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니까 애들하고 멀어지는 거, 그게 정말 섭섭하다. 학교 다닐 때가 좋았는데.”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2001)의 주인공은 교문 밖 세상에서 각자 고단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스무 살 아이들이었다.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미래를 향한 불안함은 간혹 하나로 뒤섞이며 얼굴을 찌푸리게 했지만, 가끔 친구들과 있을 때면 다행히 대체 불가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래도 이들은 여전히 풍진 세상 속에 있기에, 서로 절박하게 물어야만 했다. “넌 앞으로 뭐할 거야?”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만들어진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물 언저리의 아이들이 따로 또 함께 겪는 그러한 멀미를 저만의 방식으로 다루는 영화다.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 것 같았던 친구들은 저마다의 상황에 적응하는 게 우선이라 상대에게 쉽게 소홀해지고, 안개처럼 희뿌연 앞날을 가늠해보는 일은 언제나 청춘을 풀 죽게 만든다. 누구나 공감할 법한 소재로 영화를 찍으며 이재은, 임지선 두 감독이 품었던 작은 포부는 ‘기름기 없는 담백한 작품’ 만들기. 과연 <성적표의 김민영>은 가파른 서사와 폭발하는 감정 없이도 성년의 문턱에 선 여자아이들의 시간을 풍성하게 그려내 보인다.
영화는 삼행시 클럽의 엄숙한 해체로 문을 연다. 삼총사 정희(김주아), 민영(윤아정), 수산나(손다현)는 수능을 100일 앞두고 창작의 욕구를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삼삼오오 모여 배드민턴을 치거나, 야심한 시각에 컵라면을 먹고, 엉뚱한 생각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고3의 일상 역시 점차 갈무리돼간다. 독특한 취향과 ‘흑역사’를 기꺼이 나눴던 아이들은 이제 기숙사를 떠나 흩어진다. 정희는 동네 테니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민영은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며, 수산나는 외국으로 떠난다. 세 친구는 화상 채팅으로 삼행시 클럽을 이어가지만, 열과 성을 다하는 건 정희뿐이다. 예쁘게 차려입은 민영은 대학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듯하고, 순식간에 울적한 얼굴을 보여주는 수산나는 사랑의 슬픔에 빠진 눈치다. 민영과 수산나에겐 시간을 내어 모니터 앞에 앉는 게 점차 덜 중요한 일이 돼간다. 삼행시 클럽이 재개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경기 불황을 이유로 정희가 해고를 통보받을 즈음, 방학 때 서울에 머물게 됐다는 민영이 정희를 초대한다. 학창 시절 나눴던 사소한 대화를 기억하며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상경한 정희에게 민영은 퉁명스럽게 말한다. “영화나 보러 가자. 아무거나.” 게다가 받은 성적표가 맘에 안 드는지 민영은 온종일 난리다. 그렇게 마주해버리고 만 관계의 틈새는 좀처럼 메워지지 않고, 둘의 하루는 계속 삐걱댄다.
인물들이 굳이 말이나 표정으로 속내를 표현하려 들지 않는 <성적표의 김민영>에서 주로 눈길을 붙드는 건 배경을 가득 채우는 디테일이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활공간을 거의 그대로 잘라다 붙인 것 같다. 정희와 민영이 함께 쓰는 기숙사 방엔 큼직한 책상과 침대뿐 아니라 창틀에 마구잡이로 올려놓은 물건들에까지 먼지가 정답게 쌓여있다. 너덜너덜한 문제집과 책상 구석에 자리 잡은 건강 음료는 아이들의 수험생활을 말없이 증명한다. 정희 집 식탁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장아찌 담긴 통들, 테니스장 사무실의 빛바랜 잡지들은 공간을 더 깊게 만드는 또다른 주역이다. <성적표의 김민영>의 미술은 소박한 맥시멀리즘을 지향한다. 면면이 화려하진 않지만, 생활의 흔적이 묻은 소품들이 화면을 빽빽이 채운다. 영화가 그러모으는 에피소드 역시 빼곡하긴 마찬가지다. 햇반으로 경단을 만들어보고, 장기자랑이 걱정돼 백 텀블링을 연습하며, 물안경 끼고 자전거 탄 채 빗속을 질주하는 일화들은 정희와 민영의 고유한 추억이자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요소다. 이 영화에 유독 관객 각자의 기억을 소환하는 감상평이 많다는 건, 그 많은 디테일이 그저 자기만족 언저리에 머물지만은 않았다는 방증이다.
공감은 반짝이는 세부에만 스며드는 게 아니다. 대학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 정희, 편입을 준비하는 민영, 유학길에 오른 수산나의 상황 역시 폭넓은 동질감을 불러일으킨다. 발 딛고 선 곳은 각자 다르지만, 이들이 어렴풋이 느끼는 통증의 근원에는 ‘내가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이 은밀히 자리 잡고 있다. 아이들을 한데 묶어주던 교복이 사라진 자리는 외로움과 조바심이 채운다. 효율적 인간이 되라고 주문하는 세상,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에 엉거주춤 낀 채로, 조금은 붕 뜬 채로 스무 살 아이들은 각자 고군분투 중이다. 가고 싶지 않은 길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길 사이에서 이들은 남몰래 발을 구른다. 종종 사람 없는 숲길을 비추는 영화는 날 선 바람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주고 싶어 하는 것만 같은데, 정작 아이들은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없다. 이들은 의젓하고도 얄밉다. 학생이냐는 분식집 주인의 물음에 “아니요.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정희나, 아이돌 가수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접은 채 정희의 현실감각을 문제 삼는 민영은 남들의 동의를 구하려 애쓰는 대신 그저 눈을 꼭 감고 오늘을 감당 중이다. 서운함 대잔치였던 그날의 서울행에서 정희가 알게 된 건 그동안 결코 알 수 없던 민영의 쓸쓸한 시간이며, 민영 역시 지난날 얄미웠던 정희를 참아주고 견뎌줬다는 사실이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시트콤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리듬에 정서를 싣는다. 끝까지 소리치거나 통곡하지 않고, 화해하거나 박장대소하지 않는 인물 대신 과정이 일부 생략된 편집과 정적인 화면 구성이 웃음과 위로를 전한다. 영화는 사연과 사정을 구구히 설명하지 않으려 유독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럴수록 다음 장면이 주는 뜬금없는 재미와 활기가 반감되기는커녕 더욱 커진다. 마음속엔 하고픈 말이 많지만 멋쩍고 부끄러워 간혹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하는 그 또래 아이들 모습을 담아내기에 더없이 적절한 선택이다. 김병욱 연출의 SBS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한 에피소드를 직접 재현해 보이는 대목은 쾌활한 동시에 비범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성적표의 김민영>이 구축한 세상 속 인물들은 좀처럼 서로의 눈을 보지 않는다. 마주 보는 대신 나란히 앉아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모를 이야기를 중얼거린다. 얼굴 보고 해고를 전하는 게 미안하니 뒤돌아줄 수 있겠냐는 테니스장 주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카메라 또한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자칫 어색해 보일 수 있는 거리 설정이지만, <성적표의 김민영>에서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무심한 배려로 느껴진다. 맑고 단단한 얼굴로 중심을 잡는 김주아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보편적이고 특이한 성장담 하나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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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