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을 보러 갔을 당시 도저히 집중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봐도 여자 주인공이 익숙한데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 얼마나 답답했느냐면, 영화가 끝나자마자 쿠키 영상 유무를 검색하는 관객 사이에서 혼자 배우 정보를 찾느라 바빴다. 그리고 확인하자마자 홀로 (조용히) 탄성을 질렀다. "블랙미러의 그 배우잖아!"

내가 기억하는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붉은 머리에 분홍색이 잘 어울리는 배우, 사랑스럽지만 망가질 땐 철저히 망가질 줄 아는 배우였다. 하지만 <쥬라기 월드>에서는 보다 냉철하고 거리감 있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물론 배우란 직업이 이미지 변신에 능숙해야 하지만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의 변신은 유달리 특별하게 느껴진다. 어떤 배역이든지 간에 미워할 수가 없다. 극장에서 자주 만나고 싶은 배우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의 필모그래피를 소개한다.


<스파이더맨 3>

'그웬 스테이시' 역

<스파이더맨 3>의 '그웬 스테이시'

많은 사람들이 '그웬 스테이시'하면 엠마 스톤을 생각하지만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먼저 연기한 건 사실. 초록빛 눈동자가 매력적이여서인지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의 '그웬 스테이시'도 원작 캐릭터와 싱크로율이 높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훌륭한 캐스팅이라는 평이 무색하게도 분량은 서글픈 수준이었다. 코믹스 속 '그웬 스테이시'는 분명 '스파이더맨'의 첫사랑이자 가장 인기가 많은 여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샘 레이미의 영화에선 조연 수준에 불과한 것. <스파이더맨 3>에서 그녀가 활약하기만을 기다린 원작 팬들의 많은 공분을 산 건 당연한 결과다. 그웬을 그저 "'스파이더맨'과 '메리제인'의 러브라인을 돋보이게 해주는 삼각관계용 캐릭터로 쓰인 거 아니냐"라는 반응이 많았다. 비록 캐릭터의 분량이 아쉽지만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연기한 '그웬 스테이시'만은 빛났다.


<헬프>

'힐리 홀브룩' 역

<헬프>의 '힐리 홀브룩'

영화 <헬프>는 1960년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미국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흑인과 백인의 화장실이 따로 있는 건 당연하고 흑인 여성은 가정부라는 이유로 백인의 아이만 돌봐야 했던 시대.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비열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악역 '힐리 홀브룩' 역을 맡았다. '힐리 홀브룩'은 잭슨 주니어 연맹의 회장으로 인종차별을 당연시하지만 다양한 활동으로 모은 기부금을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브라이스는 끊임없이 비열한 행동을 하는 '힐리' 역을 두고 "처음에는 힐리란 캐릭터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공감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리허설을 하는 동안 '아, 힐리는 불안정한 성격에 공포를 잘 느끼는, 그저 무지한 인간이구나'라고 깨닫고 나서부터 연기하기 수월했"다고 밝혔다. 캐릭터를 해석하는 데에 뛰어난 브라이스는 실감 나는 악당 연기를 보여주어 그해 MTV 시상식에서 최고의 악당상 후보에 올랐다.


<블랙 미러 3, 1화 '추락'>

'레이시' 역

<블랙 미러>의 '레이시'

서론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브라이스가 연기한 <블랙 미러 3>의 '레이시'는 좋은 의미로 충격이었다. SNS 평점이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디스토피아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레이시'의 모습이 솔직하고 처절하기 때문. 자신의 평점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자존심을 구겨서라도 타인의 시선에 맞추는 현대인들. 사건이 진행될수록 감정이 극에 치달은 '레이시'의 감정 연기가 무서울 만큼 현실적이다. <블랙 미러>는 SF 장르이지만 신랄한 현대 풍자극이기도 하다. <블랙미러>의 제작자인 찰리 브루커는 이 에피소드를 "현대의 불확실성에 대한 파스텔풍의 장난스러운 풍자극"이라 표현했다. 실제로 인물이 처한 상황이 잔인한 데에 비해 드라마 속 세상은 온통 파스텔톤이라 더욱 살벌하고 극적이다.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이 에피소드 속 모든 장면에 등장했을 만큼 열연을 펼쳤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극 중에서 누군가 '레이시'의 몸매에 대해 흉보는 장면이 있어 일부러 체중을 14kg 늘렸다고. '추락'은 브라이스의 연기력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스토리의 완성도마저 뛰어난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넷플릭스를 구독한다면 시청을 추천한다.


<만달로리안>

감독

<만달로리안>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연기뿐만 아니라 연출에도 재능 있다. 그녀의 아버지가 감독 론 하워드이기 때문일까. 이미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의 감독을 맡은 바 있는 아버지의 행보를 따라 브라이스도 <만달로리안> 감독을 맡았다. 시즌 1-4화와 2-11화, <북 오브 보바펫> 챕터 5 그리고 앞으로 제작될 <만달로리안> 시즌 3까지. 사실 뉴욕대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이미 할리우드 배우로서 입지를 다진 브라이스가 감독 일마저 능숙한 건 놀랄 일이 아니다.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연출한 <만달로리안> 시즌 3은 내년 2월에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클레어 디어링' 역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쥬라기 월드> 속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감독 콜린 트레보로우는 <쥬라기 월드>가 개봉하기 전부터 "사실 <쥬라기 월드> 시리즈는 '클레어 디어링'의 이야기"라 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워커홀릭이 된 '클레어'의 성장기를 그려낸 트릴로지라고. 그도 그럴 게 첫 번째 영화에서 '클레어'는 공룡을 상품 취급하고 자신의 조카들이 쥬라기 월드에 놀러 와도 긴 시간을 내주지 않을 만큼 일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공룡의 죽음 앞에서 그 또한 생명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후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에선 동물을 사랑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되찾아 공룡 보호 단체를 설립한다. 하이힐을 신은 채 뛰어다녀도 발목 한 번 안 꺾이던 '클레어'가 부츠를 신고 본격적으로 뛰어다니게 된 것. 이번 영화에선 '클레어'가 어떤 성장을 보여줄지 기대되지 않나.

<쥬라기 월드>

<쥬라기 월드>의 피날레에서 티라노사우루스를 유인하는 '클레어'의 뒷모습을 보면 감독의 말이 실감 난다. 살아남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지시만 내리던 '클레어'가 공룡의 영역에 직접 발을 들인 순간. 이후로도 그녀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공룡을 살리기 위해 뛰어다닌다. 브라이스의 넓은 연기 폭이 '클레어' 성장기를 돋보이게끔 만든다.

트릴로지의 마지막 영화라고 해서 아직 슬퍼하긴 이르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총괄 제작자 프랭크 마셜이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을 끝으로 안주하지 않"을 거라며 "쥬라기 세계에서 더 많은 것을 할" 거라고 밝혔다. 쥬라기 시리즈가 더 제작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연기하는 '클레어'가 그 시리즈에 다시 등장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희망찬 소식이지 않을까. 현재 전국 극장에서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을 만나볼 수 있다.


씨네플레이 김다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