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시드니 포이티에는 흑인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윌리엄 에드먼드 배럿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릴리즈 어브 더 필드> (Lilies of the Field) 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포이티에는 이 작품에서 수녀들에게 새로운 예배실을 지어주는 방랑 노동자, ‘호머’로 등장한다. <릴리즈 어브 더 필드>로 그는 아카데미 뿐 아니라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 작가 조합 남우주연상 등 유수의 영화제와 영화상을 휩쓸었다.

[시드니 포이티에]

짐 크로우 (Jim Crow) 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시대에서 포이티에가 미국뿐 아닌 세계 각지에서 남우주연 부문에 노미네이션이 되거나 수상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지만 그가 이뤄낸 ‘최초’는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의 주연을 맡은 첫 흑인배우이자,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작품 (<스터 크레이지> Stir Crazy, 1980) 의 첫 흑인 감독이었다. 나아가 흑인배우로서는 처음으로 폴 뉴먼과 바바라 스트라이젠드 같은 백인 배우들과 협업하여 배우들의 창조적 권력을 보장하기 위한 영화사, 퍼스트 아티스트 (First Artist)를 만들기도 했다.

['퍼스트 아티스트'를 창립한 폴 뉴먼, 바바라 스트라이젠드, 시드니 포이티에 (왼쪽부터)

이외에도 기술 불가한 만큼 넘치는 레거시를 남긴 시드니 포이티에의 삶은 최근에 공개 된 애플 티비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드니> (레지널드 후들린, 2022) 를 통해 보여진다. <시드니>는 이전에 제작 되었던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포이티에를 기록하는 세 번째 다큐멘터리다. 바하마 출신의 포이티에는 15살에 미국 마이애미로 이주하지만 짐 크로우 법이 지배하는 플로리다를 견디지 못해 대도시인 뉴욕으로 다시 이주한다. 연기를 갈망했던 그는 뉴욕의 스테이지를 전전하며 서서히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마침내 그는 소극장에서 할리우드 영화로 드라마틱한 도약을 하는데 바로 조셉 멘키위츠 감독의 <노 웨이 아웃> (1950) 이라는 작품을 통해서다. 이 작품에서 포이티에는 흑인 배우들의 관습적인 역할, 예를 들어 노예나 집사, 혹은 가수가 아닌 의사, ‘루터 브룩스’ 역을 연기한다. 영화는 루터가 흑인 의사로서 겪는 갖은 차별과 박해를 그린다. 흑인 배우를 캐스팅 한 것은 이미 설정된 역할에 필요했던 선택이라고 해도 영화 경력이 없던 포이티에를 선택했다는 것은 파격적인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멘키위츠 감독은 포이티에가 가진 “감정적 강렬함과 우아함” 때문에 그를 선택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애플 티비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드니>]

다큐멘터리 <시드니> 역시 시드니 포이티에의 이미지와 커리어 루트가 당시 다른 흑인배우들과는 얼마나 다른 것이었는지 지적한다. 첫번째로 포이티에는 대다수의 흑인 배우들이 가진 액센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말투는 뉴스 앵커에 가까울 정도로 또박또박하고 세련되다. 바하마 출신인 시드니 포이티에는 거의 미국인 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로컬 엑센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배우를 꿈꾸기 시작한 이래로 그는 액센트를 고치기 위해 지난한 과정과 노력을 거친다. 어린 시절에 학교를 그만 둔 이유로 낮은 학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가 맡은 수 많은 역할 중에 대부분은 의사나 변호사, 선생님 등 고위직 캐릭터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구사하는 우아한 말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두번째, 수 많은 평론가와 영화감독들은 포이티에의 수려한 외모를 칭송한다. 예를 들어, 가디언지의 피터 브래드쇼는 포이티에를 ‘블랙 캐리 그랜트’라고 칭하면서 핸섬하고 우아하며 엄청난 자신감과 존재감을 지닌 배우라고 언급했다. 분명 포이티에 만의 독특한 출중함과 품위를 가진 배우라고 인정을 하면서도 굳이 백인 배우인 캐리 그란트에 빗대어 칭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전적으로 공감하는 대목이 있다면 바로 포이티에가 가진 ‘품위’ 그리고, ‘우아함’이다. 아마도 시드니 포이티에를 서술하는 문장 중 가장 자주 쓰이는 표현이 있다면 바로 ‘grace’ (우아함) 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과연 50년대와 60년대의 할리우드에서 우아하다는 수식어를 가졌던 흑인 배우가 몇 명이나 될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는 위험한 반문이기도 하다. 과연 포이티에가 우아함이나 존재감을 타고난 유일한 흑인 배우였을까? 그 하나만이 이런 고급스러운 표현에 마땅한 흑인 배우였을까? 물론 그는 뛰어난 연기실력과 수완을 가진 배우였지만 당시 관객들이 유일하게 한 명의 ‘우아한’ 흑인배우를 기억하고 있을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나머지 수 많은 흑인 배우들이 포이티에 처럼 할리우드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드니>는 그러한 할리우드 내에서의 포이티에의 독보적 존재 때문에 그가 흑인 커뮤니티에서 역설적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을 밝히기도 한다. 특히 민권운동이 거세지고 블랙 팬서당이 성장하면서 시드니 포이티에는 이들의 ‘적’으로 인식되기도 했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초대받지 않은 손님> (1967, 스탠리 크래이머) 의 개봉이 사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흑인 남자와 백인 여성의 인종간 로맨스를 다룬 이 영화에서 시드니는 존 홉킨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이자 의사인 존 프렌티스를 연기한다.

블랙 팬서는 작품에서 포이티에가 맡은 배역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대다수의 흑인들을 전혀 상징하지 않는, 흑인 백인들의 상대가 되려면 이 정도는 되야 한다는 차별적 기준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백인과 흑인이 섞여야 인종차별이 와해될 것이라는 마틴 루터 킹의 주장과는 반대로 블랙 팬서당은 결혼이나 재생산을 통한 인종 간 융합이 아닌, 흑인 커뮤니티의 독립적 투쟁으로 평등을 이루어 내야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블랙 팬서당의 이데올로기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포이티에가 작품에서 연기했던 주인공 캐릭터, 존과 철저히 대치되는 것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1967), 사진출처: AFI]

엄밀히 말해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 혹은 포이티에를 향한 비판은 일정 부분 정당한 것이다. 포이티에의 의지는 아니지만 그의 캐릭터, 존, 그리고 그가 맡았던 대다수의 캐릭터 설정들이 흑인 커뮤니티의 1%도 안 되는 계급을 상징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주에서 흑/백 결혼이 불법으로 규정되어있는 상황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그리는 이야기는 신기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엄청난 흥행과 아카데미의 10개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는 비평적 성공이 미국의 주류 (백인) 관객과 구성원들로 하여금 인종 차별 문제에 있어 다른 시각과 사고를 갖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80년대에 에디 머피라는 또 다른 흑인 배우가 닉 놀테와 주연한 <48시간>으로 박스오피스를 강타하며 미국 최고의 코미디 배우로 부상 할 수 있었던 것, 1990년대의 덴젤 워싱턴이 탐 행크스를 포함한 당대의 배우들과 동등한, 혹은 더 눈부신 역할로 주목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시드니 포이티에가 수 십년에 걸쳐 얻어 낸 진보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대중적 호응이 기여한 결과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시드니>는 포이티에의 역사 뿐만이 아닌 (인종차별을 주도했던) 할리우드의 어두운 과거사를 추적하는 귀중한 다큐멘터리다. 아울러 영화는 끝까지 유색 인종 배우 동료들을 위해 연대했던 백인 배우들 (로버트 레드포드, 바바라 스트라이젠드 등) 의 증언까지 기록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시드니의 ‘삶 보다 더 큰 삶 (larger than life)’ 은 올해 1월 6일에 종료했지만 그의 레거시는 시드니 포이티에를 기억하는 그 어떤 작품 혹은 할리우드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오래 남을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