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링크에서 첫번째 리뷰를 먼저 보실 것을 권합니다.
사랑의 저변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45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김수영 '죄와 벌'>
6•25사변 당시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아내는 가장 친한 친구인 이종구와 살림을 차려 살고 있었다. 수영은 아내에게 본래 자리로 와주길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이종구가 사망한 후에야 아내는 돌아왔다. 김수영은 아내를 증오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 (1954) 을 보고 극장에서 나오는 길에 아내를 때리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제목인 <죄와 벌>에서 스스로의 죄를 인지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죄만큼 부끄러웠던 것은 아내에게 느낀 미안함보다 두고 온 우산과, 지인이 목격했는지에 대한 염려가 앞서는 것이었다. 아내를 언제든 죽일 정도로 미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겨우 그 정도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살인을 할 만용도, 사랑하는 아내를 버릴 마음도 없는 그저 범인이었다.
증오는 사랑과 한 몸이었다. 저 시를 쓴 후에 김수영은 다시는 아내를 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함께 모든 사랑도 식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인이 아니라 두고 온 우산이나 자신의 체면을 생각한다. 보통의 사람이 하는 사랑의 밀도는 끽해야 경범죄 수준인 것이다. 자신이 희생당하는 각오, 즉 붕괴되는 결의 정도는 품은 사랑이어야 비로소 살인에 비할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의 레퍼런스
박찬욱 감독은 알려진대로 엄청난 영화광이다. 그의 영화는 1차원적 흉내내기같은 오마주나 패러디가 아니라 완벽하게 해체한 다음, 재조립하는 과정 자체를 창조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위의 시는 행간이 말하는 감정의 밀도와 극 중에서 일컫는 '붕괴'의 개념이 흡사한 심상을 간직하고 있어 개인적 시각에서 레퍼런스로 끌어 와 봤다 - 실제로 연출자가 이 작품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해보며.
연출자는 인터뷰에서 72년에 발표된 가요 '안개'에서 영화속 상상의 도시인 이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하는 한국영화 <안개> (1967)로 연결시켰다. 안갯속 가상의 도시인 무진을 배경으로 한 공허한 정서를 기본적으로 삼은 것이다.
그외에도 사랑의 아린 감정을 묘사할 때 영원한 참고서인 <밀회> (1945)를 살펴볼 수 있으며, 썸이 오가는 사이에서 범죄가 끼어든다는 면에서 <빗 속의 방문객> (1970), <도살자> (1969)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연출자의 영원한 사랑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1958)과 <이창>(1954)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영화들 속엔 인물이 여럿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한 명 인것 처럼 레퍼런스 또한 단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헤어질 결심>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핵심적인 하나의 그것을 찾으라면,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1971)을 꼽을 것 같다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해준은 서래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마침내"를 주고 받고 그녀를 바라보는 해준의 롱테이크 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된다. 아내인 정안과는 먹지 않는 '아무거나'가 아닌 초밥을 서래와는 먹는다. 해준은 고인의 보고를 받는 방식 (말이 아닌 사진) 이나 식사후 처리 과정이 자신과 척척 들어맞으며 심지어 고질병인 불면증도 고쳐주는 서래에게 더욱 빠져든다.
반면에 서래는 해준이 현대인 치고는 품위가 있어 호감은 갈 지언정 함부로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을 했을 때, 당신의 사랑은 끝나게 되었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자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는 타이밍에 그녀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심지어 서래는 그 장소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요소를 위해 (경찰이 용의자를 도왔다는 정황) 해준의 말을 녹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붕괴 됐다는 해준의 고백은 다름아닌 사랑이었고, 이것은 서래의 마음을 때린다. 이 장면은 붕괴된 해준이 떠나간다는 현실과 맞물려 곱고 서정적으로 연출되어 서래가 받는 타격감은 곱절을 업고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 지점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 배경에 깔리는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라는 음악이다. 이 음악은 앞서 소개한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도 비슷한 정서적 위치에서 활용된다.
영화는 독일의 대문호가 베니스에서 아름다운 소년을 목격하고, 미의 진짜 의미를 깨달으며 소년대신 전염병에 희생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엄숙하고 합리적인 예술만을 좇는 주인공은 타치오라는 미소년을 보면서 진정 아름다운 길로 가는 길을 깨닫게 된다. 깨우침은 죽음과 함께 찾아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가는 길임을 가르쳐 준다. 그 일깨움이란 사랑이 없는 삶, 감성이 메마르고 의무만 남아있고 감격이 없는 삶은 아름다움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곡을 작곡한 구스타프 말러 또한 19세 연하의 알마 쉰들러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붕괴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곡의 제목은 아다지에토 Adagietto인데 이것은 아다지오(Adagio:매우 느리게) 보다 조금 빠르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악보를 보면 매우 느리게 Sehr langsam 라고 표기되어 있다. 곡의 타이틀과 빠르기를 지시한 단어가 출발부터 충돌함으로써 해준처럼 인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사랑의 혼돈스러운 경험을 창작으로 치환한 것이다.
이 교향곡은 <헤어질 결심>의 붕괴 시퀀스 이외에도 후반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바로 서래가 녹색(혹은 파란) 원피스를 불태운 흔적을 발견한 해준이, 그녀가 증거를 은닉했다며 경찰서로 이송하는 장면이다. 해준은 자신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파괴된 과거를 추스리며 담담하게 그녀를 압송한다. 그러나 사실 둘은 차안에서 내밀한 옛이야기를 나눈다. 흘러 넘치는 감정을 해준 또한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미 사랑이 시작되어 농익은 서래가 차분해 보인다. 이포로 전근한 뒤에도 여전히 불면증을 앓고 있는 해준은 그렇게 그녀와 같은 수갑을 차고 이동하는 짧은 시간동안 숙면을 한다. 그렇게 기대 앉은 한 쌍의 모습 위로 아다지에토가 흐른다. 어딘지 모르게 포근한 이 장면에서 둘의 화양연화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이번에는 곡의 원래 이미지 답게 부드럽고 섬세한 장면을 위해 꼼꼼하게 세공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만약 <헤어질 결심>을 n차 관람할 생각이 있다면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아다지에토'가 지닌 보편의 감정을 느끼고 갈 것을 권한다. 블록버스터 시즌을 맞이하여 상영관은 줄어들고 있지만, 이 영화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는 더 어려워 질지도 모르겠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