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68혁명의 구호 중 하나였다. 20년 동안 베트남 영토에서 벌어진 이념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군사 개입으로 격화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태어난 당시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일으킨 전쟁 탓에 전장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이들이 68혁명을 통해 의심하라고 부르짖은 것은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비롯한 모든 체제였다.

68혁명이 권장한 건 사전적 의미의 의심이 아닌, '비판적 사고'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고, '상상력에 모든 권력'을 주자는 혁명의 또 다른 구호들은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이런 의심은 1초마다 과거로 바뀌는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고자 하는 희망에서 비롯된다. 68혁명이 문화혁명으로서 의의를 갖는 반면, 결과적으로 역사에 실패한 혁명으로 기록된 건 의심의 연쇄가 끊긴 탓이다. 혁명은 기존 체제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됐지만, 그 의심은 의심받지 못한 채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종국에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 폭력이 혁명의 정서를 지배했다. 당시를 다룬 <레전드 오브 리타>, <굿모닝, 나잇>, <천사의 황홀> 등의 영화에 '모든 것을 향한 의심'의 변질이 담겼다.

대개 '의심'이란 단어는 그 주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때 쓰인다. '의심병'이라는 표현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68혁명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이를 설득력 있는 근거 없이 믿어 버리지 않는 한, 의심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의심이 화를 자초하는 순간은 비판적 사고 없이 그걸 확신할 때다.

영화 <메기>

영화 <메기>는 마리아 사랑병원에서 벌어진 엑스레이 도촬(?) 사건으로부터 출발하는 의심과 믿음의 교차를 그린다. 방사선사와 그의 남자친구가 엑스레이실 안에서 몰래 애정 행각을 벌이는데, 바깥의 엑스레이 촬영 버튼이 갑자기 눌린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찍힌 적나라한 하반신의 모양은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당사자 커플을 제외한 극 중 인물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정보는 두 가지다. 사진 속 하반신의 주인과, 이를 지켜보다 엑스레이 촬영 버튼을 누른 사람의 정체다. 모두가 궁금해 한 건 촬영 과정이 아니다. 마리아 사랑병원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건 엑스레이실에서 섹스를 한 것이 도대체 누구인지다. 자신들과 실질적으로 무관한 사건과 관련해 윤리적 호기심과 유희성 정보 사이에서, 모두가 기꺼이 후자에 집중하기를 택한다.

영화 <메기>

방사선사 커플이 굳이 "사진의 주인은 우리요!"라고 선언할 리 만무하고, 사진을 찍은 사람도 어지간하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권력이 개입해 조사를 할 수준의 일도 아니라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날 터였다. 그런데 여기서 고통받는 또 다른 커플이 나온다. 간호사 윤영(이주영)과 그의 남자친구 성원(구교환)이다.

과거 엑스레이실에서 섹스를 한 적이 있는 두 사람은 문제의 사진이 자신들의 모습을 찍은 것이라고 '의심'한다. 보통의 이야기라면, 윤영과 성원의 의심은 진짜 사진의 주인이나 불법촬영범 중 하나를 쫓는 쪽으로 확장됐을 것이다. 하지만 <메기>에서 윤영은 병원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사진을 찍힌 것이 자신들이라는 '의심'을 '아무 의심 없이' 믿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직서를 어떻게 쓸 지부터 고민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어리둥절한 건 이미 사진과 이들이 무관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극 중 인물들은 물론 관객들의 반응까지 지켜보듯 내레이터로서 대화를 건네던 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메기'였다. 정확히는 마리아 사랑병원 다인실에 입원 중인 환자가 키우는 어항 속의 메기다. 인간들보다 부자유한 육체와 환경을 가졌지만, 제4의 벽 너머 관객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영화가 메기에게 부여한 이 같은 권능은 윤영과 성원의 급발진이 결코 영화적 허용의 파편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환기한다. 퇴사라는 행위로 의심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윤영에게 "아직도 엑스레이가 윤영 씨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라고 물으면서.

영화 <메기>

메기는 상황을 중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 없이 외부로 말을 건넨다. 그러면서 이미 비슷한 서사와 영화적 구조를 학습해 향후 전개에 대한 의심을 멈춘 관객들을 지속적으로 흔들어 깨운다. 자신들이 사는 동네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돼 주민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는데도 '시위 방식이 멋지다'며 감탄하고 지나갈 뿐인 윤영과 성원이 이상한 걸 무시하고 넘어가지 말라고 채근한다. 이건 픽션이지만 그래도 논픽션인 것처럼 의심하라고 주문한다.

평화롭던 어느 날, 어항 밑바닥에서 붙어 숨도 쉬는 둥 마는 둥 하던 메기가 별안간 뛰어 오르고 도심 곳곳에는 싱크홀이 생긴다. 그 동안 영화 속 세계에서 생긴 의심 중단의 산물이자, 다시 모든 걸 의심해야 하는 증거다. <메기>는 말한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빠져 나오는 일이라고.

영화 <메기>

온전한 사실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지만 <메기>의 어항에는 모든 사실이 고여 있다. 그리고 어항의 지배자 메기가 이따금씩 수면 위로 뛰어 오를 때마다 의심을 멈추는 것을 멈추라고 경고하듯 싱크홀이 생긴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편집된 사실의 홍수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비판적 사고'의 동의어로서 의심을 하지 않으면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길은 요원하다.

근거 없는 믿음이 비판적 사고의 싹을 잘라 버리는 상황은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늘어났고, 그로 인한 충돌은 점점 더 목격될 것이다. 데이터 스모그의 시대가 저물고 이제는 필터 버블로 꽉 찬 세상이 왔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도록, 나를 의심하게 하는 정보들을 눈 앞에서 싹 치워 주는 그런 세상 말이다. 그건 데이터 스모그에 질식당하지 않기 위한 인간 나름의 몸부림이었겠지만, 결국 도래한 건 확증편향이란 싱크홀이다. 우리에겐 언제든 사실을 습득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지만, 스스로 사실을 구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편집해 준 사실을 사는 것이 훨씬 쉽다. 말하자면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 거기서 빠져 나오려 의심하는 것보다 몇 곱절은 간단하다는 소리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의심할 것인가, 의심을 멈출 것인가?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