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린 내가 찾지 못한 ‘살아야 할 이유’를, 살다 보면 눈앞의 상대가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뜻 손을 뻗는 게 아닐까?

“아, 왜 그래요, 진짜! 가까이 오면 아줌마까지 확 밀어버릴 거야! 오지 말라니까!” 3층 건물 옥상 난간 앞에서,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난 것 같은 어린 게이머(강다현)가 소리친다. 게이머는 지금 세상을 떠나려는 중이다. 어릴 적 부모님에게 학대당한 게이머는 우연히 당첨된 스포츠토토 당첨금 100만 원을 고스란히 엄마한테 줬다가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도박 중독에 빠져버렸다. 돈을 주면 엄마가 기뻐하는구나. 더 많은 돈을 따야겠다. 하지만 도박중독은 게이머에게 거액의 빚만 남겼고, 그 충격으로 게이머의 누나는 유산을 했다. 게이머는 살 이유를 잃었다.

그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게이머는 막걸리 한 통과 농약 한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죽기 전에 서버에 남아있던 아이템이나 다 쓰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평소 즐겨하던 온라인 게임에 접속했다. 게임이 끝난 뒤 모두가 접속을 종료한 줄 알고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 ‘이젠 정말 죽을 수 있겠다’는 말을 들은 길드원 두 명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게이머는 헤드셋에 대고 제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차피 떠나는 길, 누구 하나 붙잡고 속 이야기라도 시원하게 하고 싶었던 걸까.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사랑받고 되게 몸값이 높은데, 나는 그냥 날 때부터 싸구려에 불량품인 거예요. 망할 팔자 갖고 태어나서 망해가는 게 인생 전부고. 내가 숨 쉬면서 똥 싸고 쓰레기 버리는 것보다, 없어지는 게 좋은 것 같은 거예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멍청한 에미 애비가 날 낳아버려서….”

게이머가 짐작하지 못했던 건, 그 두 명이 집요하게 자신의 게임 아이디를 추적해 자신이 사는 집 주소까지 알아내고, 개중 한 명은 자신의 자살을 말리겠다며 한달음에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 죽는 걸 말리겠다고 온 사람의 상태가 어째 자신보다 더 안 좋은 것 같다. 떡진 머리에 목 늘어난 티셔츠, 현란한 무늬의 수면바지 차림으로 달려온 아이디 ‘애플보이캣’ 구경이(이영애)는, 실제로도 인생이 게이머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5년 전, 남편(최영준)이 선생으로 몸담고 있던 학교의 여학생이 죽었다. 사람들은 남편과 여학생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것 같다고, 그래서 남편이 여학생을 죽인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무엇보다 형사였던 경이부터 남편을 제대로 믿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불신 속에 고립되었던 남편이 자살하자, 자신의 의심이 남편을 죽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달리던 경이는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가두기로 했다. 좁고 더러운 집 안에, 명료한 고통의 해상도를 낮춰주는 알코올중독 상태 안에, 현실을 잊게 해주는 온라인 게임 안에.

자신도 왜 꾸역꾸역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경이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하나만 대보라”는 게이머의 말에 “네가 없으면 정찰은 누가 하느냐”는 한심한 대답을 던진다. 그러다가 설득이 먹히지 않자, 경이는 게이머가 서 있는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말한다.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살 이유라는 게, 없네. 진짜로 그렇잖아. 네 말이 맞아.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니? 내가 있잖니, 경찰이랍시고 남편까지 의심하다가 죽게 만든 사람이야. 더 웃긴 건 아직도 남편이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 궁금해. 죽을 거면 알려주고 죽지. 네가 봐도 나, 쓰레기지? 그치? 나 같은 건 그냥 없어져도 되겠지?”

그리고는, 경이는 낙엽 떨어지듯 그대로 뒤로 누워 너풀거리며 3층 아래 세워져 있던 쓰레기차 안으로 떨어진다.

물론 경이도 정말 죽을 생각은 아니었을 거다. 난간에 걸터앉기 전에 힐끔 아래를 내려봤으니까. 쓰레기차가 아래 있다는 것 정도는 볼 수 있었겠지.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니, 쓰레기더미 위에 떨어지면 죽진 않을 거란 사실도 계산할 수 있었을 테다. 경이가 낙하하던 순간 게이머가 지어 보인 표정을 보면, 최소한 당분간은 경이에게 받은 충격 때문이라도 어리석은 행동은 안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된 거지.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쓰레기 같지 않냐고 물으며 쓰레기통 속으로 낙하한 경이의 마음은 조금쯤 진심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쓰레기더미 위에 안착한 경이는, 그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쓰레기매립장까지 실려 간다. 모든 걸 다 포기한 사람, 정말 자신을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JTBC 드라마 <구경이> 2화에 나온 이 장면이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 소개란에 문제의 게이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이가 쫓는 핵심 미스터리와 게이머의 자살소동 사이에 이렇다 할 연결고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자포자기한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은 유독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 인생은 당장 떨어져 죽어도 아쉬울 게 없는 쓰레기라 생각하는 경이는, 그게 타인의 목숨이 되자 아무렇게나 외투를 걸치고는 죽음을 말리겠다며 밤의 도시를 헤맨다. 방금 전까지 제 인생은 싸구려니까 그냥 뛰어내릴 거라고 엄포를 놓던 게이머는, 경이가 제 눈앞에서 추락하자 경악과 걱정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경이를 애타게 부른다.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눈앞의 생판 타인은 무사히 살리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광경.

경이 말이 맞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꼭 살아야만 하는 이유 같은 건 없다. 사람은 이유나 당위 때문에 사는 게 아니니까. 그냥 살아만 있으면 일단은 살아지니까. 그래서 우리는 종종 제 삶에 더 없는 염증을 느끼는데, 그러면서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죽겠다며 휘청거릴 때에는 마치 상대가 내 생명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강하게 붙잡아 두고 싶어한다. 자기보호본능과는 또 다른 이 마음은 대체 뭘까. 어쩌면 우린 내가 찾지 못한 ‘살아야 할 이유’를, 살다 보면 눈앞의 상대가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뜻 손을 뻗는 게 아닐까? 그래서 경이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저주하면서도 다른 이들이 부디 살아있기를 바라며 고군분투하는 게 아닐까?

난 경이가 자신을 좀먹는 과거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사람들을 자신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기 위해 걸친 온갖 괴팍한 습성으로부터, 마취제처럼 복용하는 알코올과 게임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오랜 무기력을 벗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설령 이 드라마의 끝이 그런 결말이 아니더라도 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제처럼 지리멸렬한 오늘의 반복이라 해도, 굳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괴롭다 해도, 서로가 서로의 죽음을 말려주면서 그 힘으로 또 하루를 살아보는 결말이라 해도 나는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내 힘이 아니라, 옥상 끝 난간에 선 서로를 붙잡아주는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 테니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