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언제쯤 시작될까?”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의 20대는 온통 ‘언젠가 진짜로 시작될 삶’을 갈망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물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고, 진정한 첫걸음을 알려줄 계시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의학에서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또 아마추어 사진가로 진로를 변경하는 격변의 시기를 통과하며, 율리에의 머리카락 색깔과 애인도 여러 차례 변했다. 그러다 서른을 앞두고 그녀는 “넌 아직 어리니까 우리 만남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어, 넌 자신을 찾아갈 시간이 필요해”라고 말하는 40대 남자, 악셀(안데스 다니엘슨 리)을 사랑하게 된다.

짓궂은 아이러니일까. 그런데 더 얄궂은 일은 그다음에 일어난다. 악셀과의 가장 달콤한 시간이 지나고 한껏 마음이 쓸쓸해진 그녀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바람은 안 돼요.” “나쁜 짓이죠.” 하지만 상대의 팔을 깨무는 건 바람일까? 땀 냄새를 맡는 건? 가장 내밀한 비밀을 고백하는 건? 나른한 취기와 흥분으로 물든 율리에와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의 한여름 밤 은밀한 놀이는 영화의 제목을 다시금 곱씹게 한다. 그러나 그즈음 영화는 오해와 막장의 숲을 헤매는 대신 율리에의 오랜 고민을 일깨운다. 진짜 삶은 아직 저 멀리에 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노르웨이 출신 영화감독 요아킴 트리에의 신작이자, 그의 데뷔작인 <리프라이즈>(2006)와 <오슬로, 8월 31일>(2011)을 잇는 오슬로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다. 방황하고 표류하는 청년들의 근거지였던 오슬로는 30대에 접어들고도 여전히 흔들리는 한 여성이 열성적으로 사랑하고 걷고 후회하는 무대로 영화 속에 담겼다. 잔뜩 찡그린 청년들을 비추던 무심한 빛은 조금 더 따스해졌고, 화면의 채도 역시 높아졌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분류에 걸맞게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럽다. 영화의 매력은 삶에 관한 거창한 고뇌와 통찰이 아니라, 일상의 희로애락 순간을 풍성하게 담아냈다는 점에 있다. 율리에와 악셀, 율리에와 에이빈드가 사랑에 빠지고 다투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모든 장면은 그저 예쁘게만 꾸며진 영상 클립을 넘어서는 생생한 힘으로 약동한다. 내면을 한참 뒤져야 꺼낼 수 있는 자괴감과 상처, 막을 틈 없이 새어 나오는 빛바랜 욕망과 솔직한 두려움이 너무 진하지 않은 농도로 스며있는 덕이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몰입을 높이는 강점인 한편, 그 모든 말을 함축하는 주인공의 복잡미묘한 표정 역시 영화의 독특한 색깔을 만든다.

사랑, 최악, 진정한 삶. 한 번에 엮어내기엔 다소 어려워 보이는 세 요소는 ‘사랑의 관점을 통해 말하는 실존적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감독의 시도 안에서 무리 없이 만난다. 무엇보다 요아킴 트리에에게 사랑은 “우리가 사는 매우 이성적인 세상에서 많은 사람이 찾기 어려워하는 장소, 통제력의 부족과 친밀감 사이의 협상에 노출되어있는 유일한 장소”다. 이는 사랑이 가장 나쁜 버전의 나를 드러내고 또 마주할 수 있는 드문 장소라는 뜻일 테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구름 위와 땅굴 속을 어지러이 오가며 인생을 대하는 자신의 관점마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좋든 싫든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고,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내일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율리에와 악셀의 이별에 덧붙여지는 내레이터의 언급은 쓰라린 사실을 일깨운다. “그들의 오랜 논쟁 때문이었다. 둘 다 잘 알고 있는 것들. 타이밍이 나빴다. 인생의 다른 단계에서 서로를 만났고, 각자 다른 걸 원했다.” 이미 방황의 시기는 떠나왔다고 여기는 악셀은 이제 다음 단계로 가고 싶다. 그는 아이를 원한다. 율리에는 여전히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잘 모른다. 다만 아직은 모르는 그대로도 괜찮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이 충분히 논쟁하고 결론을 낼 때까지 멈춰주지 않는다. 율리에가 말 그대로 ‘세상을 얼려놓고’ 에이빈드를 만나러 달려가는 로맨틱한 장면은 현실과 사랑 사이의 마찰을 역으로 드러낸다. 현실의 사랑은 풍파 속 돛단배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돛단배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대신, 파도에 부서지고 길을 잃어도 괜찮다고 토닥이는 영화다. 감독의 기조에 따르면 괜찮은 건 당연히 흔들리는 사랑뿐 아니라, 사람과 삶이기도 하다. “나는 15년 동안 길을 잃은 사람들, 삶이 떠들썩한 사람들을 사랑해왔다. 위대한 드라마가 일어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주인공들은 줄곧 자기를 알고 인생을 알기 위해 최악의 길로 가보는 사람들이었다.

그 여정을 웅대한 서사시가 아니라 삽화적 에세이로 정리하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총 12장으로 이뤄진 챕터식 구성을 취한다. 전체적으로는 시간 순서를 따라 흘러가지만, ‘다른 사람들’, ‘바람피우기’, ‘율리에의 자아도취적 곡예’처럼 율리에의 특정한 순간에 돋보기를 들이대며 소주제를 길어낸다. 이러한 전략은 캐릭터의 매력과 좋은 상성 효과를 낸다. 율리에는 ‘#미투 시대 속 오럴 섹스’라는 ‘이지적이지만 흥분되는’ 글을 써내는 똑똑한 여성이면서, 아빠와의 문제는 되도록 회피하려는 소극적인 딸이고, 헤어진 뒤에도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괴짜 연인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연애와 섹스에 대한 열망이 추가된 프란시스(<프란시스 하>), 시선의 주인이 된 썸머(<500일의 썸머>)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흥미로운 인물인 율리에를 연기한 레나테 레인스베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율리에는 ‘우리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던 요아킴 트리에의 인물들과 같은 궤에 놓인다. 죽음과 너무 가까웠던 오슬로 시리즈의 청년들 이야기만은 아니다. <라우더 댄 밤즈>(2015)의 막내아들은 미디어의 폭력적 영향이 살갗으로 스며드는 시대에 괴로운 성장통을 앓았고, <델마>(2017)의 주인공은 억압된 자아의 사악한 힘을 깨달으며 성년의 길목에 섰다. 율리에는 벌써 성인이 된 지 오래지만, 어른이 되는 법은 알지 못하는 듯 보인다.

이는 단순히 철부지 어른을 이르는 수사가 아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는 아주 옅은 사회학적 함의가 드리워져 있다. 악셀에게 다음 단계란 명백히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지만, 영화가 종종 일깨우듯 이러한 관념 자체가 세대 차이를 드러내는 요소다. 율리에와 동년배인 에이빈드는 기후학자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다. 한편, 제4장 ‘우리만의 가족’은 서른 살 생일을 맞은 율리에의 모계 조상을 훑으며, 그녀들이 전통적 결혼제도 아래서 서른 살에 얼마나 많은 자식을 낳았는지 이야기한다. 어른이 되는 낡은 통과의례가 북극의 빙하처럼 가라앉고 있는 시대에, 어쨌거나 어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이처럼 커다란 질문 안에서 샘솟은 우리 시대의 러브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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