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실사화 영화관의 연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먼저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 쪽은 DC코믹스의 실사화를 담당하는 워너브러더스였다. 마블은 <아이언맨> 1편이 개봉할 때까지만 해도 유니버스 단위의 보다 넓은 세계관을 구상할 여력은 없었으니… 워너브러더스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실사화 연계 프로젝트를 기획해 왔고 실제로 <슈퍼맨 리턴즈>가 성공해서 기획이 이어졌다면 DC가 선발주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DC코믹스 기반 작품들이 잇달아 그리 좋지 못한 성과를 보이면서 연계는 어려워졌다. 흥행 성공을 토대로 다음 영화로 나아갈 수 있어야 했는데, 눈에 띄는 성과를 냈던 영화가 너무 늦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히어로 실사화 프랜차이즈에서 DC는 본의 아니게 후발주자로 떠밀려 버린 셈이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가 <어벤져스>의 대성공을 시작으로 명실상부 성공 가도에 올라가면서 워너브러더스 산하 DC코믹스 실사화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하지만 유니버스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실망스러운 성과를 내면서 기대치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을 위시한 어벤져스가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서기 전에는 히어로 캐릭터의 대표주자들은 전부 DC코믹스 산하의 배트맨, 슈퍼맨 그리고 원더우먼 등이었는데도.
이후 개봉한 <수어사이드 스쿼드> 역시 혹평을 면치 못하면서 DC 확장 유니버스(DCEU)는 이대로 나락으로 가는가 싶었으나, 다행히 이듬해 개봉한 <원더우먼>이 좋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같은 해의 <저스티스 리그>는 다시 그렇지 못했고…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히어로 무비 최초로 심해 수중의 왕국 아틀란티스를 배경으로 한 <아쿠아맨>이었다.
이후 <샤잠!>이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원더우먼 1984>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인해 스크린 상영에 타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를 기록하면서 DC 실사화 영화는 다시금 궤도에 재진입하기 시작했다. 또 유니버스에 편입되지는 않았지만 DC 코믹스를 기반으로 한 <조커>가 베니스영화제와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등 시상식을 휩쓸며 호평을 받았다. 망작이라고 여겨졌던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제임스 건을 기용해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리런치하고, <피스메이커>라는 스핀 오프 시리즈까지 연계되는 성과를 거뒀다.
가장 최근에는 <더 배트맨>이 다소 잠잠했던 2021년과는 달리 2022년의 포문을 성공적으로 열었다. 당초 <저스티스 리그>의 배트맨을 맡은 배우 벤 에플렉이 출연 예정인 배트맨 솔로 무비로 기대를 모았으나, 벤 에플렉이 하차 수순을 밟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확정된 타이틀이기도 한데. 장장 5년을 거쳐 결국 취소된 동명의 작품을 뒤로하고 새로운 배우와 감독을 기용해 새 작품으로 돌아온 셈이다.
2021년에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외 DC 코믹스 기반의 실사영화 개봉작이 없었다. <조커>에 이어 개봉한 작품들이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팬데믹 사태에 대응하기 어려운 부분이 워너브러더스에도 있었고, 촬영 지연과 개봉 연기로 인해 기존의 기세를 이어가기 어려웠던 것.
이런 상황에서 <더 배트맨>이 호기로운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워너브러더스는 대폭 변경된 올해 라인업을 발표했다. 상황상 당초 예정보다 조금씩 밀린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으나 원래 2022년 말 개봉 예정이었던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 <더 플래시>가 각각 내년 3월과 6월로 연기된 건 무척 아쉽다. <블랙 아담>과 <샤잠!: 신들의 분노>가 올해 개봉 예정이며, 애니메이션 <DC 리그 오브 슈퍼 펫>도 올해 선보일 작품 중 하나다.
<블랙 아담>, 2022년 10월 21일(북미)
드웨인 존슨 기용으로 화제가 됐던 <블랙 아담>은 히어로가 아닌 빌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다. 블랙 아담은 자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가차없는 철퇴를 내리는 인물로, 샤잠의 아치 에너미(가장 대표적인 숙적) 캐릭터로 잘 알려져 있다. 샤잠과 비슷한 계기를 통해 대마법사들로부터 선택을 받아 힘을 얻었지만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복수에 눈이 멀어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인물이다.
샤잠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어린아이인 빌리 뱃슨에 비해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아서 샤잠이 상대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던 빌런이기도 했다. 물론 1945년 처음 등장한 이래 설정 변화를 다수 거치면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는 상황이라 드웨인 존슨의 블랙 아담이 어떤 히스토리를 가진 인물이 될지는 아직 지켜봐야 할 부분. 공식 정보에 따르면 악당보다는 ‘안티 히어로’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하니, <조커>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영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샤잠!: 신들의 분노>, 2022년 12월 16일(북미)
<샤잠!: 신들의 분노>은 ‘샤잠!’이라고 외치면 슈퍼히어로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소년 빌리 뱃슨(애셔 앤젤)을 다룬 실사화 영화 <샤잠!>의 속편이다. 첫 번째 실사영화는 코믹스 원작에 집중하여 원작 설정 및 코스튬 등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으며, 대단한 각색 없이 본연의 스토리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집중한 것이 특징이다. 히어로 무비이면서도 가족영화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었으나 소위 ‘코믹스 키드’ 감성이 짙어 북미 흥행에 비해 국내 흥행은 미미했다.
<샤잠!: 신들의 분노>는 어린아이였던 주인공 일행이 성장해 많은 것들이 달라진 시점에서 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주인공 빌리 뱃슨이 변신한 샤잠을 맡은 배우 재커리 레비는 영화와 관련하여 시간적, 물질적인 여유가 더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영화가 훨씬 좋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어떤 이야기로 진행될지와 더불어 기존 영화와의 연계점이 있을지(팬들은 슈퍼맨의 등장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기에)도 관심사 중 하나다.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 2023년 3월 17일
당초 올해 개봉 예정이었으나 2023년으로 개봉이 연기된 <아쿠아맨>의 두 번째 시리즈,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다. 영화는 DC 확장 유니버스의 저물어 가던 빛을 다시금 궤도로 올려놓은 작품으로, 시나리오 개연성 등의 이슈는 있었으나 화려한 영상미와 독특한 소재를 통해 흥행에 성공해 10억 달러 흥행 영화의 반열에 드는 대성공을 거뒀다.
물론 이후, 주연 배우 앰버 허드가 전남편 조니 뎁과의 법정 공방을 이어가면서 이래저래 영화 외적인 이슈가 더 많이 보도되기는 했지만 워너브러더스답게 배우 교체는 없다고 못을 박은 덕분에 우리는 전작의 메라를 그대로 볼 수 있게 됐다. 각본이 훌륭하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전편의 연출자 제임스 완이 다시 합류한 걸 보면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더 기대해도 되는 부분이 아닐지. 더불어 현실 사회의 문제와 좀 더 관련이 있다는 언급이 있어 좀 더 깊고 진지한 문제에 대한 토로가 되지 않을지 예상해 볼 수 있겠다.
<더 플래시> 2023년 6월 23일
사실 2023년으로 개봉이 연기된 것이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작품은 바로 <더 플래시>다. 촬영 완료 소식도 있었고 이제 후반 작업만 남겨둔 상황에서, 무려 반년이나 개봉이 연기됐기 때문이다. 원작 코믹스 가운데 가장 유명하면서도 안타까운, 동시에 플래시라는 캐릭터의 정체성과 고뇌에 대해 잘 엿볼 수 있는 작품인 <플래시포인트>를 기반으로 하는 이 영화는 <저스티스 리그> 등에서 다소 아쉬웠던 플래시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제작 확정 이래 감독들의 연이은 하차에다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 무려 7년이나 걸린 영화인지라 팬들의 아쉬움은 더 클 수밖에 없는데, 수많은 루머와 더불어 메인 빌런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보니 궁금증 역시 크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벤 에플렉이 배트맨 역할로 잠시 등장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팀 버튼의 <배트맨>에 출연한) 마이클 키튼이 새로운 배트맨 역할로 등장하고 CW버스와의 연계를 통해 멀티버스를 구체적으로 다룰 것으로 보여 최대 기대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히어로 무비 프랜차이즈가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고전, 명작으로 손꼽히는 많은 작품들이 실사화됐지만 아직도 실사화를 기다리고 있는 코믹스들이 많다. 특히 DC의 경우에는 성공적인 연계보다는 연계를 위한 작품 제작에 얽매이는 통에 영화의 작품성이 저하된 경우가 다소 있었으므로 어쩌면 (확장 유니버스보다 더 큰 범위의) DC 실사화 유니버스는 다시 시작점을 찍어 주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10년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면서 어쩐지 스크린에서는 예전만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바, 개별 작품의 훌륭한 작품성과 DC 실사화 프로젝트 본연의 매력포인트이기도 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라는 무기를 통해, <다크 나이트>를 비롯한 <배트맨> 그리고 <슈퍼맨> 시리즈가 오랜 세월 쌓아온 DC의 명성을 이번에야말로 이어갈 기회일 수도 있다.
히어로 무비는 이제 단순하고 일률적인 영웅담이 아니라, 화려한 블록버스터 액션과 CG 효과와 더불어 히어로 내면의 인간적인 고민과 더 큰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 그리고 해결에 대해 각자의 대답을 도출하는 데 이르렀다. 윤리적인 문제의식, 동등함, 결핍 등을 단순히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해답으로 나아가기 위해 메시지를 던지기도 한다. ‘지나치게 진지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가는 건 DC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