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난 자주 중얼거리곤 했다. 왜 난 행복해질 수 없지. 그럴 법도 했다. 다섯 명이었던 가족이 서로와, 세상과, 삶과 불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3년 만에 두 명으로 줄어들었을 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인 줄 알았다. 성장하며 그게 턱도 없는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나보다 더 사나운 불행을 품고도 웃으며 견뎌온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뿌리 깊은 우울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원래 사람의 디폴트 상태는 ‘약간 우울한 상태’라고 하던가. 오랜 세월 만성 우울증을 앓아온 사람 입장으로는 ‘약간 우울한 상태’란 과연 무엇인지 짐작이 잘 안 간다. 그래도 그게 디폴트라고 하니, 아마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넋두리를 했으리라 넘겨짚는 수밖에. 왜 난 행복해질 수 없냐고, 삶의 난이도가 나에게만 더 높은 것 같다고.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막연한 행복을 찾아 어슬렁거리며 살고 있겠지. 끊이지 않는 경미한 우울을 견디며 하루를 살아 내신 여러분, 오늘 하루도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우울감이 대책 없이 밀려와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드는 날이면 일단 다 덮어두고 무조건 즐거운 일을 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선택은 스파이더맨이다. 몇 년 전까지는 토비 맥과이어와 키어스틴 던스트가 주연을 맡은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3부작을 꺼내어 돌려봤고, 몇 년 전부터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를 찾는다. 거미줄을 따라 두 시간 정도 울고 웃고 떠들다 보면, 우울했던 기분도 한결 나아진다.
왜 스파이더맨이냐고? 불행하고 우울하기로는 슈퍼히어로 세계에서 1순위를 다투는 청년 피터 파커가, 몇 번을 넘어져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나는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쓰러져도 반드시 다시 일어나지.”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일어나 끝끝내 뉴욕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낸다는 이야기 아닌가. 까칠하고 성격 급하기로는 세계 최고인 뉴요커들조차 그런 스파이더맨 앞에서는 마음이 말랑해져서 가끔씩은 스파이디 대신 빌런들과 맞서 싸우려 드는, 우울하지만 어딘가 희망이 살아있는 이야기. 마냥 희망차기만 한 작품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같아서 귀에 거슬리고, 세상을 다 비관하는 작품은 그 어둠이 버겁다. 그런 점에서 스파이더맨의 뉴욕은, 내가 이해하고 이입하기 쉬운 세계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주인공 마일즈 모랄레스(샤메익 무어)가 겪는 일련의 시련도 피터에 못지않다. 물론 마일즈는 피터 파커보다 덜 불행한 소년이다. 일단 자신을 사랑해주는 양친이 모두 살아 있는 것만 봐도 그렇고, 영재 학교에 다니면서 특별히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걸 봐도 그렇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 거미에 물린 이후부터 며칠 사이에 그의 삶은 전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불행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는 눈 앞에서 피터 파커(크리스 파인)이 죽는 걸 목격하고, 그가 죽는 걸 지켜만 볼 뿐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또 다시 자신의 실수로 피터 파커가 남기고 간 USB를 부숴 먹고, 자신의 눈앞에서 삼촌 애런(마허샬라 알리)이 죽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고…
유전자 조작 거미에 물렸다 뿐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는 데다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인 마일즈가 무슨 수를 쓸 수 있었으랴. 하지만 어린 마일즈는 그게 자신이 무능한 탓인 것만 같다. 그렇다고 스파이더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찰관 아빠 제프(브라이언 타이리 헨리)에게 그런 사정을 다 말할 수도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주변 사람들이 다칠까 정체를 숨겨야 하는 삶이라는 걸 생각하면, 애초에 누구에게 편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책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 마일즈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멀티버스를 넘어 마일즈가 살고 있는 세계로 넘어온 다른 세계 속의 스파이더피플 뿐이다. 피터 B. 파커(제이크 존슨)와 스파이더맨 느와르(니콜라스 케이지)는 벤 삼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스파이더 그웬(헤일리 스타인펠드)은 절친인 자기 세계의 피터 파커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페니 파커(키미코 글렌)는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이야기한다. “너만 힘든 게 아니야. 우리도 다 힘들어.”라고 다그치는 게 아니라, “네 마음 우리가 알아. 우리도 그랬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어서 마일즈는 조금이나마 상심을 이겨낼 수 있었다.
영화의 말미, 마일즈는 관객들에게 말한다. 누구나 이 마스크를 쓸 수 있어. 너도 이 마스크를 쓸 수 있어. 글쎄, 잘 모르겠다. 아무나 유전자 조작 거미에게 물리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다음에 나오는 말만큼은 언제나 싱긋 웃으면서 듣게 된다. 언제든 혼자라고 느껴질 땐,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기억한다는 말. 마일즈는 자신보다 먼저 아팠고 자신과 비슷하게 아팠으며 앞으로도 아마 자신과 같은 상황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살아갈 스파이더피플들을 떠올린다. 비록 그게 다른 우주라 하더라도, 어딘가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 “네 마음 내가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라고 말해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울과 고통은 줄어든다. 누군가와 나누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덜 외롭고 덜 우울해질 수 있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개중에도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를 고르게 되는 모양이다. 우리가 슈퍼히어로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슈퍼히어로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지만, 세상 어딘가에 내 마음 알아줄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동원해서라도 내 외로움과 발가락이 닮은 존재를 찾고 싶어서,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다는 낙관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내가 가장 불행한 존재인 것만 같아 슬퍼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위로하고 싶어서. 그러니 오늘 하루 내내 크고 작은 우울과 씨름하며 버텨 오신 수고 많을 여러분께도 조심스레 권해본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를 보시라고. 내가 당신의 우울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 어딘가에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분명 존재한다고. 그러니, 당신은 더는 혼자가 아니라고.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