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만에 리메이크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이 처음 도전하는 뮤지컬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리메이크를 택했다. 모든 장르의 영화를 성공적으로 매만진 바 있는 거장 로버트 와이즈와 뛰어난 무용가 겸 안무가인 제롬 로빈스의 협업으로 완성된 이 위대한 뮤지컬은 혼탁한 세상에 새로운 기술로, 새롭게 재해석돼 나타났다. 고전에 누가 되고 먹칠을 했을 거란 우려는 접어둬도 괜찮다. 지구 최강 흥행의 마술사이자 이젠 누구도 부정 못 할 할리우드 거장이 되어버린 영화 천재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런 범작을 내놨을 리 만무하다. 마치 '이것이 영화다!'임을 강조하는 탁월한 테크닉과 섬세한 디테일, 원작을 보강하는 각색으로 버전 업 된 이 시대의 신(新)고전을 선사한다.
위대한 명작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1961년 원작 영화가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점은 명확했다. 폴란드계와 라틴계 이민자들이 뉴욕에서 대치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태그라인에도 캐스팅 자체는 인종적인 사실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고, 오프닝을 제외하고 스튜디오에서 재현된 뮤지컬은 진짜 뉴욕을 담는 데도 실패했다. 아울러 나탈리 우드와 리차드 베이머, 러스 탬블린 그리고 리타 모레노 등 주연 배우들은 진짜로 노래를 소화하지 못한 채 마니 닉슨과 제임스 브라이언트 등 유명한 고스트 싱어에 의해 더빙되었다. 반세기 넘게 지났음에도 여전히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 문제와 소득불평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점도 이 고전 뮤지컬을 새로 만들 이유로 충분했다.
현재에 맞는 새로운 고전을 탄생시키다!
그래서 스필버그와 <뮌헨>과 <링컨>을 썼던 토니 커쉬너는 1962년 오스카 11개 부문에 올라 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 의상상, 음향상, 편집상과 음악상 등 뮤지컬 사상 최다인 10개를 수상한 고전을 시대적 보정치를 가미한 현재의 해석본으로 내놓기로 결정한다. 단순히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영상화가 아닌, 영화적 언어에 맞는 방식으로 수정돼 1961년 버전과 더불어 영원불멸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19와 주연을 맡은 안셀 엘고트의 성폭행 논란으로 개봉이 1년간 미뤄졌으며, 북미에서나 한국에서도 큰 상업적 반향을 불러오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제79회 골든 글로브에서 뮤지컬 코미디 부분 작품상을 비롯해, 여우 주조연상을 가져가고, 여러 비평가협회 시상식에 후보로 오르며 비평적 상찬을 받았다.
무엇보다 (뮤지컬 특성상 당연한 얘기일 테지만)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가장 신경을 쓴 건, 바로 말이 필요 없는 레너드 번스타인과 스티븐 손드하임이 만든 전설적인 음악을 어떻게 구현하는 가였다. 스필버그는 평생의 음악적 동반자이자 현존하는 할리우드 최고의 마에스트로 존 윌리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윌리엄스는 의외로 자신이 아닌 영화음악가 데이비드 뉴먼과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조합을 추천했다. 그 이유인즉, 데이비드 뉴먼이 1961년 오리지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시네마 콘서트를 북미와 유럽에서 50회에 걸쳐 지휘를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라틴계인 구스타보 두다멜 또한 탁월한 열정과 재능을 갖춰 자신보다 잘 지휘할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보다 원전에 가까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음악으로
전설적인 영화음악가 앨프레드 뉴먼의 장남이자 랜디 뉴먼의 사촌이며 토머스 뉴먼의 형인 동시에, 7∼80년대 존 윌리엄스 밑에서 콘서트마스터로 활동하며 영화음악과 지휘에 대해서 사사한 데이비드 뉴먼은 영화음악 금수저 중의 금수저다. 최근 들어 작곡보다 지휘자로 활동이 잦은 편인데, 이번 리메이크로 음악 감독과 편곡을 맡아 퀸시 존스(컬러 퍼플)와 토마스 뉴먼(브릿지 스파이), 알란 실베스트리(레디 플레이어 원)에 이어 스필버그와 일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여기에 <펀 홈>으로 토니상을 수상한 재능 넘치는 제닌 테소리가 보컬 코치로 합류하고, <미녀와 야수>와 <시카고>로 그래미에 오른 맷 설리반이 프로듀서로, 존 윌리엄스 역시 음악 컨설턴트로 도움을 주며 강력한 조합을 완성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사실 54주간 빌보드 차트를 점령했던 시드 라민과 어윈 코스탈이 매만진 1961년 영화판 편곡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 원래 뮤지컬은 (당시 브로드웨이 대형 오케스트라 규격에 맞춰) 30여 명 정도의 뮤지션들이 연주한 작품이었지만, 영화를 위해 6대의 색소폰과 8대의 트럼펫, 5대의 피아노, 5대의 실로폰을 가세한 72인조 오케스트라로 스케일을 키웠다. 번스타인은 이것이 섬세함과 질감을 살리지 못할뿐더러 고압적이라 생각했다. 데이비드 뉴먼은 이런 원 작곡가 번스타인의 의도를 받아들여 27인조 뮤지션으로 재편해, 재즈와 라틴 리듬 그리고 교향악과 뮤지컬이 절묘하게 섞인 원작의 다이내믹한 질감과 섬세하고 화려하며 아기자기한 묘미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세 번째 EGOT에 빛나는 리타 모레노에게 바친 예우
*EGOT: 에미(Emmy), 그래미(Grammy), 오스카(Oscar), 토니(Tony)상 등 미국 대중문화 각 분야를 대표하는 가장 권위있는 시상식 네 개를 지칭한다.
1957년 뮤지컬이 1961년 영화화되며 곡의 순서가 제법 많이 요동(!)쳤는데, 원래 2막에 위치하던 ‘지, 오피서 크럽키’(Gee, Officer Krupke)는 후반의 심각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 당겨졌으며, 제트파와 샤크파가 싸우기 전에 흘러나왔던 ‘쿨’(Cool)과 토니와 마리아가 서로 사랑을 맹세하던 세레나데 ‘원 핸드, 원 하트’(One Hand, One Heart)의 위치도 뒤바뀌며 상대적으로 ‘쿨’(Cool)은 뒤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번 2021년 영화판에선 대체적으로 원작 뮤지컬의 순서를 존중하며, 제트파와 샤크파의 격돌을 가라앉히기 위한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원 핸드, 원 하트’(One Hand, One Heart)와 ‘쿨’(Cool)두 곡을 중간으로 옮겼다. 게다가 무도회 당일 밤에 아파트 옥상에서 불리는 ‘아메리카’(America)는 뉴욕 길거리로 무대가 변경되며 무도회 다음날 낮으로 바꿨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이자 이번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뽑는다면 토니와 마리아가 부르던 ‘섬웨어’(Somewhere)를 1961년 영화에서 아니타 역할을 소화했고, 이번 2021년 발렌티나 역으로 다시 출연한 리타 모리노에게 예우를 바치는 측면이자 작품의 가진 의미를 더 심화시키기 위해 부여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부른 곡들의 일부가 베티 완드와 마니 닉스에 의해 더빙됐던 걸 60년 전에 경험했던 모레노에겐 일종의 설욕이자 명예를 되찾은 셈이기도 하다. 여기에 원작과 달리 직접적으로 푸에르토리코 국가인 ‘La Borinquena’가 짧게 등장해 이민자들의 지지를 받는 장면이 추가됐고, 레너드 번스타인의 스코어 파트 부분을 대폭 늘려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데이비드 뉴먼과 구스타보 두다멜이 되살려내다
1961년 영화에선 빠져있던 ‘셰르조’(Scherzo)를 비롯해 데이비드 뉴먼이 매만진 30여 분에 이르는 8개의 번스타인의 뮤지컬 재료들은 훌륭하게 영화적인 언더스코어로 활용되고 있으며, 노래 사이사이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군무와 역동적인 연출과 맞물리며 감각적이고 황홀한 고전의 풍류를 유감없이 즐길 수 있게 만든다. 시대를 초월한 음악을 만들어낸 건 레너드 번스타인의 솜씨지만, 이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 준 건 구스타보 두다멜의 드라마틱한 지휘와 데이비드 뉴먼의 탁월한 식견 때문에 가능했다. 사전에 배우들이 직접 녹음해 현장에서 연기했지만, ‘원 핸드, 원 하트’(One Hand, One Heart)와 ‘섬웨어’(Somewhere), ‘어 보이 라이크 댓/아이 해브 어 러브’(A Boy Like That/I Have a Love) 그리고 ‘마리아’(Maria)는 현장에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
작년에 타계한 브로드웨이의 전설이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사가 스티븐 손드하임은 스필버그의 후반작업이 이뤄지던 녹음실에 3주간 들려 매일같이 조언을 해줬으며, 연주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링컨 센터를 실제 거점으로 삼는 뉴욕 필하모닉과 두다멜이 상임지휘자로 있는 LA 필하모닉 두 관현악단이 참여했다. 1984년 이후 더 이상 오스카에서 음악 편곡 부문이 시상되고 있지 않지만, 작년 한 해 본작을 비롯해 <아네트>와 <시라노>, <디어 에반 헨슨>, <틱, 틱... 붐!> 등 걸출한 뮤지컬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점에서 한 번쯤 주최 측에서 고려해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랬다면 데이비드 뉴먼은 가장 강력한 수상 후보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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