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나 악기 연주자, 무용가 등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쓰지 않는 근육 기관이나 관절 부위를 가다듬어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된 이들이다. 몸을 통해 몸의 한계를 극복한 그들은 일종의 지옥을 ‘몸소’ 통과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지옥’은 자신의 희망과 꿈을 이루기 위한 통과의례와도 같다.
그들이 겪는 ‘지옥’은 흔히 알고 있는, 신화나 종교적 관념 속 ‘지옥’과는 다른 의미다. 그 과정엔 모종의 형벌이나 참극의 개념이 없다. 어떤 일을 성취하고 난 이후, 환희와 감격이 뒤따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천국의 몇 정거장 앞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그 각고의 고행 끝에 뒤따르는 게 흔히 생각하는 성취나 극복의 희열이 아니라면 어떨 것인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거나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성취보다 실패와 좌절이 더 흔하고, 모든 노력이 공들인 만큼의 결과를 고스란히 되돌려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섣불리 ‘지옥’ 운운하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릴 주워섬기려는 듯한 이 글의 허두는 애초부터 글러먹은 수작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려깊은 자라면 귀신의 휘파람에 잠깐 귀 기울일 수도 있을 거다. 과연 ‘지옥’은 편파적인 것인가. 삶의 종국은 그리 단순하기만 할까.
육체의 아름다움 혹은 그 끔찍함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서스페리아(2018)’를 보면서 ’지옥‘을 되뇌게된 이유는 인간의 몸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도 끔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건 갓 무용단에 입학한 수지 배니언(다코트 존슨)이 주인공 배역을 따내려 단원들 앞에서 독무를 출 때, 무용단에서 도망치려는 올가 이바노바(엘레나 포키나)가 거울로 둘러싸인 또다른 연습실에 갇혀 온몸이 뒤틀리는 장면이다. 수지의 몸동작이 유려하고 날카롭게 펼쳐질수록 올가의 몸은 걸레 쥐어짜듯 비틀어져 인간의 형태를 넘어서게 된다. 영화는 이 두 장면을 교차편집을 통해 속도감 강하게 보여준다. 수지가 던진 활이나 창이 올가의 몸에 꽂혀 매순간 변형이 일어나는 듯한 실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미와 추, 선과 악, 승과 패 등의 이중성을 은유하는 것으로 봐도 일단 무방하다. 하지만 거기에 모종의 음모와 주술이 숨어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함의는 복잡하고 깊어진다.
이 영화에서 사람의 몸이 무덤 속 형해처럼 드러나는 이미지는 수두룩하다. 그것들은 마구 날뛰는 듯한 점프컷과 뜬금없는 인서트 등에 의해 더더욱 파편적이고도 노골적으로 환기된다. 시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살아있는 인간(또는 인간의 환영),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육체들의 격렬하고 경이로운 군무. 뭔가 수상쩍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과 등장이 반복될수록 이력이 자못 궁금해지는 늙은 정신과 의사. 주인공의 기억 배면에 깔려있는 어느 한적한 시골에서의 임종 장면. 무시로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정치 테러 사건 등. 이 영화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정황들은 대략 이러하다. 그 모든 영화적 질료들은 2시간 32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반등시키기도, 어딘가 복잡하게 얽힌 미로속을 헤매는 듯한 알쏭달쏭함이 감상 의욕을 몽롱하게 저하시키기도 한다. 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어 상영했을 때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는 사실은 참고로 덧붙인다.
이탈리아의 호러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가 1977년 발표한 동명 영화가 원작이다. 이 리메이크 작은 배경이 1977년 베를린이다. 원작에선 미국의 한 소녀가 독일의 무용단으로 유학 온다는 기본 설정만 따왔을 뿐, 내용 전개는 ’전혀‘라고 할 만큼 판이하다. 내가 원작을 본 건 20년도 훨씬 넘었다. 호러 걸작이란 풍문에 이끌려 낡은 비디오 데크로 봤었는데, 기본 줄거리만 기억날 뿐 단 한 장면도 뇌리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전혀 새로운 영화를 본 것 같다는 느낌도 무리는 아니다. 구성도 편집도 화면 연출력도 생경한데, 건조한 마분지에 물기가 배어(마지막 장면 빼고, 영화 내내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린다) 점점 거칠고 점성 강한 이물로 변해 가는 것 같다는 비유가 걸맞을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무용 선생 마담 블랑(틸다 스윈턴)이 수지에게 1대1 레슨을 하며 “아름다움과 환희를 지워!”라 말하는 내용이 진하게 박혔거니와, 그 대사를 초점 삼으면 이 영화는 예술에 관한 모종의 원칙과 고집을 강조하는 내용처럼 읽히기도 한다. 물론 내 관점이다. 다르게 볼 여지도 차고 넘친다.
원작이 전혀 안 떠오르는 리메이크
이 영화는 온갖 비의적인 상징과 은유가 잘못 돋아난 사슴뿔처럼 머리뿐 아니라 엉덩이, 사지에서 마구 삐죽거린다. 시작부터 실제로 있었던 정치적 사건 - 1977년 당시 독일의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이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한 사건이 무슨 두터운 의미망을 지닌 외겹인 양 영화 전반을 둘러싼다.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나치 트라우마와 한 개인의 부모 및 부부관계에서의 죄의식에다가 중세 마녀의 제례의식이 실제로(혹은 극중극 형태?) 재연된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패트리샤(클로이 모레츠)의 진술 및 일기를 통해 정신과 의사 요제프 클렘플러가 참조하는 정신분석학 용어가 엉터리 장서가의 메모처럼 부지불식 등장하는 건 양념일 정도다. 막판 극적인 반전을 선호하는 한국 관객 입맛은 절반도 충족시킬 수 없을 지경으로 결말도 애매하고 헐렁(?)하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고 두 시간 반 동안 미친 짓거리들을 펼쳐 보여주는지 요령부득일 수도 있는데, 나로선 보고 나서 분명하게 새겨진 게 인간의 몸이었다. 그리고 그 몸이 내장한 사람의 기억이다.
뇌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포함한 모든 기관들의 연병장이자 관제탑이라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뇌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만약 뇌가 모든 인간의 규율과 이성적 가치, 혹은 윤리와 도덕마저 조율할 수 있는 세계라면 평화로울 것인가. 그 ’조율기준‘에 의한 순종이 파시즘 및 나치를 탄생시켰고, 그 억압에 대항하는 분열로써 히피의 방종이나 유아적 아나키즘, 혹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폐해를 성행케 했다는 건 역사의 결과론일 뿐이지 않을까. 실제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조, 중반까지 독일에선 미국의 히피보다 더 극렬하게 약물과 우주론족 싸이키델리즘이 성행했었다.
1977년이라는 시대 설정은 그래서 의미심장, 아이러니컬하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인간의 실상이 그래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를 새롭게 규명하고 판단하고자 하는 21세기 학문의 어떤 노력들이 현재에도 공들이고 있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기억의 작용은 어떠한가.
삶은 몸을 변형하고 버리게 되는 과정
모든 사람의 몸은 현재를 살 수 있을 뿐이나, 현재라는 건 늘 불완전하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거나 뻗었던 팔을 다시 모으는 순간, 인간의 몸은 과거가 되고 미래로 변한다. 그것은 몸 자체의 직관적 표출이다. 어떤 행동이나 말이 세계에 ’투척‘되는 건 뇌라는 관제탑이 일일이 참섭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차원 너머의 작동일 수 있다. 뇌는 정돈된 체계의 합리적 질서라기보다 그 자체가 혼돈인 몸의 중추임에 분명하다. 소위, 합리적 이성이 지배한다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그 혼돈을 정리할 수도 명분화할 수도 없다는 게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의 결론이다. 그 혼돈을 수습하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 자체가 또다른 혼돈이자 협잡이자 폭력에 불과했다 라는 실증을 역사에서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당장 오늘의 뉴스를 봐도 그렇지 않은가.
스케치한 장면은 그저 한 사람이 가슴을 찢어 여는 모습에 불과하다. 그 무슨 상징도 은유도 아니다. 설사 영화의 맥락 상 오만가지 애먼 뜻을 지닌다 해도 핵심은 물리적으로 가슴을 여는 행위 자체에 있다.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찢어 붉은 피를 내보이고 그럼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그 모든 다른 이들(부모도 개인에겐 타인이다)로 의해 탄생하게 된 인간의 근본적 질서와 윤리를 재구성 혹은 정화하는 것.
허두를 반복건대, 몸에 관한 또는 몸에 의한 그 어떤 찬란한 수식조차도 몸의 훼손이나 낭비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성립 불가능하다. 삶과 죽음도, 그리고 몸에 새겨진 온갖 기억들도 그러하다. 모든 인간의 삶은 그 상처를 질질 끌고 다니다 새롭게 변형시키거나 버리는 과정에 불과하다. 몸은 온갖 폭력의 온상이자 결과이다. 섹스는 사랑과 폭력을 동시에 함유한다. 사랑 자체가 폭력이고, 죽음에의 희구 없이는 오르가슴도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이상하게 모욕적으로 건강하다. 늙은 정신의학자 요제프를 연기한 배우가 과연 누구인지, 영화 안에서든 밖에서든 찾아보라. 나는 이 영화의 깊은 의도(?)는 거기 있다고 본다. 내가 그린 건 가장 분명하고 저급한 이 영화의 트릭를 따라했을 뿐, 이 장면을 연기한 배우와는 아무 상관없다. 그리고 더불어, 이 글조차 이 영화와는 상관없다. 다만 뭔가 ’지옥‘ 같아서, 그럼에도 여전히 ’지옥‘이 뭔지 모르겠어서 가슴을 찢었을 뿐이다. 그게 영화에서 본 모습인지 나 자신인지 잘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 가슴찢음이 달가웠을 뿐이다. 그 어떤 성취나 좌절과 무관하게, 지옥이 천국의 몇 정거장 앞임을 누구인들 부인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노선은 바로 거기서 끊길 뿐임 또한.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