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국제영화제, 칸국제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국제영화제를 섭렵하며 무서운 기세로 영화계 중심에 들어선 감독이 있다. 봉준호 감독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대담을 펼친 일본의 차세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다. <아사코>를 통해 국내에 인지도를 높이기 시작한 하마구치 류스케가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감독이라 생각한 이들이 많겠지만, 알고 보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첫 장편을 공개한 2008년부터 작품을 통해 저만의 색을 뚜렷이 내보여왔다.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작품 <해피 아워>와 신작 <드라이브 마이 카>로 국내 극장가를 찾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참여한 최근 작품 다섯 편을 소개한다.


해피 아워 ハッピーアワー, 2015

제68회 로카르노영화제 국제경쟁 특별언급, 여우주연상 수상

올해 12월 9일 국내 개봉한 <해피 아워>는 러닝타임만 328분, 무려 5시간 28분의 상영 시간을 자랑하는 영화다. 각기 다른 직업과 성격을 가진 30대 후반 네 명의 친구들이 일상 속에 마주한 이혼과 외도, 알지 못했던 상처와 진실을 마주하며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고 진짜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는다. 하루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시간의 러닝타임을 지닌 영화지만, 영화를 본 모두가 긴 러닝타임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야기하는 작품. 네 친구들과 함께 인생을 살다 나온 듯한 경험을 전하는 <해피 아워>는 그해 다양한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화의 주연을 맡은 네 배우가 즉흥연기 워크숍에 참여한 비전문 배우들이었다는 것. <해피 아워>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한 이들은 제68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공동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2018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노미네이트

첫눈에 반한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가 갑자기 떠나고, 그에 대한 상실감으로 젖어있다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사랑에 빠진 아사코. 결국 그는 두 남자 중 한 명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아사코>를 전 연인과 현 연인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아사코를 조명한 로맨스 영화로 보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들의 관계에서 비롯된 미묘한 뉘앙스를 캐치한 이들에게 <아사코>는 단순 멜로를 넘어선 영화가 된다. <아사코>는 꿈과 현실을 상징하는 두 인물, 바쿠와 료헤이 사이를 오가는 아사코의 선택을 담은 영화다. 서로로 인해 지진 같은 감정을 공유한 세 사람 사이에서 동일본대지진은 주요 소재로 기능한다. 평단의 호평을 받고 각종 영화제에 초청된 <아사코>는 봉준호 감독이 애정을 밝힌 작품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은 2010년대 베스트 영화 10편 중 한 편으로 <아사코>를 꼽았다.


스파이의 아내 スパイの妻, 2020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노미네이트

아시아에 전운이 감돌던 1940년.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와 행복하게 살고 있던 무역상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는 사업차 만주국에 갔다가 그곳에서 일본군의 생체 실험을 목격하고 이 만행을 세상에 알리겠다 결심한다. 사토코는 남편의 비밀이 그들의 가정을 위협할 것이라 걱정하지만, 결국 남편의 대의에 동참해 '스파이의 아내'가 된다. <스파이의 아내>는 2020년 6월 일본 NHK에서 방영된 2부작 드라마를 영화로 재편집한 작품이다. 끔찍한 역사를 써 내려가는 국가에 충성하는 이와 그를 등지고 스파이가 된 자. 두 영역 사이에서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극에 서스펜스를 불어넣은 아오이 유우의 열연이 빛난 작품이다. 배우가 완벽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도록 구성된 촘촘한 각본이 인상 깊은 작품이기도 하다. <스파이의 아내>의 연출을 맡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스승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스파이의 아내>의 각본가로 합류해 재능을 뽐냈다. <스파이의 아내>는 베니스국제영화제 등 다양한 자리에 초청돼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드라이브 마이 카 ドライブ・マイ・カー, 2021

제74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

제79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하마구치 류스케는 꾸준히 전 세계 영화계에 제 이름을 알려왔다. 칸국제영화제와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동시에 사로잡은 올해는 그 커리어의 정점에 선 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나오는 동명의 단편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다.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레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돼 작품의 연출을 하게 된 가후쿠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를 만난다. 조용한 차 안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가던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알아보고 점점 마음을 열어간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 사람이 자신의 아픔을 내보이며 서로를 위로해가는 이야기 역시 만인의 마음을 두드렸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올해 칸국제영화제의 각본상을 수상했고, 골든글로브 시상식의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됐다. 또다시 봉준호 감독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거장의 영역을 증명했다”는 평을 남겼다.


우연과 상상 偶然と想像, 2021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 수상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소개된 영화 세 편 중 두 편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연출작이라는 점이 인상 깊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 이어 그의 또 다른 신작은 세 편의 단편 영화를 엮어 만든 <우연과 상상>이다. 차례로 친구가 관심 있어 하는 남자가 2년 전 헤어진 자신의 전 남자친구임을 알게 되는 여성의 이야기, 교수에게 낙제를 받은 한 남학생이 복수심을 품고 한 여성에게 도움을 처하는 이야기, 한 여성이 고등학생 때 짝사랑했던 여성 동창과 20년 만에 마주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각각 다른 이야기지만, 한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세 편의 단편은 통일감을 형성한다. 거대한 사건을 마주한 인물의 심리에 우연이라는 방식을 더해 더 분명한 이야기를 건네왔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고유의 스타일이 빛나는 작품. <우연과 상상>의 국내 개봉일은 아직 미정이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