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메인 예고편


2016년은 손예진에게 더없이 특별한 해입니다. 그녀는 올해 <비밀은 없다>의 연홍과 <덕혜옹주>의 덕혜를 선보이며, 자신의 재능을 유감 없이 뽐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딸을 잃어버린 엄마 연홍과 나라를 잃은 황녀 덕혜, 두 여자의 어마어마한 온도차를 한 배우가 능란하게 오갔다는 것. 그들은 모두 끝내 광기를 드러내지만,  그 양상은 사뭇 다릅니다. 오늘은 <비밀은 없다>와 <덕혜옹주>에 도착하기까지 배우 손예진이 지난 15년간 영화 속에서 선보인 다양한 캐릭터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사랑의 미열이 그대로|
<클래식>의 지혜와 주희  

손예진은 드라마 <맛있는 청혼>(2001)으로 배우로 데뷔해 곧장 스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청순가련이라는 흔한 수식이 더없이 들어맞는 외모에 다부진 연기력까지,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를 부지런히 병행하며 배우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켜나갔습니다.

불치병을 앓는 수인을 연기한 <연애소설>(2002)에 이은, 두 번째 영화 주연작 <클래식>(2003)은 손예진의 청초한 미모를 실컷 바라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녀는 고등학생 주희와 대학생 지혜 12역을 소화합니다. 60년대를 사는 주희는 친구 사이인 두 남자에게 구애를 받고, 2000년대의 지혜는 친구의 애인을 짝사랑하죠. 티 없이 맑은 얼굴은 똑같되, 둘의 성격과 상황은 그 시대의 간극만큼이나 다릅니다. 군데군데 신인 티가 역력하긴 하지만, 서로 다른 두 캐릭터를 오가면서 점점 그 둘을 겹쳐놓는(주희와 지혜는 모녀입니다) 영리함이 가려지진 않습니다. 양갈래 머리를 한 주희가 비에 흠뻑 젖은 채 준하(조승우)를 바라보는 모습은 백합 같아요.


망설이지 않는 여자|
<외출>의 서영

기억을 잃어가는 수진을 연기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를 마친 뒤 손예진은 배용준과 <외출>(2005)에 출연합니다. 흥미로운 건 불과 스물셋을 지나던 그녀가, 내연녀와 함께 중태에 빠진 남편을 마주해야 하는 서른 즈음의 주부 서영 역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당시 배용준이 욘사마열풍의 절정에 있던 때라 한국과 일본에서 <외출>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서, 개봉 즈음엔 거의 모든 이목이 배용준에게 집중됐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주목은 손예진에게 돌아갔습니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고 곧 그로 인해 알게 된 인수(배용준)와 사랑에 빠지는 서영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관계에 뒷걸음치기보다 그 감정을 그대로 따르는 여자입니다. 격한 끓는점 없이 차분히 감정선을 유지하는 <외출> 특유의 무드에서 손예진은 한순간도 흐려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성과로써 그녀는 한국의 여배우들이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갈 때 진통을 겪는 고질적인 문제를 능히 통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드라마 <연애시대>로 가뿐히 그 한계를 넘었습니다.


헤어날 수 없는 그녀|
<아내가 결혼했다>의 인아
주로 그늘진 역할로 칭찬을 받았고, 영화들이 인기를 얻지 못해 묻혔지만, 손예진은 활동 초기부터 사랑스러움을 전면에 어필하는 역할 또한 잘 소화했습니다. 그때 손예진은 하나같이 연애하는여자였죠. <아내가 결혼했다>(2008)는 그 재능이 만발한 영화라 할 만합니다.

아내가 결혼을? 맞아요, 인아(손예진)는 덕훈(김주혁)과 결혼했지만 자유롭게 연애를 즐기고, 다른 애인과도 결혼을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덕훈은 인아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넘치는 애교는 물론 헌책과 축구를 좋아하는 면모까지, 가히 남자의 판타지를 전부 빨아들이는 매력의 소유자니까요. 손예진은 고도의 능청스러움으로 상상에나 붙일 만한 분방한 관계가 가능하리라고 설득합니다. (, 저는 설득 당했어요.) 이 작품으로 그녀는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그 연기력을 널리 인정받게 됩니다.


조용한 액션 히로인|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여월

근작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과 한중합작영화 <나쁜놈은 죽는다>(2015)에서는 액션까지 도전했습니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여월은 과묵한 여해적입니다. 코미디와 액션을 같이 끌어안은 영화에서 김남길, 유해진, 오달수, 박철민 등 남자 배우들이 웃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손예진은 묵묵한 채 가장 높이 가장 빠르게 움직이죠.

한국영화, 특히 철저히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액션영화에서 드문 여해적 캐릭터는 분명 낯선 영역이었습니다. 해외에서 레퍼런스를 찾기에도 마땅치 않은 가운데, 손예진은 아직은 익숙지 않은 몸 쓰는 연기에 얽매이기보다 자신의 특기인 감정연기로써 여월을 정면돌파 했습니다. 정확한 판단 덕분에 여월은 강인한 전사의 이미지와 동시에 장사정(김남길)에게 연정을 느끼는 로맨스까지 아우를 수 있는 히로인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상한, 너무 이상한 엄마|
<비밀은 없다>의 연홍


이경미 감독은 양미숙(공효진), 서종희(서우), 이유리(황우슬혜) 등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여성 캐릭터들이 가득한 <미쓰 홍당무>로 열렬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언뜻 선거를 앞둔 유력 정치인의 아내이자 딸을 잃어버린 엄마라는, 정치 스릴러에 흔히 등장할 법한 평범한 캐릭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손예진이 분한 연홍은 양미숙, 서종희, 이유리의 합보다 뒤지지 않는 이상함으로 똘똘 뭉친 여자입니다.

연홍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이미지를 가볍게 허물어버린다는 점에서 <마더>(2009)의 어머니(김혜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슬픔을 넘어 광기로 뻗어나가는 극단적인 감정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평소엔 나긋나긋 표준어를 쓰다가도 다급할 땐 걸진 전라도 사투리(손예진이 대구 출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유려합니다)를 내뱉고, 딸의 장례식장에서 화려하기 그지 없는 블라우스를 입고 건조한 표정으로 분노를 곱씹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협박한답시고 자신의 손등을 가위로 찔러버리는 것도 차라리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연홍은 결국 (딸 민진의 말처럼) "멍청하기 때문에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손예진은 연홍이라는 캐릭터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한치의 아쉬움 없이 풀어놓으면서 자신의 배우 커리어의 정점에 다다랐다는 갈채를 받았습니다.


손예진은 특정 장르와 캐릭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외연을 넓혀 왔습니다. 배우 스스로는 연기를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손예진의 용감한 행보는 분명 한국 여배우의 역할 더 나아가 한국의 여성상을 넓힐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만들었습니다. 손예진이 연기할 여자는 과연 누구일지 궁금해지는 이유입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