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선언>에서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실장 역을 맡은 박해준

8월 3일 <비상선언>이 개봉했다. 초호화 출연진에 '항공 재난'이란 스케일 큰 재난 영화로 화제를 모은 이번 영화, 특히 재난 상황의 당사자들만이 아닌 외부의 상황도 상세하게 그리며 차별화를 노렸다. <비상선언>에서 비중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극중 대통령 캐릭터도 등장해 재난을 사회적 현상으로 그린 것이 유독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지난 8일에는 수도권에 역대급 폭우가 쏟아지며 안타까운 침수 피해가 잇따르기도 했다. 한국 재난 영화에서 대통령, 혹은 장관이나 청와대 실장 같은 고위 관료들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앞에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줬으며, 위기대처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한국 재난영화 속 대통령 및 그에 준하는 관료 캐릭터를 모아봤다.


판도라

김명민, 대통령 강석호

<판도라>는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재난을 그렸다. 처음엔 일상적인 풍경으로 시작해 재난이 일어나고, 관련자들의 갈등과 감정선을 보여주며 마지막에 어떻게든 재난을 막는 결말에 다다르는, 정석적인 전개로 영화를 이어간다. 다만 체르노빌 사고나 후쿠시마 사고등 전 세계 역사에서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얼마나 큰 잔향을 남기는 이미 명백하게 알려졌기에 영화에서도 대통령을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택했다.

<판도라>는 강재혁(김남길)을 비롯한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발전소 밖에서 사고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대립각을 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둥으로 삼는다. 여기에서 대통령을 맡은 배우는 김명민으로, 그는 극중 유능하고 젊은 강석호 대통령을 맡았다. 김명민이란 배우만 봐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강석호는 이른바 대중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대통령에 가깝다. 물론 그가 직접 사고를 막고 그런 건 아니지만(그건 유능보다 전지전능이다) 적어도 사고를 어쭙잖게 덮거나 하지 않고 자신의 무능함과 당사자들의 상실감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바른생활 이미지의 김명민에게 어울리는 캐릭터이고, 김명민 또한 늘 그랬듯 훌륭한 연기로 보답하다. 김명민은 촬영하면서 사고 현장 촬영장을 한 번도 못 갔다며 다른 배우들에게 송구스럽다는 발언도 했다.


감기

차인표, 대통령

코로나19 팬데믹이 도래하고, 사람들에게 재소환당한 영화 <감기>도 마찬가지. 유능하면서 이상적이기까지 한 대통령이 등장한다. 이쪽은 이런 이상적인 대통령을 진짜 판타지라고 인정하기라도 하듯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 적어도 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은 대통령, 그것으로 끝이다. 이 역할을 맡은 건 (역시 바른생활 이미지이자 실제로 아주 올바르게 살고 있는) 차인표. 잠깐 <감기>의 이야기를 짚어보자면, 밀입국자들을 통해 분당에 변종 바이러스가 퍼진다는 내용. 갑작스러운 질병의 확산으로 정부 측은 분당을 격리하기에 이르고, 분당에 격리된 사람들과 그 외부의 사람들이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여기서 차인표의 대통령은 분당 격리 구역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국무총리(김기현), 미국 총책임자 스나이더(보리스 스타웃)와 대립한다. 격리를 철저히 하고 불가피하면 폭격까지 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미국 측과 그럼에도 우리나라 국민을 가장 우선시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그야말로 영화답다 싶기도. 이 정도면 대통령이라기보다 현대에 안착한 수호신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감기>가 여러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군상극임에도 '정상인 인물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한편으론 그나마 이 대통령이 있어서 영화가 균형을 유지하지 않았나 싶다.


백두산

최광일, 대통령

재난 영화지만 재난 영화 했을 때 쉽게 떠오르지 않는 <백두산>에도 대통령이 등장한다. <백두산>은 활화산이지만 긴 세월동안 대폭발이 없어서 휴화산처럼 취급받던 백두산이 갑자기 대폭발을 일으켜 한반도에 어마무시한 재난 상황이 발생하고, 이를 막기 위해 남한의 특전사와 북한 출신 남한 스파이가 협력해 이를 저지한다는 내용. 아무래도 재난 상황 자체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 전반이 북한에 침투한 인원들을 주로 그리기 때문에 어쩐지 재난 영화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영화에서는 백두산 대폭발로 인한 대지진을 꽤 화려하게 그리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 영화에서 대통령 역으로 출연한 건 <1987> 안유 계장, <경이로운 소문> 심명휘 역으로 유명한 최광일. 역시 크레딧 상에는 특별한 이름 없이 대통령으로만 표기돼있다. 다른 재난 영화 속 대통령처럼 정치적 딜레마를 겪지만, 그나마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어쩌면 할 수밖에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도 작중 아주 작은 확률에도 끝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절차를 밟는 것을 보면 속물이라거나 무능한 대통령은 결코 아니다. 사실 <백두산>은 대통령보다 그 바로 아래에서 국무를 수행하는 민정수석이 주역으로 그린다. 그 민정수석은 전혜진이 맡아 연기했다. 아주 낮은 확률에도 끝내 대통령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임명한 민정수석답게 극중 강단 있게 묘사된다.


터널

김해숙, 김영자 국민안전처 장관

앞선 영화 속 대통령이 선하고 이상적인 리더상을 그렸다면, <터널>은 대통령은 아니지만 나라님들을 통째로 풍자하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만들었다. <터널>은 도로의 터널이 갑자기 무너져 그 안에 고립된 정수(하정우)를 중심으로 재난을 그려나간다. 단순히 재난물이라기보다 일종의 생존물이기도 한데, 갇힌 상황에서 어떻게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마련하며 외부로 연락하려는 정수의 고군분투가 워낙 생생하게 그려지기 때문.

이렇게 고립된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김해숙이 연기한 국민안전처 장관 김영자는 그야말로 '분노유발자'다. 전체적으로 상황에 대한 이해도 좋지 않고, 곳곳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정치적 행동이 역력해 도통 정이 안 가기 때문. 감독이 직접 언급한, 그리고 영화 곳곳에 암시되는 특정 사건을 풍자하기 위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사고가 인재가 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나 할까.


따로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대통령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재난 영화가 있다. <연가시>는 숙주의 뇌를 조종하는 변종 기생충 연가시가 퍼진 대한민국을 그린다. 영화는 대체로 연가시의 진실에 다가가는 화학 박사 임재혁(김명민)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이 등장하기는 한다. 다만 이 작품을 다른 작품처럼 따로 상세히 다루지 않는 건, 대통령을 연기한 배우 최일화가 성폭행 혐의로 연예계에서 사실상 퇴출된 인물이기 때문. 이외에 할리우드 영화에선 대통령이 재난 영화에 등장하는 경우는(심지어 직접 해결하는 경우마저) 좀 있으니 그것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겠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