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 <미나리>가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지명된 논란의 골든글로브를 제외하고, 2021년 미국 아카데미, 영국 아카데미, 각지 비평가협회상 등에서 외국어영화상을 휩쓴 <어나더 라운드>가 국내 극장을 찾는다. 덴마크 대표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신작 <어나더 라운드>는 무료한 일상에 사라진 열정을 되찾기 위해 술과 관련된 흥미로운 가설을 실험하기로 한 네 중년 교사의 이야기로, 그 중심에는 역사 교사 마르틴(매즈 미켈슨)이 있다. <더 헌트> 이후 감독과 두 번째로 협업한 매즈 미켈슨이 전작에 이어 인생 역경에 직면한 선생을 연기했다. 북미에서 먼저 개봉한 영화는 로튼 토마토 신선도 92%를 기록하는 등 평단뿐만 아니라 좌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에 힘입어 벌써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제작까지 확정한 바 있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키르케고르의 시의 구절을 띄우며 시작한 <어나더 라운드>는 무아지경의 술꾼이 된 학생들의 일탈을 비추며 본격적인 막을 연다. 시끌벅적한 오프닝은 별안간의 정전과 함께 침묵을 맞고. 검은 스크린을 맥주 한 잔을 따르는 소리가 오롯이 채우고 나면, 카메라는 한때는 청춘이었을 시든 중년, 마르틴을 비춘다.

마흔에 접어든 마르틴은 눈이 움푹 패인 듯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얻는 덕목에는 연륜이나 관록이라는 보기 좋은 말도 있지만, 권태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야간근무를 하는 아내와는 집에서 얼굴 맞댈 시간도 없고, 그럴 시간이 있는 아들 둘과는 대화도 않는다. 학생과 학부모는 그의 선생 자질을 의심한다. 주변을 암울해지게 만드는 능력 같은 게 생긴 것도 같다. “내가 전에 비해 지루한 사람이 되었냐”는 질문에 긍정하는 아내의 잔인하고도 솔직한 답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막연히 느끼던 마르틴의 불안한 걱정을 사실로 확인 시켜 준다.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친구 니콜라이(마그누스 밀랑)의 40번째 생일. “넌 자신감이 부족해 보여. 즐거움도. 그게 문제지.” 진심 어린 걱정에서 니콜라이가 꺼낸 말은 쐐기포가 되어 마르틴을 무너뜨린다. 그는 위로의 술 한잔에 마음을 열고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술술 풀어 놓기 시작한다. 지금과 자못 다른 이들이 공유한 젊음, 그 호시절을 회상하는 무작위의 수다는, 적당한 술이 일상에 활기를 돌게 한다는 흥미로운 가설에 대한 대화로 이어진다.

노르웨이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판 스콜데루는 ‘모든 인간은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갖고 태어나는데, 이 결핍된 농도를 유지하면 창의적이고 용감해진다’고 주장했다. 마르틴과 친구들은 술자리에서 안주로 써먹은 농담 같은 이야기를 삶 제1의 강령으로 채택한다. 최적의 직업적, 사회적 성과를 위한 알코올 섭취 보고서를 쓰기로 한 거다. 실험 방법은, (1) 음주가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지 증거 수집. (2) 음주는 근무 중에만. (3) 헤밍웨이처럼 저녁 8시 이후와 주말엔 금주. 나름의 구색을 갖춘 이 기묘한 실험에 그럴듯한 세목을 붙인 이들은 바로 다음 수업 시간 가설 검증에 나선다. 마르틴은 학교에 술과 음주측정기를 밀반입해 정확히 0.05% 치만 취한 후 수업에 들어간다. 처칠을 비롯해 술을 좋아한 역사 속 인물을 소개하며 시작한 이상하고도 고무적인 수업은 어리벙벙하기만 하던 학생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성공한다. 아내와의 관계도 전보다 좋아진다. 심리학 교사 니콜라이, 음악 교사 페테르(라르스 란데), 체육 교사 톰뮈(토마스 보 라센)도 비슷한 결과를 체험한다.

이 작은 변화가 0.05%의 혈중알코올농도 덕분이었는지 텅 빈 심장에 딱 그만큼의 자신감과 열의를 더한 덕인지 확실하진 않더라도, 상쾌한 효과를 본 친구들은 두 번째 실험으로 넘어간다. ‘개인의 혈중알코올농도 실험’이다. 각자 다양한 양의 술을 섭취해 최적의 농도를 찾는 실험이다. 위태롭지만 아슬아슬하게나마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추가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이 수준은 이들에 더한 것을 원하는 유혹을 일으킨다. 넷은 이젠 못 할 것도 없는 대범함과 끝장을 보자는 과감함으로 다음 단계를 기획한다. 최대 혈중알코올농도에서 겪을 궁극의 상태를 관찰하는 3부의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취기에 의지한 짧고 강렬한 환상을 맛본 이들은 피할 수 없는 하향곡선을 그리며 비극에 빠진다.

술이 인생의 유일한 돌파구다. 교사 집단답게 논문에 쓰일 법한 단어들을 골라 만든 네 친구의 노력 깃든 보고서와 그 내용은, 결국 앞의 간단해 보이는 문장을 믿고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즐기기 위해 취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통제 하에 취한’ 이들이 중독 증세를 정당화하는 유쾌한 장면들이 그렇듯, <어나더 라운드>는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나서서 술에 대해 부정하거나 경고하는 법이 없다. 페테르는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학생에 술을 권하기까지 한다. 영화가 음주에 너그러운 듯하지만, 당연히 술은 나사 빠진 삶을 온전하게 해 줄 묘약이 아니라는 게 끝으로 갈수록 자명해진다. 네 중년이 실행한 문제의 연구는 술을 구실로 한 도발적 형태의 도피였을 뿐이다. 술이 주는 잠깐의 해방감 뒤에 숨어서라도 인생을 부정하고 싶진 않았던 이들의 몸부림이었다. 빈터베르그 감독이 말하길, “<어나더 라운드>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 그는 “인생을 편하게 살아가는 젊은이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늙어가는 중년의 묘사를 통해, 인생이란 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려 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직전의 암울한 장면과 결을 완전히 달리하는 엔딩이다. 의도치 않은 술의 굴레에서 막 벗어난 마르틴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영화를 본 이들에게서 이견 없는 찬사를 받은 매즈 미켈슨은 삶에 초연한 남자의 얼굴, 혈중알코올농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취기를 표현하며 내내 최고의 연기를 선사하는데. 엔딩은 어린 시절 기계체조를 하고 20대에 무용수로 활동한 배우의 경력 덕을 특히 더 본 장면이다. 감독은 비통한 결말 대신 희망을 심은 열린 결말로 영화를 끝냈다. 바람이 휘몰아친 후 크게 무너진 인물들을 그 상태로 두지 않고, 차라리 마음에 슬픔과 황홀감이 뒤섞인 채로 새 삶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을 비추며 끝냈다. 좀 더 파멸적인 이야기가 될 뻔한 <어나더 라운드>가 인생을 긍정하는 주제를 갖게 된 건, 크랭크인 직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감독의 딸 이다가 “아빠, 희망을 줘야 해”라고 조언해 준 덕분이었다고.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