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밀밀>

1998년, 작은누나가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2주쯤 됐을 무렵의 일이다. 장례절차가 모두 끝나고 49재 기도에 들어간 지 일주일쯤 됐을 때였는데, 나는 죄책감과 슬픔에 젖어 방안에 틀어박혀 문을 닫고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갑작스레 떠나고 나면 남은 사람들은 온통 죄책감에 시달린다. 작은누나가 전날 같이 보자고 빌려왔던 <첨밀밀> 비디오테이프를 “내일 보자”고 미루지 말고 그냥 같이 봤었어야 했는데, 그러면 적어도 마지막으로 영화 한 편은 같이 본 추억을 가지고 보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엄마가 말한 대로 집 비우지 말고 엄마 올 때까지 잘 지키고 있었으면 누나는 지금쯤 살아있었겠지? 내가 집을 나서기 전에 누나가 마지막으로 내밀었던 과자를 같이 나눠 먹었더라면 어땠을까? 같이 먹다가 웃으면서 또 하루를 살아볼 이유를 찾아줄 수 있지 않았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문 밖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리놀륨 장판 바닥에 고무 바퀴가 찌이익 하고 끌리는 소리, 팔로 바퀴를 밀 때 축을 따라 알루미늄 바퀴가 회전하는 소리, 규칙적으로 힘을 주어 바퀴를 미는 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평생을 들었던 소리, 작은누나가 휠체어를 운전하는 소리였다. 아주 멀리서도 알아들을 수 있고, 다른 소리와 헷갈릴 리도 없는 그 소리. 친한 사람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듯, 나는 작은누나의 친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도 작은누나의 휠체어 소리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내 방문 밖에서 들리던 소리는 바로 그 소리였다.

놀라운 동시에 두려웠다. 나는 누나 생전에 누나를 그렇게까지 잘 챙긴 동생이 아니었다. 핑계는 많았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끊임없이 우울증을 앓으며 자살시도를 반복한 작은누나를 뜯어 말리고 살리는 일에 조금 지쳐 있었고, 한번은 가스레인지 코크를 열어둔 누나에게 “엄마는 무슨 죄가 있어서 같이 데려가려고 했냐”며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나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방문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누나가 날 나무라기 위해서 온 거면 어쩌지? 그러는 사이 휠체어 소리는 내 방문 바로 앞까지 와서 멈춰섰다. 나는 숨조차 죽인 채 침대 위에 정좌하고 앉아 방문만 노려봤다. 그렇게 5분 정도 침묵이 흘렀을까, 휠체어 소리는 다시 방향을 돌려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용기내서 방문을 열었다면 어땠을까. 누나에 대한 미안함과 두려움으로 입관하는 것도 못 봤던 내가, 어쩌면 누나와 제대로 작별할 수 있는 기회는 아니었을까. 누나는 날 용서해주려고 마지막으로 한번 나를 찾아왔던 게 아닐까.


솔직해지자. 나는 극장판 <신과 함께>(2017~2018) 시리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동명 원작 웹툰 팬이자 처음 감독으로 내정되었다가 예술적 견해차이로 하차한 김태용 감독의 팬으로서, 영화판 <신과 함께>를 볼 때면 자꾸 위화감이 든다. 주호민 작가의 정겨운 그림체로 표현된 원작의 지옥도가 극장판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어 엄청난 스펙터클로 구현된 걸 보는 게 적잖이 어색했던 것이다. 김태용 감독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나 <가족의 탄생>(2006), <만추>(2011) 등에서 보여준 마술적 리얼리즘 연출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신과 함께>라는 원작 텍스트를 어떻게 꾸릴지도 많이 보고 싶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건 신파였다. 첫 편인 <신과 함께: 죄와 벌>(2017)이 특히 그렇다. 원작에서는 그저 착하게 살아왔을 뿐인 김자홍은, 극장판에서는 찢어지는 가난과 설움이라는 가족 드라마를 숨긴 남자가 된다. 그 위에 자식에게 자신이 짐이 될 것을 걱정해 어린 자식의 살모 시도를 모르는 척 자는 척 넘어갔던 어머니(예수정)의 속사정이 얹어지고,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의 꿈속에 등장해 이 모든 이야기를 울면서 풀어내는 막내 수홍(김동욱)의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죽은 뒤에 마지막 인사를 남기겠다고 어머니의 꿈 속에 나타난 수홍과, 두 아들을 모두 잃은 어머니의 한 없는 사랑과 용서, 이 모든 게 한데 뒤섞인 눈물바다의 클라이막스. 그 탓에 나는 이 영화를 오래 못마땅해했다.

그럼에도 가끔 <신과 함께: 죄와 벌> 생각을 하는 건, 떠난 사람이 산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다는 설정 때문이다. 우리는 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묘지나 납골묘에 꽃을 가져가고, 수목장 등의 방식으로 떠난 사람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 할까? 그 모든 건 사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나 또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지만, 여전히 사후에 인간의 영혼이 존재해 산 사람들을 굽어볼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 모든 의례를 볼 수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 모든 장례식과 꽃과 매장 방식과 추도사와 의미들은, 산 사람들이 떠난 사람과의 이별을 납득하고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몸부림인 셈이다. (설령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떠난 사람의 영혼도 이걸 보고 위로 받을 것이다”라고 믿는 산 사람들의 신념을 위한 의례라는 건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남겨진 사람의 꿈 속에 떠난 이들이 나온다면, 그게 정말 산 사람의 무의식이 만든 환상이 아니라 떠난 이들이 꿈을 통해 현몽하는 거라면, 그건 아마 산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맞을 것이다. 나 없이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해, 내가 없는 빈 자리의 허무함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해, 떠난 이들이 꿈에 나오는 건 그런 이유겠지.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이 생과 사라는 경계를 넘어, 꿈 속에서나마 만나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예를 갖춰 작별할 수 있다는 믿음. 내가 <신과 함께: 죄와 벌>을 끝끝내 부정하지 못한 건, 그 믿음이 영상으로 구현된 걸 봤기 때문이다. 그걸 픽션의 형태로나마 봤다는 건 적잖이 위안이 되는 일이다. 그래, 아무리 신파라고 흉을 보더라도, 나 또한 내심 그게 진짜이기를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주 오랜만에, 나는 OTT 서비스를 열고 <신과 함께: 죄와 벌>을 찾아본다. 여전히 스펙터클은 어색하고, 갑작스레 눈물을 쏟는 대목은 당황스럽다. 그럼에도 저 신파 장면은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세서 매번 무너져 내린다. 우리가 생과 사를 넘어서도 연결되고 서로 용서하고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떠난 사람들은 떠난 뒤에도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있다는 믿음, 그들의 사랑 속에서 남겨진 우리가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는 믿음. 그게 진짜였으면 하는 그 바람이 충족되는 장면이니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