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최고 인기작은 단연 하마구치 류스케의 두 편의 신작 <드라이브 마이 카>와 <우연과 상상>이었다. 치열한 예매 전쟁으로 전석 매진은 당연하며, 모든 관객의 예매 순위 1, 2번을 다투었다. 게다가 <우연과 상상>은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드라이브 마이카>는 아카데미 국제 장편 영화상과 칸 각본상을 석권하며 하마구치 류스케는 일본 영화의 미래를 넘어 동시대의 거장 반열에 올라섰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그런 그의 인기 너머의 새로운 일본의 물결을 소개하려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만이 일본 영화의 미래가 아닌 떠오르는 젊은 감독들 전체가 흥미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특별 부문 <일본 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주목해야 할 이유기도 하다. 일본 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작품들을 살펴보며, 새로운 감독들을 찾아보면 어떨까?
<유코의 평형추> dir. 하루모토 유지로
지난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 상을 받았던 하루모토 유지로의 <유코의 평형추>는 단연 이번 프로그램 섹션의 문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이 영화는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고등학교 학생의 자살 사건을 취재하려는 다큐멘터리 감독 유코의 이야기를 다룬다. 자살한 학생이 해당 학교의 남교사와 연애 관계였다는 소문에 의해 이지메를 당해 자살을 하게 되었지만, 학교는 이를 은폐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언론은 과열된 보도로 남은 유족들을 괴롭힌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사건의 진실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방영을 준비하는 방송국은 이런 그녀의 취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한편, 학원을 운영하는 유코의 아버지 역시 씻을 수 없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단 사실을 유코 역시 알게 되면서, 정의와 진실을 사명으로 취재하던 유코는 점차 무너져 내린다. 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유코는 끝까지 그녀만의 ‘정의’를 지켜나가는 것이 가능한가? <유코의 평형추>는 이 복잡한 윤리학의 도식 속에 관객을 던져 놓는다.
<유코의 평형추>는 카메라를 들고 진실을 파헤치는 유코. 그리고 그 유코를 담아내는 영화의 카메라. 두 카메라가 지속해서 함께 움직이는 영화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화면을 담은 유코의 카메라는 점차 흔들리고, 그녀를 찍는 카메라는 반대로 정적으로 그 모습을 비춘다. 기이한 두 카메라의 공존은 진실의 파편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무력감을 일으킨다. <유코의 평형추>에 드러나는 순서쌍은 비단 카메라뿐만 아니라, 유코가 취재하는 자살 사건과 실제로 마주하는 아버지의 추문이라는 윤리적인 난제로도 나타난다. 외부자의 시선에서 진실이 중요했던 문제가 현실에서는 윤리와 정의가 아닌 생존의 측면에서 다가온다는 이 역설은, <유코의 평형추>를 관람하게 될 모든 관객에게도 통용되는 질문일 것이다.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 dir. 이가라시 고헤이 & 다미앙 마니벨
2014년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일본의 이가라시 고헤이와 프랑스의 다미앙 마니벨 감독이 공동 연출한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 오리종티 부문 초청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2017년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도 한 차례 초청되어 국내 관객들에게 호평을 들었던 이 작품이 5년 만에 다시 부산을 찾았다. 아오모리현 히로시카시의 눈 내리는 겨울을 배경으로 타카라라는 작은 소년의 어느 하루의 모험담을 담았다. 아버지는 새벽같이 어시장에 나가 일하고 밤늦게야 돌아온다.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소년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사진을 찍고, 티비를 보고, 그림을 그린다. 평소처럼 누나와 함께 등교할 것만 같은 소년의 발걸음은 학교가 아닌 먼 여정으로 향한다. 아버지가 일하는 어시장으로 가기 위해 소복하게 쌓인 눈을 뚫고 완행 기차를 타고, 또 끝없이 걸어 어시장에 도착한다. 타카라는 아버지를 만나 그림을 전해줄 수 있을까?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은 대사 한마디 없이 작고 작은 소년의 발걸음과 행동에 집중한다. 귤을 까먹으려다가 잃어버린 한쪽 장갑이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내내 지샌 불면의 밤 탓에 작은 역사 안에서 잠깐 든 낮잠, 주머니에 소중히 모아 놓은 귤껍질, 아버지를 기다리며 수산물 시장 카트에 걸어 놓은 푸른 털모자, 아버지에게 전해주려 긴 여정을 함께하느라 귀퉁이가 다 헤진 스케치북 위 그림까지. 언어가 있어야 할 공간에 소년의 그리움과 사랑이 담긴 자그마한 정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은 모두가 한 번쯤 느껴본 적 있는 그리움의 열병에 대한 영화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어 공허한 밤을 불면으로 지새우고, 추위를 떨며 기다리고 기다렸던 열병의 나날들. 무해하고 안온한 시선으로 그려낸 한 소년의 여행기는 우리의 유년과 맞닿아 끝내 가슴을 끓게 만든다.
<우리 집> dir. 기요하라 유이
<우리 집>은 어떤 이들에겐 매우 낯선 영화다. 해안가 지방의 낡은 일본의 집이라는 공간만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이야기의 유일한 접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집에 두 쌍의 여인들의 이야기가 겹쳐 흐르지만, 마지막 한순간을 제외하고 이 둘은 마주하지 않는다. 시간의 격차가 분명하지도 않고, 딱히 인물들 간의 관계가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 편에는 아버지의 실종 이후 사춘기를 겪는 열네 살의 중학생 셰리와 그 딸을 키우는 어머니가 있다. 남편이 사라진 뒤 새로운 애인을 처음으로 만나는 어머니가 셰리는 영 탐탁지 않은 눈치다. 그 맞은 편에는 배 위에서 갑자기 기억상실증이 걸려 모든 것을 잊어버린 사나가 있다. 집주인 토코는 그런 그녀를 거둬 동거할 수 있게 하지만, 사나는 토코가 하는 일이 자꾸만 은밀한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나의 공간을 두고 벌어지는 연관 없는 두 사건은 집이라는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바꿔낼까?
기요하라 유이의 <우리 집>에 놓인 두 쌍의 여성들은 이 단순한 서사 속에서 급격한 불안감을 감지한다. 셰리는 아버지를 대체하는 새로운 남성 애인의 등장에 이따금 집에서 귀신을 본다는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사나가 우연히 면접을 본 카페에서 마주친 의문의 남성이 토코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극심한 불안함에 그를 경계하고 내쫓으려 한다. <우리 집>은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성만의 공간에 남성의 등장이 주는 균열과 위해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낸다. 동시에, <우리 집>은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기묘한 에너지를 풍긴다. 식사하는 장면에서 종종 작은 창으로 인물을 가둬 놓거나, 창문 밖과 안을 대조시키며 집의 내부와 외부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기묘한 공간의 에너지와 외부 존재에 대한 위협, 그리고 연결되지 않는 관계를 통해 불안감을 조성하는 기요하라 유이의 첫 장편 작품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이른 그녀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빛의 노래> dir. 스기타 교시
지난 해 <하루하루 상의 리코더>를 통해 부산을 찾은 스기타 교시의 2017년 장편 <빛의 노래> 역시 이번 섹션에 포함되었다. 긴 호흡으로 인물의 감정과 불균질한 인물 간의 관계성을 그려내는 스기타 교시만의 장면들이 이번 <빛의 노래>에서도 십분 빛을 발한다. <빛의 노래>는 일본의 ‘단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의 영화화를 위해 단가 콘테스트를 개최해 총 4수의 단가를 선정했는데, 각각의 단가가 곧 작품의 각 장에 대한 제목이 된다. 앞서 소개한 <우리 집>이 하나의 공간 아래에서 독립적인 네 여성의 각기 다른 서사를 다루었다면, <빛의 노래>는 아주 느슨하게 엮여 있지만 결코 큰 연관은 없는 네 여성의 이야기가 각각의 4장을 구성한다.
엇갈린 마음을 그림과 캐치볼로 엮어내는 1장, 원치 않는 고백으로 일상이 붕괴하고 마는 2장,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따라 여행을 떠나가는 3장, 홀연히 사라졌다 돌아온 남편을 품고 마는 4장. 각 장마다 여자 주인공들은 노래를 부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지나치거나 다시 반기거나 거리를 둔다. <빛의 노래>는 ‘노래’가 그러하듯 그리고 ‘빛’이 그러하듯, 하나의 지점에서 맞은편의 지점으로 흘러가는 감정의 시차를 그려낸다. 그 누구도 정시에 도착하는 법 없이 엇갈리거나 너무 늦어버리지만, 그런 감정을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한 스기타 교시의 세밀한 묘사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관계는 어느 위치에 놓여있을지 고민하게 만든다.
글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