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는 가짜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문장이다. 배우의 연기론이나 배우가 몰입했을 때의 호르몬 분비, 혹은 연기를 목격한 관객의 심리 변화 등을 기준으로 한다면 연기가 가짜라는 주장은 신성모독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연기라는 행위는 당사자가 다른 상황, 혹은 다른 인물로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므로 본질적으로는 '거짓말'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배우의 연기는 그 자체가 거짓이자 보는 사람에겐 진실로 인식돼야 하는 무척 정교한 작업이다. 진심이되 진짜여서는 안되는 그 경계선.

(왼쪽부터) <아네트>,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하우스 오브 구찌>

만일 연기를 해야 하는 대상 또한 진실과 거짓,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라면, 배우가 소화해야 할 감정의 폭은 더 넓어질 것이다. 그런데 2021년, 신작을 세 편이나 선보였고, 그 세 편 모두 진실과 거짓 사이 어딘가를 기웃거리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있다. <아네트>,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하우스 오브 구찌>의 아담 드라이버다. 이 세 작품에서 각각 헨리 맥헨리, 자크 드 그리, 마우리치오 구찌를 의심할 여지 없이 탁월하게 소화한 그는 대세 배우인 이유를 스스로 입증했다. 지난 세 작품 속에서 발견하게 될 '2021년 최고의 거짓말쟁이'를 연기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아네트> 헨리 맥헨리 역

헨리 맥헨리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코미디언이란 단어에서 익살스러운 억양과 깔깔거리는 표정을 연상하겠지만, 헨리는 그런 유의 코미디언이 아니다. 그의 공연 이름은 '신의 유인원'(The Ape of God). 코미디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의 공연은 자기파괴적이다. 내가 왜 관객을 웃겨야 하냐며 투덜거리기도 하고, 계약서를 들먹이며 목을 매는 시늉까지 한다. 공연 도중 왜 코미디언이 됐느냐는 말에 헨리의 대답은 더 가관이다.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코미디언이란 명칭과 헨리의 공연 간의 간극, 그 거리감은 관객에게 이 인물에 대한 판단을 유보시킨다.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과 결혼한 헨리는 두 사람의 딸 아네트가 노래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후 그는 아네트를 대중들에게 소개하고 끊임없이 투어를 돌며 성공 가도를 달린다. 이때 이미 그는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가 아니다. 진실을 말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내려놓은 그는 '좋은 아빠'라는 거짓말로 스스로 속인다. 그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하고 만다. 마침내 그가 진실을 다시금 들여다볼 땐, 그가 아닌 세상은 거짓말투성이였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서로를 많이 사랑해'의 한 장면

아담 드라이버의 큰 키와 체구는 헨리 맥헨리를 담기에 충분하다. 레오스 카락스의 "내가 좋은 아빠인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헨리에게 투영하며 그가 하나의 이미지로 상정될 수 없음을 환기시킨다. '우리는 서로를 많이 사랑해'(We Love Each Other So Much)라는 넘버에서 안 뒤에서 불쑥 헨리의 손이 튀어나오듯, 태풍 속에서 춤을 추듯 안을 위협하듯, 지휘자를 껴안을 듯 양팔을 벌리고는 그를 밀어내듯 헨리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이 이중적이다. 아담의 큰 키는 그런 점에서 헨리를 더욱 양면적으로 만든다. 큰 키와 중저음의 목소리는 한편으론 믿음직하다가도 도리어 위협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기가 된다. 아담 드라이버가 배우이자 아버지(그는 아들이 있단 걸 숨기다가 인터뷰 중 실수로 말했다)란 사실을 레오스 카락스 또한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선택이 적중했음은 분명하다.


<라스트 듀얼> 자크 드 그리 역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라스트 듀얼>)는 3장으로 구성된 영화인데,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다. 즉 각 인물이 일관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파편화되는데, 그중 자크 드 그리가 가장 복합적으로 그려진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이렇다. 장 드 카루주(맷 데이먼)는 명예롭지만 풍족하지 않은 기사로 배신자 가문 티부빌의 마르그리트(조디 코머)와 결혼한다. 명예로운 기사와 풍족한 가문의 영예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지만 카루주가 전장으로 떠난 어느 날, 마르그리트가 혼자 있는 성에 자크 드 그리가 방문한다. 마르그리트는 이날, 드 그리가 자신을 범했다고 주장하고 드 그리는 마르그리트가 거짓 주장을 펴고 있다고 말한다. 장 드 카루주는 누구의 말이 옳은지 결정하고자 드 그리와의 '결투 재판'(승리자의 말을 진실로 판결하는)을 요청한다.

영화에서 1장은 장 드 카루주, 2장은 자크 드 그리, 3장은 마르그리트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조망한다. 서로를 가까이에 두고 있는 장 드 카루주와 마르그리트는 그래도 캐릭터의 변화가 덜한데, 자크 드 그리는 1~3장 전체에 거쳐 같은 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성격 묘사가 판이하다. 영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기사는 친구도 등지는 천하의 아첨꾼이며, 여성 편력이 상당한 난봉꾼은 헤어날 수 없는 유혹에 패배한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제3자의 눈에선 영화 막바지, 3장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를 자신만의 잣대로 판별하듯 2장의 자크 드 그리 자신 또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의 진실과 역사가 남긴 진실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그렇게 진실, 거짓의 뚜렷한 구분 없이 파편화된 자크 드 그리는 원래 아담 드라이버가 아닌 (영주를 연기한) 벤 애플렉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벤 애플렉이 일정을 다 소화할 수 없어 아담 드라이버가 해당 캐릭터를 맡게 됐는데, 맷 데이먼과 대립할 배역이란 점에서 벤 애플렉보다 아담 드라이버가 훨씬 대비되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선 아담 드라이버 특유의 다소 권태롭고 모호한 표정이 독보적이다. 상황이 반복적으로 묘사될 때, 그의 투박한 얼굴은 매번 다르게 읽힌다. 낭만과 비열함을 오가며 관객에게 다양한 '진실'을 제공한다. 이전, 이후에 제시할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전복되는 영화와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는 일맥상통하며 깊은 잔향을 남긴다.


<하우스 오브 구찌> 마우리치오 구찌 역

<하우스 오브 구찌>는 <라스트 듀얼>과 전혀 다른 결의 영화이지만, 설명을 따로 할 순 없다. 리들리 스콧은 <라스트 듀얼>의 차기작 <하우스 오브 구찌>에 아담 드라이버를 다시 캐스팅했다. 거장 중 한 명에게 인증 마크를 받은 것이다. 아담 드라이버라면, 또 다른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실제로 자크 드 그리와 마우리치오 구찌는 극과 극의 인물이다. 처세술에 능숙하고 인기도 많은 드 그리에 비해 마우리치오는 공붓벌레에 숙맥이다. 그런 둘을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극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얼굴이다.

마우리치오 구찌는 사람 좋은 미소로 모든 걸 받아넘긴다. 삼촌 알도 구찌(알 파치노)의 말에도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한다"며 눈웃음을 짓는 그에겐 일견 아무 욕심이나 야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변호사 공부를 하고, 구찌라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이 과연 보기처럼 속이 좋은 사람일 수 있을까. 마우리치오가 어떤 결심을 하며 야기의 전환점을 지나갈 때, 벽난로의 불길이 마우리치오의 눈 위 안경에 내려앉는다. 리들리 스콧이 아담 드라이버에게 '큐 사인'을 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마우리치오의 진면모를 보여주라고. 그때부터 아담 드라이버는 이성적인 야심가로서의 마우리치오로 탈바꿈한다.

이런 얼굴을 하던 사람이

이런 얼굴이 되기까지.

아담 드라이버(왼쪽)와 레이디 가가

<라스트 듀얼>에서 아담 드라이버의 얼굴을 다양한 각도로 파편화한 리들리 스콧은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 그를 다시 하나의 얼굴로 통합한다. 그 얼굴이 마우리치오 구찌다. 일방적으로 욕망을 숨기지 않는 다른 구찌들과 달리 마우리치오는 영화 전반에 거쳐 서서히 바뀐다. 그 변화에 맞춰 아담 드라이버는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다가 서서히 표정을 감춘다. 순진한 마우리치오에서 사업가 마우리치오로. 서사적 변화와 연기의 변화가 알맞게 맞아떨어지자, 관객은 어느 쪽도 '진짜' 마우리치오라고 단정 지을 수 없어진다. 거기엔 그저 마우리치오라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진실, 거짓이 애초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뒤 몽드' 매거진의 아담 드라이버 화보.

이렇게 세 작품의 아담 드라이버를 진실과 거짓에 관한 시선으로 접근해 보면, 진실을 외면했다가 거짓의 심연을 보거나(<아네트>), 진실이나 거짓이나 보는 사람에 따라 무엇이든 진실이 될 수 있거나(<라스트 듀얼>), 진실도 거짓도 한 몸통에서 자라거나(<하우스 오브 구찌>). 물론 이런 관점은 아담 드라이버도, 두 감독도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배우의 작품 선택, 감독의 배우 선택에는 그 이야기와 메시지를 적확하게 전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맥락을 구성했을 수는 있겠다. 2021년, 각각 다른 캐릭터로 진실과 거짓을 체현한 배우 아담 드라이버. 그가 펼친 연기가 최고의 연기라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2021년 최고의 거짓말쟁이로 선정하기엔 손색없을 것이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