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 소설 ‘위험한 관계’는 할리우드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영화화 된 작품 중 하나다. 수 차례 영화화가 된 ‘인기 아이템’이지만 플롯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사교계를 군림하는 한 커플이 가장 순수한 타겟을 정해서 유혹하고, 성공하는 즉시 잔인하게 버리는 내기를 벌인다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 이다. 예상과는 다르게 주인공이 이 악랄한 게임에서 참된 사랑을 발견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주 관심사가 오롯이 먹고 마시고, 하룻밤을 보내는 것에 있다는 사실과 이들의 관계가 대부분 친족 같은 예민한 관계로 설정이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1782년에 쓰인 원작소설은 끊임없이 하룻밤 상대를 쫓는 메르떼이유 후작 부인과 그녀의 친척, 발몽을 라이벌 구도로 설정하고, 두 인물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함으로써 귀족정치의 부패를 첨예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까지 로저 바딤(1959), 스티븐 프리어스(1988), 이재용(2003), 허진호(2012)를 포함한 프랑스와 영국, 한국 등 동서양 전역의 유명 감독들이 각자의 버전을 내놓았다. 이 리메이크들의 다국적 스펙트럼을 보면 원작이 얼마나 매력적인 프로젝트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각 리메이크의 변주도 흥미롭다.

이재용 연출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예컨대 로저 컴블 연출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1999)은 원래의 배경을 현대의 맨하탄 상류 고등학교로 바꾸고 이재용 버전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는 조선시대 양반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 오리지널 보다 조금 더 비극적인 엔딩을 택했다. 2005년에 방영된 오쿠무라 마사히코 감독의 일본 드라마 버전은 배경을 도쿄의 상류층으로, 게임에 가담하는 중심 캐릭터를 오리지널의 남녀 캐릭터에서 여성 주부 캐릭터로 바꿨다.

7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위험한 관계> (라쉘 스위사)에서도 많은 문화적, 시대적 변주가 일어난다. 배경은 현대의 프랑스 상류학교로, 사교계는 인스타그램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중심 캐릭터인 커플은 귀족이 아닌 SNS에서 활약하는 10대 스타들이다.

2022년 버전의 <위험한 관계>

바닷가에 위치한 부촌, ‘비아리츠’에서는 ‘트리스탄’과 ‘바네사’가 호스트인 파티가 연일 열린다. 그들은 수백만의 팔로워를 보유한 인스타그램 셀럽이기도 하고, 오랜 연인이기도 하다. 화려한 외모와 엄청난 부를 가진 커플은 지루해 질 때 마다 게임을 벌이는데 각자 원하는 타깃을 골라 유혹한 후, 상대가 사랑에 빠지면 공개적으로 차버리는 것이다. 각자의 타겟을 찾던 중, 첫 사랑과 막 약혼을 한 ‘셀린’이 파리에서 비아리츠 고등학교로 전학을 오고 트리스탄은 셀린을 다음 타깃으로 삼는다.

이번 리메이크를 포함해 앞서 언급한 각색 영화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주인공 커플, 혹은 그 중에서도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더 실리는 남성 캐릭터 (오리지널 소설에서의 발몽)가 각 문화가, 혹은 당대가 정의하는 ‘미남’의 전형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발몽 캐릭터를 통해 각 시대에서 어필되는 (매력적인) 남성성을 읽을 수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콜린 퍼스가 연기한 밀로스 포먼 버전의 ‘발몽’은 원작의 관능적이고 마초적인 캐릭터와는 반대로, 섬세하고 자상하다. 배용준이 보여준 이재용 버전의 ‘조원’은 도발적이지만 순정적이다. 2022년 버전의 발몽, 트리스탄 역시 ‘조원’과 ‘발몽’ 만큼이나 '미남'이지만 더 강조되는 것은 그의 취향이다. 트리스탄은 인정받는 서퍼(surfer)이자 힙합을 좋아하는 아마츄어 래퍼다. 다시 말해, 외모가 아닌 그가 즐기는 것들로 ‘미남 캐릭터’가 설정되는 것이다. SNS 시대에 맞는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부분이다.

2022년 버전의 발몽, 트리스탄

결과적으로 이번 2022년 버전의 중추는 SNS라는 플랫폼이다. 인스타그램은 각 캐릭터를 정의하는 척도로 (팔로워 수, 아이디, 사진들) 쓰이고, 캐릭터의 만남과 갈등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루어진다. 앞선 영화들에서 캐릭터들의 사건이 무도회와 티 파티에서 이루어진 걸 감안했을 때, 공상과학영화 급으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반한 변화라면 영화의 엔딩이다. 원작 소설과 <발몽>을 예로 들면, 발몽이 진정한 사랑을 찾았음에도 게임을 공모했던 두 남녀 캐릭터들에게는 벌이 내려진다. 발몽은 자신이 유혹한 여자의 남자와 결투 중 죽임을 당하고, 메르떼이유 부인은 사교계에서 퇴출된다.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도 ‘조원‘의 죽음을 통해 엔딩의 비극은 반복된다.

2022년 <위험한 관계>에서 역시 트리스탄은 셀린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바네사는 트리스탄의 배신을 알아채고 그녀가 몰래 침대에서 찍은 둘의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한다. 이를 통해 셀린은 악랄한 게임의 전모를 알게 된다. 그러나 셀린은 용서를 구하는 트리스탄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화해의 키스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라이브로 퍼져 나가고 셀린은 인스타그램의 스타가 된다.

레벨의 차이가 있음에도 앞선 리메이크들이 원작의 사회풍자와 비판을 비극적 엔딩을 통해 어느 정도 수용했다면 2022년 버전은 비판적 메시지를 제외하고 해피 엔딩을 표방한다. 다만, 이야기의 중심과 담론을 SNS의 일상으로 재설정하는 선동적이고도 시기 적절한 선택을 했음에도 이를 크게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실망스럽다. 인스타그램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선한 캐릭터에게 주는 포상이자 사회적 상승을 실현해주는 이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리메이크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상류층 고등학교에서 펼쳐질 만한 스펙터클을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또 다른 넷플릭스 시리즈인 <블링 엠파이어>의 하이틴 영화 버전이랄까. 또한 최근 넷플릭스 작품들의 경향을 보여주듯이, 다양한 인종과 성정체성을 캐릭터에 포함시켰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중 아시안 캐릭터이자 게이인 ‘타오’가 학교 공연에서 ‘보그 댄스 (퀴어 커뮤니티에서 만들어진 춤; 잡지, ‘보그’ 속 모델의 포즈를 춤으로 만든 스타일) ’를 추고 기립 박수를 받는 것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1990년에 제작 된 전설의 다큐멘터리, <파리 이즈 버닝> (Paris is Burning; 제니 리빙스턴)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보그 시퀀스로 남을 정도로 화려하고 전복적이다. 이번 작품을 최고의 리메이크로 꼽지는 않더라도 <위험한 관계>의 또 다른 각색을 기다리는 이유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