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총선과 하반기 탄핵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1년 내내 강타했던 2016년 한국이었지만, 영화 흥행엔 그다지 타격을 미치지 못했다. 하계 올림픽마저 열린 여름 시즌엔 좀비물이란 한계에도 <부산행>은 천만을 돌파했고, 박찬욱과 김지운, 허진호 등 베테랑들의 컴백작들도 <아가씨> 400만, <밀정> 750만, <덕혜옹주> 550만이란 나름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여기에 이재한, 나홍진, 김성훈 감독들의 새 영화들도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검사외전>과 <럭키>, <귀향>은 박스오피스에서 깜짝 히트했다.
하지만 사회현상에서 나타나듯 영화판에서도 흥행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중간급 영화들의 몰락은 심각했다.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긴 한국영화는 15편도 채 안됐다.
영화음악의 상황도 나아지진 않았다. 앞선 흥행작들 중에서 사운드트랙이 발표된 건 <아가씨>와 <터널>, <럭키>와 <검사외전> 정도고, 그나마도 이들은 꾸준히 사운드트랙 공개에 힘을 쏟은 작곡가들이기에 그럭저럭 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부산행>과 <밀정>, <곡성>과 <인천상륙작전> 등 흥행작들은 물론,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고산자: 대동여지도>, <국가대표2>, <4등> 등의 음악을 따로 듣기란 아예 불가능했다. 2016년 극장에 걸린 한국영화는 대략 280편 남짓. 그중 디지털 음원과 CD로 발매된 사운드트랙은 어림잡아 40여 편 정도에 그친다. 올 한해 국내에서 제작된 총 편수의 1/7수준의 영화음악만 접할 수 있던 셈이다.
안타깝지만 일단 이들을 대상으로 5편을 추려 ‘2016년 한국 사운드트랙 베스트5’를 뽑아보았다. 사운드트랙이 나오지 않은 영화들은 과감히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 편이 이 리스트에 대한 형평성과 객관화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음악 베스트가 아닌, 사운드트랙 베스트다. 따라 호평을 받고 시상식 후보에도 올랐던 여러 작품들, 모그의 <밀정>이나 장영규&달파란의 <곡성>, 이동준의 <인천상륙작전>, 장영규&이병훈의 <부산행> 등은 사운드트랙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이 포스트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밝혀둔다. 개인적으로도 아쉽게 생각한다. 리스트는 무순이다.
1. 아가씨
by 조영욱, 홍대성, 윤소라, 조혜원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할리우드 진출작인 <스토커> 이후 3년 만의 차기작이자 <박쥐> 이후 7년 만에 한국에서 선보이는 작품으로,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속고 또 속이는 배신과 사랑의 드라마를 일제 강점기로 바꿔 박찬욱 특유의 탐미적이고 관념적인 비주얼과 미장센을 버무려 독특한 인장을 남긴다. 여기에 우아함과 애잔함 그리고 연대감의 정서를 부여해주는 건 고급스러우면서도 전위적인 스코어 덕분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오랫동안 음악적 파트너로 동고동락한 조영욱 음악감독의 전체적인 조율 아래 홍대성, 윤소라, 조혜원 3명의 작곡가들이 만들어낸 인상적인 선율은 <아가씨>의 풍취에서 쉬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사운드트랙은 총 38트랙에 걸쳐 1~2분에 해당하는 짧고 간결한 큐들로 이뤄져 있는데, 반복되고 확장되어가는 영화의 구조적인 특성상 요소요소에 적절히 배치되며 통일된 리듬과 고유의 탄력을 부여한다. 서정적이고 멜랑꼴리한 선율은 덤. 4중주 스트링과 피아노, 하프, 오보에와 클라리넷, 플루트와 바순이 만들어내는 클래시컬한 앙상블은 아름답고 섬세하며, 때론 파워풀하고 격정적으로 휘몰아친다. 서늘하고 미묘한 결을 잘 살려 네 인물 간의 관계와 심리, 그리고 그 이면의 트릭과 역전성을 잘 포착해낸 솜씨가 기가 막히다. 음반 출시 시 히데코와 숙희, 두 가지 컨셉으로 발매돼 덕심을 자극시켰으며, 안에는 악보와 함께 캐릭터들의 스틸 이미지 컷을 고급스럽게 담아내 순식간에 절판되었다.
2. 동주
by 모그, 이은주
<사도>를 마친 이준익 감독은 쉴 틈도 없이 차기작으로 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동주>를 준비한다. 저예산이란 제약에,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흑백이란 포맷이지만, 신연식 감독이 각본을 맡은 영화는 윤동주와 송몽규 간의 우정과 대립을 통해 이름도, 언어도, 미래도 허락되지 않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온 청춘의 아픔과 좌절을 정직하게 그리고 있다. 그 울림을 더욱 짙고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건 모그의 단출하지만 담백한 기타를 통해서다. 자신의 주특기인 기타를 앞세워 이 답답하고 가슴 아픈 모노톤의 시대극에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남긴다. 공허한 듯 스산하게 다가오는 기타의 한음 한음이 품고 있는 감성은 일제강점기 하의 억압과 울분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이 인상적인 잔향은 비단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 소리만이 아니다. 주로 솔로 위주로 편성되어 있지만 중간중간 피아노와 클라리넷, 플루트 그리고 현악단, 앰비언트 사운드가 어우러져 그 시대를 살아온 두 젊은이의 무기력하면서도 끓어오르는 혈기의 이중적인 고뇌와 격통을 무겁게 담아내고 있다. 마치 구스타보 산타올라야의 스코어가 떠오르듯 인물들의 심리와 공명하고, 서사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소리들은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유사한 시기, 비슷한 소재를 다룬 <동주>와 <밀정>의 음악을 모두 모그가 담당했음에도 그 스타일과 접근법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단 점에 새삼 놀랐다. 비어있기에 더 큰 울림과 감동을 자아내는 스코어는 윤동주의 곧은 절개와 아름다운 싯구가 만나 그 존재감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3. 아수라
by 이재진
오랜 침묵 뒤에 발표한 <감기>의 성공으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김성수 감독의 다음 행보는 바로 페르소나 정우성과의 해후였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만남인 <아수라>는 현재 난다 긴다 하는 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들을 불러모아 타르처럼 어둡고 끈적끈적한 범죄도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데뷔 때부터 남다른 도시 감각 넘치는 연출력을 선보였던 감독이기에 이번 영화에서도 그 공간감에 찬탄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데, 이모개 촬영감독과 장근영 미술감독의 뛰어난 비주얼 덕도 크지만 이재진 음악감독이 들려주는 서늘한 청각적인 심상 또한 무시하기 어렵다. 그전까지 주로 인간미 넘치고 섬세한 정서와 울림이 있는 작품들의 음악을 담당했던 그였지만, 이번 <아수라>에선 전혀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들려주고 있다.
일렉트릭 기타와 노이즈 가득한 앰비언트 사운드 그리고 터키의 대표적인 민속 악기인 사즈와 코리안 피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잿빛 가득한 소리들의 총체를 들려주는 이재진의 스코어는 강렬하고 파워풀하다. 긴장과 서스펜스, 우수를 한데 모아놓고 버무린 듯한 혼돈의 사운드는 스코어라기보단 김성수 감독이 안남시에 대해 상상하고 있는 일종의 도시에 대한 사운드 디자인에 가깝고, 그 오묘한 디테일과 감성들은 이 도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과 분노, 울분과 회한 같다. 미추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악과 깡의 세계에서 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소리들은 영화 속 인물들의 거대한 비명이자 비참한 울음이고, 또한 속죄의 기도문처럼 다가온다. 뻔한 장르적 스코어의 한계와 외피를 벗어던진 색다른 시도와 도전이 인상적이다.
4. 계춘할망
by 김지애, 김준성
창감독의 개인사에서부터 출발한 <계춘할망>은 비록 상투적이고 익숙한 신파에서 벗어나기 힘들지만, 윤여정과 김고은이라는 좋은 신구 배우들의 조화와 진심 어린 연기로 기어코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영화다. 고루한 감성과 작위적인 패턴이란 혹평 속에 비록 상업적 실패를 맛봤지만, 명불허전 윤여정과 화사한 제주 풍광 그리고 김지애 음악감독이 맡은 스코어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남긴다.
‘씨네노트’ 김준성 음악감독의 스탭으로 실력을 갈고닦다 <날, 보러와요>로 입봉한 그녀의 두 번째 작품으로,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빼어난 선율과 신인답지 않게 담담하게 풀어낸 노련한 솜씨가 매우 인상적이다. 영화가 신파임에도 음악만큼은 신파의 함정을 잘 피해간 아름다운 스코어다.
아코디언이나 우쿨렐레 등의 악기들을 활용해 제주라는 풍광을 목가적으로 그려내고, 기타와 피아노 뒤에 깊고 부드러운 목관과 묵직한 스트링을 편성해 서정적인 사운드를 연출한 <계춘할망>의 영화음악은 따스하고 평화롭다. 마치 이탈리아 영화음악가 니콜라 피오바니를 연상케 하는데, 그런 낭만과 여유는 영화에 생동감 넘치는 활력과 기품을 부여한다. 물론 혜지의 과거와 비밀을 암시하고 있는 어둡고 장르적인 큐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기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잘 조율되었고 관습적인 함정이나 매너리즘을 피해 적절한 긴장을 고조시킨다. 아쉽게도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김고은이 부른 주제곡 '웡이자랑'은 음원이 따로 공개되지 않았는데, 영화 안에서만 오롯이 그 감정을 나누고 싶다고 한 배우의 뜻에 따른 결정이라 한다.
5. 할머니의 먼 집
by 권현정
비교적 쉽게 고른 네 편과 달리 남은 한자리를 놓고 세 편의 사운드트랙 사이에서 다소 고심했다. 앞선 작품들만큼 확신을 주기에 조금 부족한 점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최용락 음악감독의 <덕혜옹주>는 큰 스케일에 비해 독자적인 매력과 존재감이 2% 아쉬웠고, 최석원 음악감독의 <번개맨> 극장판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슈퍼히어로물 사운드와 다양한 뮤지컬 넘버를 들려주지만 아동물이란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고른 건 어른이 된 손녀가 자살을 시도한 93세 외할머니를 감시(?)하기 위해 동거를 시작한 일상을 담은 홈메이드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 사운드트랙이다. 각종 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큰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의 음악은 단편과 독립영화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권현정 음악감독의 작품.
영화에 삽입되지 않은 2트랙을 포함한 총 14트랙에, 주로 피아노 솔로 연주로만 이뤄진 심플한 소품집에 가깝지만, 그 단순한 정갈함이 이 진심 어린 다큐멘터리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다큐라는 장르적 특성상 음악 구사에 있어 조심스럽고 제약이 많은 편이지만, 권현정 음악감독은 그런 지점들을 영리하게 피해 자연스럽고 편안한 사운드로 할머니와의 소소하면서 감동적인 일상의 추억들을 곱씹게 만든다.
종종 첼로와 리드 오르간, 베이스와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덧입히며 따사로운 피아노를 뒷받침해주는데, 인위적이지 않게 심금을 울리는 깊고 아련한 잔향은 할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애틋하다. <계춘할망>과 함께 무심히 지나쳐버릴 것만 같은, 올해의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사운드트랙.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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