)가 써서 보낸 책이다. 수잔은 에드워드를 사랑했지만, 소설가를 꿈꾸는 그의 불투명한 미래에 회의를 느껴 오래전 그를 떠났다. 에드워드의 얼굴을 하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토니 헤이스팅스는 강도를 만나 한순간 아내와 딸을 잃었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에드워드가 결혼 생활에서 겪었다고 생각하는 폭력의 은유고. 상처를 준 수잔이 책을 읽고 이입하게 함으로써 고통을 고스란히 옮기는 것은 그만의 복수다. 끔찍한 사건으로 삶이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파탄 난 남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 더해, 아래 장면에서 에드워드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자네는 좋은 사람이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까지 한다. 인물의 사고방식에 한껏 파묻혀 한쪽 눈꺼풀을 바들바들 떨던 질렌할 덕에, 자기 연민에 속절없이 빠진 그가 더 불쌍해 보인다.


데몰리션

데이비스 役 │ 감독 장 마크 발레 │ 출연 제이크 질렌할, 나오미 왓츠, 크리스 쿠퍼, 유다 르위스2015100분

아내가 죽었다. 그런데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는 슬프지가 않다. 죽기 전 아내는 냉장고를 고쳐달라고 몇 번을 사정했다. 공허한 데이비스는 문득 그게 생각나 냉장고를 분해하려 들었다가 결국에는 부숴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파괴 여정의 끝에서 그는 멀쩡한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린다. 이것도 일종의 슬픔의 표현 방법이었을까, 상실감을 감당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자신을 향한 분노 때문일까. 예리한 심리 묘사에 장기를 보여왔던 장 마크 발레는, <데몰리션>으로 실제 느끼는 감정과 별개로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이 관습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한편, 파괴와 재건을 통한 삶의 의지 회복에 대해 말했다. 평온한 표정으로 주변을 산산조각 내는 장면들도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데몰리션>을 보고 나서 잊히지 않는 장면은 데이비스가 평범한 뉴욕 거리를 무대 삼아 춤추는 장면이다. 그가 겪은 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춤사위는 더 격해질수록, 보는 이를 더 불안하게 한다.


에너미

아담 벨, 앤소니 役 │ 감독 드니 빌뇌브 │ 출연 제이크 질렌할, 사라 가돈, 멜라니 로랑, 이사벨라 로셀리니201390분

그다지 단정치 못한 행색과 어정쩡한 걸음걸이를 한 아담 벨(제이크 질렌할)은 대학 역사학과 부교수다. 신경증에 걸린 듯한 우울감이 그를 감싸고 있고, 그에게는 매력적인 여자친구가 있다. 아담과 똑같이 생긴 앤서니(제이크 질렌할)는 단역과 조연을 전전하는 배우다. 그에게는 호기로운 기세가 있고, 임신한 아내가 있다. 어느 날 둘이 만나 서로의 삶에 개입하면 일상은 무너져 내린다. 욕망과, 헌신의 의무 사이를 오가는 두 자아의 줄다리기 <에너미>는 한 남자의 잠재의식에 관한 이야기다. 드니 빌뇌브 영화치고 90분으로 러닝타임이 짧은 편인데. 함의가 많아 난해하다는 평이 있었지만, 질렌할의 1인 2역 연기는 과연 인상적이다. 아담과 앤서니가 마주하는 장면은 언제나 긴장감이 넘쳐 서스펜스를 더하는데. 자연광 아래서 아담이 따뜻한 낯빛을 하고 자상하게 헬렌(사라 가돈)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은, 내내 무기력한 표정을 했던 다른 장면의 아담과 대비되는 한편 남자의 부정함을 더 도드라지게 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