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희(강진아)의 팔자는 시작부터 좀 꼬였다. 부모님은 춘희를 봄(春)에 태어난 기쁨(喜)이라 부르려 했지만, 출생 신고 담당 공무원은 서류에 기쁨 대신 계집(姬)이라 써넣었다. 그 탓에 운명이 살짝 어그러진 것일까. 춘희에겐 웃을 일보다 울 일이 훨씬 많았다. 중학생이 된 1997년, 불행이 본격적으로 밀어닥쳤다. IMF 경제 위기로 온 나라가 휘청였고, 춘희 가족도 끝내 타격을 피하지 못했다. 이듬해 2월, 춘희는 부모와 집을 한꺼번에 잃는다. 영화는 구체적 내막을 일러주지 않지만 춘희를 일종의 생존자로 표현한다. 부모가 선택할 수밖에 없던 죽음에서 겨우 빠져나온 열다섯 춘희(박혜진). 장례를 마치고 외삼촌 식구가 사는 집으로 들어온 춘희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현관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린다. 난데없는 더부살이,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다. 얼굴에 안쓰러운 기색이 가득한 할머니를 제외하면 춘희를 달갑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동갑내기 사촌 유라는 춘희와 함께 방을 쓰기 싫다며 소리치고, 외삼촌과 숙모는 돈 문제로 늘 언성을 높인다. 비좁은 다락방에 간신히 몸을 누인 춘희, 갑갑한 사방에는 눈물을 흘려보낼 조금의 틈도 없다.

이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춘희는 계속 다락방에 산다. 외삼촌 식구들은 일찌감치 아파트를 얻어 이사했고, 춘희는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모든 방이 비어 있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은 여전히 한 구석뿐이라는 듯 춘희는 두 다리를 펴는 일조차 쉽지 않은 다락에 머문다. 다만, 이제 그곳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춘희만의 방으로 보인다. 작은 전구와 사진들, 손수 만든 뜨개질 소품으로 살뜰히 꾸며놓은 공간에선 전과 달리 온기가 느껴진다. 이불 사이엔 이따금 춘희가 깐 마늘 한 알이 굴러다니기도 한다. 어느 날, 잠에서 깬 춘희는 벽에 달라붙은 민달팽이를 발견한다. 조용히 기어가는 모습이 신기한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등에 이고 다닐 집이 없는, 자취마다 물기 어린 자국을 남기는 존재. 민달팽이는 춘희와 닮았다. 슬픈 일이 벌어져도 좀처럼 울지 않는 춘희는 눈물 대신 땀을 흘린다. 다한증은 춘희에게 부모의 죽음만큼이나 오랜 콤플렉스다. 거실 바닥에 끈적하고 축축한 발자국이 찍힐 때마다 외삼촌 가족에게 눈총을 받았고, 폴카 댄스 연습 상대를 자처하며 춘희의 손을 마주 잡았던 중학교 무용 선생님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어른이 된 춘희는 마늘을 까서 번 돈을 조금씩 떼어 저축한다. 수술로 다한증을 고치고 나면, 제 인생에 풍기는 짠 내도 사라질 것만 같다.

아픔을 간직한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영화는 경쾌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연광을 활용한 화면은 전체적으로 화사한 기운을 띠고, 의상과 소품은 온색을 다채롭게 머금고 있다. NASA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노숙자 황 씨(황미영), 치유모임에서 만난 주황(홍상표) 등 코믹한 매력이 돋보이는 인물도 여럿 등장한다. 유년과 현재를 중첩시키는 환상적 설정을 설득해내는 방식 또한 심각함과는 거리가 멀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날, 춘희는 터널을 통과하다가 별안간 벼락에 맞는다. 그날 이후, 춘희의 눈에만 보이는 춘희가 나타난다. 외삼촌 집에 처음 들어온 열다섯 살 춘희다. 어린 춘희는 아무렇지 않게 춘희 앞을 배회하며, 자꾸 춘희에게 말을 건다. 난데없는 출현에 당황하면서도 춘희는 춘희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열다섯 춘희가 불러들이는 기억은 그리 곱지 않다. 할머니의 한숨은 무겁고, 외삼촌의 호통은 요란하다. 한 번도 살갑게 챙겨준 적 없던 숙모는 어느 밤에 쓸쓸하게 말한다. “이 집구석에선 우리가 외지인이잖아.” 춘희는 자신이 견뎌온 시간을 뒤늦게 돌아본다. 누군가는 춘희를 불쌍하다며 안타깝게 바라봤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꺼림칙하다며 외면했다. 어느 쪽이든 춘희에게는 외로움과 죄책감을 나란히 안겼다. 무엇보다 춘희는 자신을 미워하게 됐다.

“원래 사람들이 저를 별로 안 좋아해요.” 나를 어여쁘게 여기지 못하는 마음은 춘희를 곧잘 움츠러들게 한다. 주황과의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꽃을 선물하고 손 잡기를 망설이는 설렘 가득한 시작을 지나자, 두려움과 의심이 피어오른다. 그와중에 사촌 오빠 원석(임호준)은 춘희에게 집을 나가라고 통보하고, 춘희는 치유모임 강사에게 사기를 당해 모아뒀던 돈을 잃는다. 자신이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주황에게 춘희는 단호한 말투로 답한다. “주황 씨, 누굴 지켜준다는 건 그렇게 쉽게 얘기하는 거 아녜요.” 춘희의 어지러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열다섯 춘희는 집안 곳곳에 땀이 밴 발자국을 찍어 놓는다. 춘희가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는 동안에도 식탁에 앉아서 연신 수수깡을 쌓아 올리며 집 모형을 짓는다. 춘희는 춘희에게 묻는다. “왜 너 혼자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이렇게 만들어. 그때 그냥 같이 죽었어야지.” 자신이 들었던 가장 아픈 말로 자책한다. 어린 춘희는 입술을 달싹일 뿐, 이렇다 할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모습을 감춘다. 바람 소리만 휑하게 들리는 집에서 춘희는 다시 혼자임을 깨닫는다.

<태어나길 잘했어>는 최근 독립영화에서 두드러진 경향을 고루 이어받은 작품이다. 여성 주인공이 자신과 화해하고 삶을 긍정하는 힘에 가닿는 여정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20)를 떠올리게 하고, 90년대 후반 IMF를 맞닥뜨린 어린 춘희는 <벌새>(김보라, 2019)에서 비슷한 시기를 통과하는 중학생 소녀 은희(박지후)와 언뜻 겹쳐 보인다. 오래된 목조가옥 풍경과 그 안에 드나드는 인물의 면면을 지켜보는 세심함은 <남매의 여름밤>(윤단비, 2020)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들 영화가 그러하듯, <태어나길 잘했어> 또한 저만의 위로를 전하려 애쓴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대사는 다소 진부할지언정 거짓되게 들리지는 않는다. 춘희가 사촌 오빠 앞에서 난생 처음 억울함을 토로할 때, 20년 전의 자신에게 다가가서 두 팔 벌려 끌어안을 때, 영화에는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한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이 자리잡는다. 강진아는 <한강에게>(박근영, 2018) 이후 다시 한 번 주연을 맡은 장편에서 역할에 걸맞은 믿음직한 태도로 서사를 이끈다. 인물의 슬픔을 그려내는 일에 정성스레 임하는 기존의 장점이 빛을 발하는 동시에, 그간 자주 볼 수 없던 엉뚱한 매력을 선보이며 춘희를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로 완성한다. 어린 춘희 역을 맡은 박혜진과 홍상표, 황미영, 임호준, 김금순 등의 연기도 조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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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