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만 기다리던 초등학교 4학년생에게도 대한민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1997년 12월은 잊히지 않는 충격으로 남았다. IMF는 '국제통화기금'이고,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약자라는 건 그 시절의 상식이었다. 정크 본드, 화의, 적대적 M&A(인수합병), 무디스와 스탠다드 앤드 푸어스 같은 낯선 단어들이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꽂히던 나날이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이 비유를 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치렀던 사회 시험의 보기였다. '외환 위기와 가장 관련 깊은 말을 고르시오'. 이 문제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까닭은 답을 맞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돈 좀 벌기 시작했다고 흥청망청 사치부터 했다'라는 말의 문학적 표현으로 사용됐고, 그 주어는 국민이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이처럼 1997년의 외환 위기는 발 빠르게 교과서에 담겼지만 그 원인으로 지목된 건 국민들의 '외제품' 선호와 무분별한 해외 여행이었다. 고도 성장 시기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린 건 국가나 기업들이 아닌 국민들이라는 주장은 꽤 오랫동안 진실의 탈을 쓰고 세상을 떠돌았다. 플라스틱 빨대가 수산업보다 더 해양을 오염시킨다는 믿음처럼 말이다.

외환 위기 후 십수 년이 흐르고 나서야 교과서에서 이 같은 오류가 정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1997년 대우그룹에서 명예퇴직 막차를 탔던 아버지의 나이와 비슷해졌고 또 한 번의 경제 위기를 마주한 지금, 30대 후반의 아버지가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말들을 듣는다. 이를테면 최근 기획재정부가 '무지출 챌린지'를 독려한다고 만들어 배포했다가 뭇매를 맞고 삭제한 게시물이 그 대표적 예다. '햄버거 VS 수제버거, 당신의 소비 트렌드는?' 같은 카드뉴스가 개인의 어떤 소비 취향을 아주 간단히 죄악시하며 '무지출 챌린지'의 근본적 발생 원인을 지운다. 그 위로 국민들이 외제차 타고 해외여행 가서 외환 위기가 왔다는 주장이 겹쳐 보인다.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시작된 대규모 양적완화는 '강제 종료'되듯 끝났다. 인재(人災)였던 1997년 외환 위기나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영향을 아직까지 받고는 있지만, 지금의 금융 위기가 그때와 같은 모습은 아니다. 역병과 전쟁, 기후 위기까지 겹쳤다. 실물경제가 거의 박살난 상태에서 벌어지는 인플레이션은 이제 겨우 시작된 수준이다. '제2의 IMF 사태', '국가부도의 날 임박' 같은 비관론이 오가는 건, 위기의 원인이 같지 않더라도 흐름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는 한국이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화하기 직전 일주일이 담겼다. 단순 과거 회상 용도가 아닌 주요 사건으로 외환 위기를 다룬 첫 작품이다. 영화는 빚을 내서 그 빚으로 또 빚을 지는 식의 과잉유동성으로 굴러가는 경제 체제가 신용의 사슬이 끊기는 순간 붕괴하는 모습을 1997년 한국의 풍경으로 직유한다.

2018년 개봉 당시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국가부도의 날>은 외환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무능하고 욕심 많은 관료들에게 떠넘기는 데 그친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 금융 위기의 시발점이 된 태국 바트화 폭락과 성장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던 시기의 정경 유착, 외국 투자 세력이나 주변국들의 움직임 등 복합적 서사들을 최소화한다. 때문에 이야기는 '그럼에도 나라 망하는 꼴은 볼 수 없는 열혈 공무원'과 '자본에 더 많은 자유를 허하는 나라를 위해 판을 한 번 엎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공무원'의 선악 구도로 납작해진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국가부도의 날>이 정의감으로 행동하는 열혈 공무원으로 묘사한 인물은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이다. 박대영(조우진)을 비롯한 경제 관료들은 그의 반대편에 서 있으며, 무능하거나 기회주의자이거나 시장경제 열혈 신봉자다. 이미 선과 악으로 나뉜 구도를 더 공고히 할 목적으로, 한시현이 대하는 영화 속 남성들은 필요 이상의 여성 비하를 자행한다. 한시현의 옳은 말이 약자인 탓에 묵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그를 약자화하며 감정 이입의 불균형을 조성하는 식이다. 이 때문에 한시현이 IMF 구제금융 신청의 대안으로 모라토리엄 선언을 내놓는 황당한 설정에도 힘이 실리고 만다. 영화 말미 갑수(허준호)와의 반전 아닌 반전과, 그로 인해 당시 한국 경제만큼 붕괴해 버린 한시현 캐릭터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외환위기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됐던 종합금융사 직원 윤종학(유아인)의 '한탕' 스토리는 영화의 완성도를 해치는 결정적 요소다. 국가부도의 날이 오리란 예측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투자자를 모아 환투기로 큰 돈을 벌겠다고 나서는 설정이 역겹게 느껴질지언정 이해가 되지 않을 리가. 1997년에도 2008년에도, 심지어 2020년에도 그런 사람들은 늘 존재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원화 가치가 폭락해 이익을 보게 되자 기뻐하는 투자자(류덕환)의 뺨을 후려치는 윤종학. "돈 벌었다고 좋아하지 마"라는 그의 일갈은 뺨 맞은 투자자도 보는 사람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런 행동이 죄책감 탓일 거라고 애써 흐린눈을 하고 나면 더 황당한 대목이 나온다. 투자자들과 함께 채무자의 집을 찾아간 윤종학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주검과 마주한다. 어서 경찰에 신고하고 자리를 뜨자는 투자자에게 윤종학은 말한다. "내가 왜 나가. 이제 여기 내 집인데."

지독한 배금주의자인지 돈 대신 시스템을 손아귀에 넣겠다며 모두를 내려다 보는 중2병 환자인지, 아니면 그저 촉은 좋은데 화가 많은 사람인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윤종학이라는 인물의 감정선은 널을 뛴다. 다만 윤종학이 환투기 성공 이후 본격적으로 국가부도에 배팅하는 모습이 팬데믹 이후 투자자들을 울리고 웃겼던 '곱버스'를 연상케 한다는 점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환율은 오르고 주가는 떨어져야, 즉 나라가 망해야 돈을 버는 투자의 역사 역시 유구하다는 뜻이니까.

영화 <국가부도의 날>

내외적 완성도의 미진함에도 <국가부도의 날>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갑자기 '이제 아무도 믿지 말고 모든 걸 의심하라'라는 당혹스런 결론을 내놓더라도, 영화는 경제주권을 뺏긴 나라의 굴욕을 처음으로 가감없이 그려냈다. 이와 더불어 왜 한국이 준비 없이 신자유주의에 노출됐으며, 현재 어떤 결과가 도출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모든 걸 차치하고, 영화를 끝까지 봤다면 외환 보유고가 국가의 신용과 경제의 안정을 좌지우지한다는 당연한 사실만은 알아갈 수 있다.

1997년 말, 한국은 원달러 환율 800원 선을 유지하기 위해 1주에 20억 달러를 썼다.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대응에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쳤다. 3년 만에 IMF에 빌린 돈을 다 갚고 대외적 신용을 회복했지만, 국민이 국가를 다시 믿을 수 있게 됐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1달러가 1450원 가까이 올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치다. 그리고 지난달 28일,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액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기획재정부는 "환율변동 요인이 역외가 아닌 국내에 있다"라고 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 사상 최악의 무역 적자, 주요 통화 가치 급락보다는 국내 기업이나 국민의 달러 사재기가 원인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이 말에 '신용도'를 매기는 건 각자의 몫이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