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설명할 수 없음으로써 설명된다. 그 모순적 특질은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사랑에서 찾는 이유다. 또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오로지 사랑 때문에 움직이는 인물에게 마음이 가는 까닭이기도 하다.
라이언 고슬링은 수많은 슬픈 사랑의 주인공이었다. 늘 완벽히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회색지대에서 사랑을 지키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의 사랑에 대해 주절주절 논한 적은 거의 없다. 그저 눈으로 말하고, 행동으로 옮길 따름이었다.
<라라랜드>의 세바스찬과 <블루 발렌타인>의 딘, <노트북>의 노아가 사람들을 울린 건 이들이 사랑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흔한 권태와 경제적 곤란과 사회적 계층의 차이 같은 것들을 극복하든 그러지 못했든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이 캐릭터들의 묵묵한 사랑에는 표정이 없어 더 애절하다. 비슷하게 늘 회색지대에서 '덤덤하게' 존재해 온 애덤 드라이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덤덤함'은 이미 세상을 받아들여 평정 상태에 이른 자의 것이고, '묵묵함'은 거기서 나름대로의 투쟁을 하려는 자의 보이지 않는 발버둥을 수식한다. 그리고 이 중 묵묵함은 몹시 짠하다.
<드라이브>와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에서는 라이언 고슬링의 묵묵함이 하나의 장르로 완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돋보이는 <드라이브>에서 라이언 고슬링은 극 중 이름조차 갖지 못한 '드라이버'를 연기했다. 영화는 스피드를 만끽하는 것 말고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던 드라이버가 이웃의 아이린(캐리 멀리건)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도시의 익명성 뒤에 숨어 사는 드라이버는 도로의 유령이었다. 빛과 어둠이 정확히 반씩 섞인 회색지대의 균형을 깨뜨린 건 아이린이다. 아이린은 드라이버가 강도들을 실어 나르는 어둠 속보다 스턴트맨으로 빛 속을 거닐고 싶도록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옅은 미소 말고는 그 마음을 전한 적이 없다. 아이린이 자신에게 남편이 있었고 그가 감옥에서 돌아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그 순간에도.
그 후 아이린으로부터 멀어지려 했지만 드라이버를 움직이게 하는 건 여전히, 오로지 아이린이었다. 드라이버가 아이린의 남편이 벌이려는 범죄 행위에 조력하고, 끝내는 목숨을 거는 건 그저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남편 탓에 갱에게 쫓기는 아이린과 함께 도망치지 않는다. 그 어떤 사랑의 화답도 보상도 받은 적이 없지만 '죽어도 좋다'라는 열렬한 감정을 묵묵하게 쏟아낸다. 그러면서 설명할 수 없음으로써 설명되는 사랑을 온전히 이해시킨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의 루크는 <드라이브>의 드라이버와 매우 비슷하다. 그는 드라이버보다 건실함이 모자란 모터사이클 스턴트맨으로, 1년 전 잠깐 만났다가 헤어진 로미나(에바 멘데스)가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루크는 여기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묵묵히 사랑이라는 동력으로 바꾼다. 정착과 가족처럼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사랑하게 된 루크는 드라이버와 마찬가지로 어떤 확신도 주지 못하는 상황에 부나방처럼 몸을 던진다. 그 끝엔 일말의 통속적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루크는 사랑으로 살았을 것이다.
라이언 고슬링은 최신작인 넷플릭스 <그레이 맨>에서 조금 독특한 사랑을 한다. 자신과 동생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죽여 감옥에 갇힌 코트 젠트리는 CIA의 비밀 프로젝트 시에라 프로그램에 스카우트되며 '식스'로 거듭난다. '악인을 제거하기 위해 악인을 이용한다'라는, 이미 많이 본 듯한 콘셉트다.
식스는 그저 앞으로 30년은 더 교도소에 있어야 했던 삶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며 CIA의 지시에 따르며 지냈다. 표현은 안 하지만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 그보다 더 한 수라장으로 던져 놓은 피츠(빌리 밥 손튼)도 아버지처럼 여긴다. 영화에선 식스를 회색지대, '그레이 존'의 '그레이 맨'이라 부른다.
생존을 위해 그레이 존에 머무르던 식스가 그곳을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된 건 매우 사소한 감정의 침입 탓이었다. 타깃 주변에 갑자기 등장한 어린 아이 때문에 겨눴던 총을 거두고, 결국 1:1 대결 중 자신의 손에 죽게 된 타깃으로부터 부탁 같은 마지막 말을 듣는 식스. 그가 회색지대의 고요함을 깨고 CIA에 반기를 든 배경엔 본능 같은 연민이 있었다.
죽이는 입장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입장으로의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투쟁하는 것 역시 피츠와 그의 손녀 클레어(줄리아 버터스)를 향한 인간적 애정 때문이다. 영화 <아저씨>의 차태식(원빈)이 소미(김새론)을 목숨 바쳐 지키려는 그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레이 맨>의 식스도 마찬가지다. 가장 차가운 얼굴을 한 주제에 제일 뜨거운 감정으로 움직이는 식스를,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모든 캐릭터들의 그 사랑들을 머리보다 가슴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회색지대에 서 있는 라이언 고슬링의 캐릭터들을 '매번 비슷한'이라는 말 대신 '장르'라고 일컫고 싶은 이유는 분명하다. 아무도 아니었던 '그레이 맨'들은 결국 사랑으로 색깔을 입는다. 회색지대에 줄곧 머무르기 보다는 거기서 기어코 빠져 나오고 마는 묵묵한 움직임들은 전부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 묵묵함은 식스가 교도소에서 팔에 '시지프스'라는 타투를 새긴 연유와 궤를 같이 한다. 신들을 기만한 죄로 영원히 산 정상으로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의 사후는 인간의 덧없는 삶과 동일하다. 하지만 정상까지 올려 놓으면 다시 산 아래로 떨어지는 돌을, 시지프스는 계속 굴린다. 그냥 돌에 깔려 죽기를 택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라이언 고슬링의 '그레이 맨'들은 회색지대를 벗어나 사랑을 지키려 한 탓에 영원히 돌을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이는 형벌이면서 그들의 고귀한 의지가 발현된 삶이기도 하다. '그레이 맨'들의 묵묵한 돌 굴리기는 그래서 아름답다. 언제나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따라 붙는 사랑에 결국 찾아오고 마는 해답처럼.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