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스가(家)

얼마 전, 문 전 대통령 경남 양산 사저 앞 욕설 시위를 주도해온 극우 유튜버 누나의 대통령실 홍보수석실 근무가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극우 유튜버의 가족이 7급 공무원으로 채용되었다는 사실과 현직 대통령의 홍보수석실이 전직 대통령을 향한 욕설 시위의 배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많은 이들이 참담함을 토로했다. 비선 실세, 정치인 가족, 측근과 관련된 각종 특혜들, 도를 넘는 극우 정치인들의 발언 등 한국 정치의 크고 작은 장면들도 동시에 소환됐다.

유행병, 치솟는 기름값, 악화되는 세계 경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최근 발생한 전 세계적 어려움이 근래의 한국 정치 상황과 포개지며 '세상은 계속 나빠지고만 있는 것 같다.'라는 손쉬운 비관이 고개를 든다. <이어즈앤이어즈>의 주인공 대니얼도 비슷한 감상에 빠진 듯하다. 갓 태어난 조카를 안아 든 그는 축복의 말을 건네는 대신 씁쓸한 어조로 읊조린다.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지금도 이렇게 안 좋은데 넌 어떻겠니?'


왓챠플레이에서 서비스하는 BBC 6부작 드라마 〈이어즈앤이어즈(Years and Years)>는 2019년부터 2034년까지 근미래를 그리며 세계 정치의 우경화를 풍자한다. 배경은 브렉시트 후의 영국. 드라마는 기업가 출신 정치신인 비비언 룩(엠마 톰슨)이 '사이다'를 빙자한 혐오 발언으로 인기몰이를 하며 마침내 총리 자리를 꿰차는 15년의 시간 동안 라이언스가(家)의 가족사를 비춘다. <이어즈앤이어즈>는 2019년 방영 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원숭이 독감 유행 등 몇 개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며 많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주는 최고의 공포는 기시감을 유발하는 우경화에 있다.

톡 쏘는 사이다. 이만 썩을 뿐. 혐오의 정치를 멈춰라

비비언 룩(엠마 톰슨)에게서 몇몇 한국 정치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드라마는 비비언 룩이 시사 토크쇼에 나와 난민 문제에 대해 "I don't give a ****" 이라고 도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난민 문제는 관심 없고 내 집 앞 쓰레기만 제때 치워지면 바랄 게 없다는 정치신인의 거친 발언에 대중은 경악한다. 하지만 난민, 치안, 경제 등 복잡한 문제를 눈앞의 사소한 생활 불편을 꼬집는 발언으로 치환하는 그녀의 간단명료함에 대중들은 시간이 갈수록 매료된다.

자기 부고 기사 빼고는 좋은 기사든 나쁜 기사든 언론에 노출 되면 좋다는 격언은 영국 정치인에게도 통하는 것일까. 비비언 룩의 관종짓은 더 대담해지고, 혐오 발언은 수위를 높여간다. 드라마 속 비비안 룩은 '철의 여인' 대처와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을 합성한 인물 같지만 그녀를 찾으러 멀리 영국이나 미국으로 갈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 꼴, 누가 만든 거냐?

지난 대선을 기억하는가? 유력 후보들에 오른 리더들은 마초적 이미지를 앞 세워 '입 대포'를 쏴댔다. 그들은 상대 진영과 후보자를 윽박지르고 무력화시킬 거친 캐릭터를 앞세워 '사이다','버럭 선생', '코카콜라' 등의 이미지를 구축했고, 사람들은 그에 환호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 가짜 통쾌함에 투표했다. 또한 지난 대선은 '여혐'을 공식 선거전략으로 쓴 초유의 선거로 기록됐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라고 천명한 몇몇 정치인은 정치의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여성 혐오를 방패 삼아 남녀를 그리고 세대를 갈라치기 했고, 그 전략은 성공했다.

도시를 여성에 비유하며 도시도 '매일 씻고 다듬고 피트니스도 하고 이래가지고 자기를 다듬어 줘야' 한다고 말하는 유력 정치인, 설거지는 하늘이 정해 놓은 여성의 일이라는 현직 광역단체장, 여성을 출산 기계 취급하는 정치인 등 정치권의 오랜 여성 혐오의 역사에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조합, 세월호 유가족 대상 혐오 발언까지 더해지니 혐오에 기반한 달변은 이제 한국 정치인이 가져야 될 필수 덕목이 된 듯하다.

글로브상의 최고 영예로 꼽히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메릴 스트립.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 강력한 사람이 굴욕감을 주려는 본능을 드러내면, 그건 모든 사람의 삶에 스며든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가를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톡 쏘는 사이다는 우리의 이만 썩게 할 뿐, 현실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2017년 배우 메릴 스트립이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입장과 장애인 조롱을 비판하며 지적했듯이, 정치인 등 공인의 발언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가를 주는 것'과 같다. 극우 유튜버 수십 명에게 보내진 대통령 취임식 초청장은 예비 혐오가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황금 티켓과 다름없다. 트럼프 당선 직후 혐오 범죄가 유의미하게 증가했다는 사실과 영국의 2016년 국민투표 이후 인종과 종교를 이유로 한 혐오 범죄가 유의미하게 증가되었다는 보고는 혐오 정치의 파급력을 실감케 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계급배반 투표의 아이러니

어느 정치인의 노인 투표권 박탈 발언과 겹쳐진다

'아이큐 70 이하 시민의 선거권을 박탈하겠습니다'라는 비상식적인 언행에도 대중은 망해가는 세상을 바꾸는 데 혁신적인 인물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비비언 룩에게 한 표를 던진다. 그렇다면 그에게 기꺼이 표를 던진 이들은 누구인가? 지킬 것이 많은 부자들, 보수화된 노년층 유권자 등이 떠오르지만, 드라마 속 비비언 룩의 열혈 지지자는 놀랍게도 라이언스가의 딸인 로지다.

라이언스가의 딸이자 휠체어 장애인 로지는 그의 계급과 배치되는 비비안 룩을 지지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논란이 된 발언 '저소득층, 저학력층 가운데 보수 정당 지지가 많다'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 발언에 몇몇 정치인들은 '국민 분열, 편가르기'라고 공격했지만, 이런 행동이 새롭거나 특이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의 공격 방향은 잘못됐다. 가난한 이들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 성향의 정당보다 기득권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계급배반 투표'는 사실이며, 정치학의 오래된 화두다. 드라마 속 계급배반 투표의 대가는 혹독하다. 로지는 자신이 사는 지역이 ‘레드존(저가 주택 단지)’으로 지정되면서 신분증 없이는 이동조차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빅토르(막심 밸드리)와 대니앨(러셀 토비)

좌파와 우파의 엘리트 연합 정치

드라마는 대니얼과 빅토르의 이야기를 통해 '정당 배반'의 현실도 보여준다. 성소수자 탄압을 피해 스페인에서의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대니얼과 빅토르. 하지만 스페인 극좌 정당 '누에바 에스페란사'가 쿠데타를 일으켜 시민권이 없는 사람을 모두 추방하기로 결정하면서 그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이 장면은 오늘날 좌파 정당도 불평등 해소를 바라는 계급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풍자한다. 올 초 막대한 정치적 사회적 비용을 들여 바뀐 선거제도를 거대 양당의 집권으로 맞바꿔치기한 '위성 정당' 촌극이 떠오른다. 오늘날 좌파 정당을 대변하는 집단은 고학력의 지적 엘리트들이며,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부유층, 고소득 엘리트들이다. 이들 엘리트 연합 정치 속 성소수자, 장애인들의 주변화를 드라마는 탁월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자초한 디스토피아

<이어즈앤이어즈>

20세기 동안 서구 사회가 이룩했다고 생각했던 이성, 민주주의, 관용, 다양성, 세계질서 등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8년 뒤면 2030년이다. 드라마 속 2030년은 난민, 이민자, 반정부 성향의 정치인들을 감금하는 정부 수용소 '어스트와일'을 라이언스가(家)의 자식들이 맞서 무력화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런 만화적 전복은 현실에 없다.

전복이 없다고 비관하자는 것은 아니다. 비관으로 일관하는 것은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하고 상황의 직시를 방해할 뿐이다. 오히려 <이어즈앤이어즈>의 뮤리엘이 말한 것처럼 작금의 현실은 '정확히 우리 모두가 만든 세상'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행동해야 한다. 혐오 정치를 통해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인지,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제대로 일하는 정당은 어딘지 살펴봐야 한다. 지난한 과정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는 한 땀 한 땀 새겨나가는 더딘 진보만 가능하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