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회사는 말아먹은 데다가 하나 있는 형은 마피아랑 엮여서 악당 노릇이나 하고 있고 마음 주었던 연인은 거의 반쯤 본인이나 다름없는 안드로이드와 결혼했다. 여기에 형이라는 작자는 악당 노릇으로도 모자라 동생 정신 없을 때 이래저래 이용해 먹으려다가 좀비 상태로 만든 전적까지 있으니... 차라리 삼촌과 숙모만은 따수웠던 피터 파커가 약간 나아 보일 지경이다(물론 비교대상으론 부족하다).
여기에 실사화 측면에서 보면, 진작에 등장할 예정이었는데 통편집되는 바람에 데뷔가 무산되고 이후 기약 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해 주기라도 할 작정인지, 디즈니 플러스는 최근 바로 이 캐릭터의 솔로 시리즈를 제작 확정 짓고 캐스팅 명단을 발표했다. 바로 <원더맨>, 그리고 그 주인공 '원더맨' 사이먼 윌리엄스 이야기다.
MCU가 원더맨 실사화 계획을 처음 세운 건 꽤 오래 전 이야기였다. 드라마 <캐슬>의 주인공 역을 맡았던 배우 네이선 필리언이 원더맨 역으로 촬영까지 마친 영화가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02>였기 때문인데, 5년 전인 2017년에야 세상 빛을 봤으니 계획된 건 그보다 이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선 필리언은 당시 원더맨 역은 아니었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편에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었고 이 인연으로 힘입어 2편에 원더맨 역할을 확정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 결국 편집 과정에서 삭제되는 바람에 MCU 공식 합류 무산과 더불어 원더맨의 실사화 프로젝트 데뷔도 무산으로 돌아갔다.
그 후 5년 만인 올해에 와서야 <원더맨>이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이 확정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루머와는 달리 네이선 필리언에게 역할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대신 <아쿠아맨>에서 블랙 만타 역할을 맡았던 배우 야히아 압둘 마틴 2세가 원더맨 역할을 맡게 됐다. 원작의 '원더맨' 사이먼 윌리엄스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원더맨>의 실사화도 나름 우여곡절이 있었던 셈이다.
원작의 원더맨 이야기를 조금 자세히 하자면, 원래는 보통 인간이었고 자수성가하여 유력한 기업을 키워낸 아버지에게 회사를 물려받은 유복한 팔자였다. 하지만 22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죽고, 형인 에릭 윌리엄스가 경영 승계를 거부하면서 갑자기 회사를 이끌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서툴렀던 사이먼은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했고 이때 경쟁 구도였던 스타크 인더스트리(아이언맨 토니의 그 회사다!)에게 밀리기 시작하자 점점 궁지에 몰린다.
이 과정에서 사이먼은 토니 스타크를 원망하기 시작하지만 그런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고,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사이먼은 형인 에릭에게 도움을 청해 봤지만, 에릭은 마피아 조직인 마기아 패밀리와 협력하고 있는 매우 불순한(...) 상태였다. 에릭은 사이먼을 꼬드겨 회사 자금을 빼돌린 다음 마기아 패밀리와 연관된 기업에 투자를 하자고 했고, 여기에 넘어간 사이먼은 회사 자금을 횡령하고야 말았다. 결국 이사회에서 이 사실을 눈치챘고 사이먼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된다.
모든 것을 잃고 체포되어 있던 사이먼을 빼낸 것은 다름 아닌 제모 남작이었다. 사이먼의 이야기를 접한 제모가 인챈트리스를 보내 사이먼을 당국으로부터 빼돌린 것이었는데,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사이먼은 제모 남작과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그의 이온광선 테스트에 참여해 초능력을 얻었다. 능력만 얻었다면 좋았겠지만, 제모는 '어벤저스 와해'라는 자신의 목표에 사이먼을 이용하고자 유해 방사선을 침투시켜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일주일 안에 죽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이래저래 곤란한 처지였던 사이먼은 제모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어벤저스에 침투하게 되지만 제모의 계획과는 달리 그를 배신한다. 사이먼은 어벤저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들의 동료가 되었지만 부작용을 이겨내지는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토니 스타크는 원더맨의 뇌 상태를 분석해 두뇌 패턴을 기록했고 이를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는데, 이 두뇌 패턴이 울트론에게 넘어가면서 비전에게도 들어갔다.
물론 원더맨은 실제로 죽은 상태는 아니었고 제모의 실험으로 인해 유전자 변이가 오면서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가사상태에 놓여 있었다. 놀랍게도 친형인 에릭은 '그림 리퍼'라는 이름의 악당이 되어 있었는데, 에릭은 친동생인 사이먼의 육체를 이용해 어벤저스를 분열시킬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에릭의 농간으로 좀비 상태가 되어 동면을 하는 등 극적인 고생을 하다가 결국 어벤저스의 도움으로 원더맨은 부활에 성공한다.
원더맨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기간은 무려 12년인데, 얼핏 이름 때문에 원더우먼의 남성형으로 보이는 이 히어로 캐릭터가 부활한 계기는 상당히 미묘하고도 현실적이다. 당시 스탠 리는 ‘원더우먼’과 흡사하다는 이유로 마블을 고소했는데, 때문에 원더맨 스토리는 이 문제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블 쪽에서 루크 케이지(일명, 파워맨)를 내놓자마자 DC 코믹스가 파워걸을 선보이자 질 수 없었던 스탠 리가 원더맨을 부활시켰다. 이래저래 복잡한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돌아온 원더맨은 이전의 횡령 사실에 대해 깔끔하게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당시 어벤저스 멤버였던 비스트와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스칼렛 위치' 완다 막시모프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스칼렛 위치는 원더맨이 아닌 비전과 결혼하고 만다. 원작 코믹스에서의 비전은 울트론이 원더맨의 뇌파 패턴을 복제해 적용시켰기 때문에 되살아난 원더맨과 뇌파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겉모습은 다를지언정 속이 똑같으니 원더맨으로서는 자신과 가장 비슷한 사람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긴 셈이었다.
그 후 '원더맨' 사이먼 윌리엄스는 어벤져스 멤버들에게 도움받지 않고 자립하기 위해 어벤져스를 나와 해결사 등으로 일하다가 단역 배우나 스턴트맨으로 활약하면서 배우 경력을 쌓았고 나중에는 할리우드에서 배우로서 크게 성공했다.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에서는 아마도 이 부분에 착안해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을까 예측되는 상황.
실사화 프로젝트에 공개된 캐스팅 명단과 몇 가지 루머에 따르면, 원작 속 원더맨 캐릭터의 인생사 중 주요하게 다루어질 내용은 그의 배우 활동일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비전을 잃고 아이들까지 잃어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뻔 하기까지 했던 '스칼렛 위치' 완다 막시모프의 출연을 고려 중이라는 소식이 있으며, <아이언맨 3>에서 가짜 만다린으로 열연을 펼쳤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던 삼류 배우 트레버 슬래터리도 재등장 예정.
스칼렛 위치가 등장한다면... 원작처럼 원더맨의 뇌파 복제를 그대로 써먹을 수는 없겠지만 완다와 원더맨의 미묘한 애정전선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트레버 슬래터리가 등장한다는 건 아무래도 할리우드 씬을 본격적으로 다루겠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실제로 헐리우드 영화계를 풍자하는 내용이라는 루머가 있는 상황이지만, 이러나 저러나 아직 제작 확정만 되었을 뿐인 작품이라 확인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어쨌거나 다시금 MCU의 본무대에 등장해 다소 아쉬웠던 원작의 유쾌한 빌런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제모 남작, <완다비전>과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강렬한 모습을 보여준 '스칼렛 위치' 완다 막시모프, 여기에 MCU 오리지널인 트레버 슬래터리까지 등장한다고 하는데… 화려하긴 하지만 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은 사실이다.
새로운 히어로 캐릭터를 본무대에 등장시킬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은 아마도, 왜 이 인물이 '슈퍼히어로'라는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느냐는 당위성을 관객과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아닐까. 물론 뮤턴트들처럼 우연한 계기로 능력을 얻게 되거나 타고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 역시 히어로로서 거듭나는 과정에서 충분한 당위성을 얻게 된다.
원더맨 역시 스스로 원해서 능력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원더맨의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초능력을 강제로 얻게 된 케이스에 가깝다. 하지만 원작의 원더맨 '사이먼 윌리엄스'는 기업인으로서는 빵점이었을지라도(...) 스스로 어벤저스라는 히어로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리고 옳은 편에 서기 위해 죽음을 각오할 수 있었을 만큼 용기 있었던 캐릭터였다.
이 캐릭터의 첫 번째 실사화이고,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리즈인 만큼, 원더맨의 시작과 기원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한다. 이전에 전혀 설명이 없었고 기존 히어로들과도 접점을 만들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우려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물론 여기에는 MCU 4페이즈의 작품들 중 이렇다 할 만한 수작이 없다는 게 제일 크다) 전혀 접점이 없는 수준인 데다가 무대마저 달랐던 <문 나이트>가 호평을 받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 쪽이 맞는 방향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진입장벽이 두터워지고 있는 MCU에게는 그게 더 옳을 수도.
뭐, 진짜 문제는 결국 재미있느냐일 테니, 연계가 되든 안 되든 다른 시리즈로 이어지든 그렇지 않든 간에 관객과 팬들이 기대하는 '새로운 히어로'의 이야기를 재미있는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