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즈>

뒤통수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싶을 때나 다른 세계로 깊이 빨려들었다가 나오고 싶은 충동이 들 때 찾는 류의 작품이 있지만, 지쳐서 뇌에 과부하가 올 때면 어쩐지 쉽고 간단한 걸 찾게 된다. 머릿속은 혼란한데 콘텐츠는 여전히 보고 싶을 때 <프렌즈> 만한 게 없다. 같은 생각을 하고 이 시리즈를 사랑하는 이들은 분명 소수가 아니다. 당장 기자가 다니는 어학원의 방은 <프렌즈> 캐릭터의 이름을 빌리고 있고, 사무실 근처 카페 주인도 커피에 같은 이름을 붙였다. 제작자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이 시리즈를 이토록 오래 그것도 열렬하게 좋아할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목적 없이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프렌즈>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인생에서 어떤 시기를 보내고 있느냐에 따라 에피소드를 소화하는 방식도 달라져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게 된다.

2021년이 끝날 즈음 넷플릭스 코리아에서도 <프렌즈>가 빠진다는 소문이 돌아 많은 팬이 슬퍼했다. 다행히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넷플릭스에서 여전히 <프렌즈>를 볼 수 있고 지난달 말부터는 왓챠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 신작이 아니기에 시의성이 없는 이 고전 시트콤과 연관된 뉴스가 날 때면, 기자는 어떻게든 엮어 기사를 쓰고 싶어 했다. 왓챠의 대어 낚시 소식을 핑계로 <프렌즈> 하면 떠오르는 몇몇 순간을 써본다. 모든 순간을 담다가는 며칠 밤을 샐 것이기에 다섯 순간만 돌아본다. 이 두 문단처럼 다소 에세이 같은 글이 될 거라 예고한다.


“악! 내 눈!”

S5, E14 비밀은 없다

로스(데이빗 쉼머)의 런던 결혼식 투어가 시작이었다. <프렌즈>의 또 다른 대표 커플 ‘몬들러’가 만나기 시작한 건. 알리기보다는 들키면서 모니카(코트니 콕스)와 챈들러(매튜 페리)의 연애 사실이 친구들 사이에서 퍼진다. 이들의 ‘비밀’을 처음 알게 된 건 하필 조이(맷 르블랑). 어마어마한 비밀을 혼자만 품게 된 조이는 괴롭다. 조이를 사이에 두고 모니카와 챈들러 vs. 레이첼(제니퍼 애니스턴)과 피비(리사 쿠드로)는 때아닌 극한의 비밀전쟁을 벌인다.

아슬아슬한 상황을 관전하는 것을 좀처럼 어려워하는 편이라, 아주 오래전 이 에피소드를 처음 봤을 때는 내면의 비명을 지르며 겨우 따라갔던 기억이다. 이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서 그런지 몇 번이고 다시 꺼내 볼 때마다 깔깔 웃는다. “걔들이 알아!” “우리가 아는 걸 걔들이 몰라!” “걔들이 안다는 걸 우리가 아는 걸 걔들은 몰라!” “우리가 아는 걸 걔들이 아는 걸 우리가 안다는 걸 걔들은 몰라!”로 쌓여가는 대사는 이제 입에 익어서 합창하듯 따라 하게 된다. 서로를 유혹하는 챈들러와 피비의 무리수 말고도, 주황색 인조 퍼 재킷을 입은 피비가 경약하며 “내 눈!” 하고 소리 지르는 장면은 여전히 밈(meme)으로 쓰일 만큼 상징적이고, 바로 뒤에 이어지는 로스의 방방 뛰는 순간, 그리고 조이의 애착 인형 펭귄 헉시가 소개되는 순간도 소중하다.


친절한 욕

S4, E5 조이의 새 여자친구

가끔 어떤 손짓이나 몸짓은 그 자체로 작품을 대표하곤 한다. <빅뱅이론> 친구들의 어려운 가위바위보가 그렇고,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를 생각하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허밍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매튜 맥커너히가 자연히 떠오른다. 두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는 로스의 ‘우나기’와 함께 <프렌즈>를 대표하는 손짓은 일명 ‘친절한 욕’이다. 역시 로스가 만든 거다. 부모님이 알아채고 혼낼 손가락 욕 대신 일종의 주먹 욕을 고안한 거다. <프렌즈>의 모두가 독특하지만 로스도 참… 괴짜다. 열 마디 격한 욕보다 소위 킹받는 이 동작은, <프렌즈> 팬이라면 한 번쯤 따라 해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지금 하고 있거나.


조이의 놀란 눈

Sn, En

동작 없이 표정만으로 충분하기도 하다. 조이의 놀란 눈이 그렇다. 조이의 정보처리능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현저히 떨어져서 뭐든 알아채는 속도가 느린데, 그때마다 따라붙는 표정은 일품이다. 조이의 일명 시간차 깨닫기 신공은, 일단 흰자위가 저렇게 많이 보일 수 있나 궁금해지는 찰나를 선사하고 나면 (적어도 기자이겐) 백발백중으로 웃음을 남긴다. 그가 곧 눈이 커질 거라는 걸, 화면 속 조이 앞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기다리는 재미가 있어서 또 마음이 따뜻해져 버리고 만다. 챈들러의 전염성 있는 웃음도 빼놓을 수 없는 트레이드마크 표정이다.


“신발이 되기 싫다면요? 지갑이 되고 싶다면요?”

S1, E1 사랑이란?

1994년 가을 시작된 여섯 친구의 뉴욕살이는 시즌이 계속되던 10년을 훌쩍 넘어서도 추억되고 있다. 첫 번째 시즌, 특히 파일럿의 자잘한 스토리라인은 친구들과 팬들 사이에서 우리끼리만 아는 농담, 우리의 언어로 통해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다양하게 되풀이된다.

첫 에피소드에서 로스는 레즈비언 아내와 막 이혼했다. 자기 결혼식에서 달아난 레이첼은 영원한 호스트 모니카와 룸메이트가 된다. 빈정대는 챈들러, 찝쩍대는 조이, 우주에서 온 피비까지 인물 성격과 관계성의 명징한 설정은 내내 그 톤을 유지한다. 연애에 관해서라면 박사임을 자부하는 조이가 사랑에 실패한 로스 앞에서, 앞으로 그럴 것과 비교해 덜 바보같이 그려지긴 했지만 말이다.

“신발이 되기 싫다면요? 지갑이 되고 싶다면요? 모자가 되고 싶다면요?” “현실 세계에 온 걸 환영해! 거지 같긴 하지만 맘에 들 거야.” “방금 스푼을 집었거든.” 명대사로도 가득한데. 기자처럼 <프렌즈>로 영어 공부를 한 독자라면, 마치 수학의 집합 공부처럼 파일럿만 파서 이 대사들이 다른 에피소드의 대사보다 귀에 더 익을 거라 장담한다.

내용과 연관된 것 말고 파일럿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이제 막 새 작품을 시작한 배우들이 풍기는 형언할 수 없는 젊음과 들뜸, 활기다. 시즌 10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 곧바로 이 에피소드로 돌아오면, 그 에너지의 간극이 뚜렷해 더 애잔해진다.


“넌 챈들러니까!”

S3, E25 바닷가에서

<프렌즈>의 유명한 로맨틱한 장면으로는 열 시즌 내내 사연 많은 로스, 레이첼 커플의 지분이 크겠지만,(“날 잊었다고? 그럼 언제는 나를 못 잊었어?”(S2, E7) 장면과 레이첼 간병을 위해 로스가 그렇게 자랑하던 TV 출연 기회를 날린 장면(S3, E21) 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모니카, 챈들러 커플의 것이다.

존 파브로가 연기한 피트와 헤어지고 모니카는 상심한다. “늙어서도 짝이 없으면 내가 남자친구 해 줄게.” 챈들러의 농담 같은 위로에 모니카는 웃는다. “뭐가 그렇게 웃겨?” “(네가) 방금 농담했잖아. 그래서 빵 터졌어.” 이번엔 챈들러가 상심한다. “좀 심하게 웃네. 나는 남자친구감으로 영 아니야?” 정확히 한 시즌 뒤 그와 연인이 되리란 걸 꿈에도 모른 채 나름 진지하게 묻는 챈들러에 모니카는 계속 코웃음 친다. “응, 넌 챈들러니까. 알잖아, 챈들러!” 챈들러가 한 번 더 묻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고 소개받았다고 쳐. 너한테 '(낮은 목소리로)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하면 어쩔 거야?” 모니카도 지지 않는다. “목소리가 이상해서 겁을 집어먹겠지!”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덜 로맨틱했다가, 이후 둘이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더 애틋해진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고백하자면 팬으로서 이런 작은 복선에도 심히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 없다. 모니카와 챈들러는 아지트 ‘센트럴 퍼크’의 언제나 이용하는 주황 소파가 아닌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다. 둘 사이 평소의 우정이 아닌 다른 기류가 끼어들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한다고 굳이 확대 해석하고 싶어진다. 둘이 입은 품이 낙낙한 셔츠는 당장 무언가 시작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청량감마저 주는 듯하다. 그렇게 둘은 생칠면조를 머리에 끼고 용서를 구하는 귀여운 커플이 된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