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광화문시네마

누군가 나를 24살로 돌려보내 준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공부를 다시 해서 더 좋은 학교를 갈까, 외국어를 시작할까, 자격증은 하나라도 더 취득하고, 혹시 모르니 공무원 시험도 준비해야 할까. 좋아했지만 무용했던 일들에 투자하는 시간을 줄이고, 실패로 끝난 도전에 아쉬움이 남더라도 다시 기웃거리지는 않으며, 안정이 보장된다면 시시한 세대의 과거를 답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뭐가 되었든 잘못된 선택들을 고치고, 놓쳐버린 기회들을 붙잡고, 수많은 실수들을 바로잡아 더 나은 현재를 만들겠노라. 막연하게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워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리 멋진 시간 여행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시간여행자들에게는 거대한 목표가 부여된다. 안타까운 과거를 바로잡고, 현재 나에게 일어난 비극을 막는 것. 저마다 비극의 양상은 다르겠지만, 그들 마음에는 모두 크고 작은 후회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죽음의 문턱에서, 나는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 빈약한 이력서일까, 헛헛한 추억일까. 사회가 원하는 유용한 인재가 되지 못한 것은 잠시 아쉽다가 말겠지만, 세상 눈치 보느라 나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들은 마지막까지도 후회로 남을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기로 한다. 생애 가장 예쁘고 혈기왕성한 시절로 돌아간다는데, 낭만이 흥건해지지 못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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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족구왕>은 청춘들의 허술하고 별 볼 일 없는 무용담을 그린다. ‘슈퍼 복학생 히어로’로 등장하는 주인공 만섭은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이다. 죽음의 문턱에 선 2063년,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만났다. 천사는 그가 우주를 통틀어 가장 지루한 인생을 살았다며, 5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24살 여름으로 돌려보낸다. 이렇게 죽었다가는 천국에 가서도 즐기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밤낮없이 공무원 시험 준비에만 파묻혀 살던 만섭이 과거로 돌아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족구와 연애였다. 친구들과 즐겁고 뜨겁게 뒹굴고 놀았던 기억은 모두 족구장에 있었고,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에게 고백 한 번 못 해본 것은 평생 후회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축구도 아닌 족구를 하기 위해 총장에게 건의까지 하며,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족구하는 복학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너한테 족구가 뭐냐?’는 물음에는 짧게 답한다. ‘재밌잖아요.’ 남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지언정, 내가 좋아하는 일을 숨길 수는 없다.

당연하게도, 그의 주변인들은 만섭을 한심하게만 바라본다. 오랫동안 졸업을 하지 못한 형국이 가장 그렇다. 형국에게 만섭은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이다. 그는 만섭의 취향과 꿈을 묻기도 전에 다짜고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말하며, 네 청춘이 네 뒤통수를 칠 거라는 악담까지 퍼붓는다. 그는 족구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지만, 직접 뛰지는 않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족구왕을 꿈꾸는 만섭을 내내 비꼬던 형국은 사실 전설의 족구왕이었다. 하지만 족구 때문에 여자친구에게 차인 후, 그의 마지막 조언대로 정신을 차려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중이다. 또한 만섭이 짝사랑하는 안나는 폼 나는 축구와 찌질한 족구를 비교하며, 족구가 재밌건 말건 여자들은 싫어한다고 말한다. 전직 국대이지만 부상으로 더 이상 축구를 하지 못하게 된 강민은 다시 공을 차고는 싶지만, 전직 국대로서 캠퍼스 족구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잿빛 청춘을 살고 있다.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할수록 주류 사회와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고, 정말로 내 청춘이 내 뒤통수를 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유일한 즐거움 속에서 쉽사리 발을 뺄 수가 없다. 물론 깊숙이 빠지는 것도 두렵기에 그저 우물쭈물하게 된다. 모두 청춘의 덫에 걸려버렸다. 정말 미래에서 왔기 때문인지, 그 덫에서 만섭만이 유일하게 자유롭다. 좀 쪽팔려도 하고 싶은 거 다 해본 만섭은 자동차를 타고 떠나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빛이 번쩍인다. SF 영화 <백 투 더 퓨처> 속 주인공이 과거에서 미래로 돌아가는 장면과 겹친다. 시간 여행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 <백 투 더 퓨처> 오마주를 비롯해, 청춘의 푸름을 예찬하는 시 <젊음>과 <나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면>이 삽입되었다. 영화는 족구라는 소재를 통해, 생기를 잃어버린 모든 청춘들에게 활력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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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마다 찾아오는 축제 덕분에 대한민국이 다시 붉어졌고, 우리는 얼마간 활력을 되찾았다. 우리 국가대표 축구 팀은 9%의 확률을 뚫고, 12년 만에 월드컵 16강에 진출했다. 슛돌이가 태극전사가 될 만큼의 시간 동안, 나의 사랑스럽고 쓸모없는 족구왕들은 무엇이 되었을까가 문득 궁금해진다. 동아리방 구석에서 기타를 튕기던 복학생은, 사계절 내내 술에 취해 있던 또 다른 선배들은, 하루하루 시간을 죽일 방법을 고민하던 친구들은 다들 무엇이 되었을까. 아무래도 그때의 우리는 우리들의 내일 없음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낭만이 흥건했고, 용감히도 무용했다. 그 찰나를 지나,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 나는 ‘어차피’라는 좋은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어차피 안 될 싸움을 뭐 하러, 어차피 헤어질 만남을 뭐 하러, 어차피 사라질 인생을 뭐 하러.

그렇게 모든 사기가 꺾여갈 즈음, 내 청춘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젠가는 그 어두운 싱크홀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고, 내 손으로 만든 공허 앞에서 차마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서 천사를 만났을 때, 실패한 인생이었다는 말보다 지루한 인생이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훨씬 억울할 것 같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족구 같은 것이 필요하다. 다른 이유 없이 오직 재미를 위해 할 수 있고, 대단치 않아서 마음껏 포기할 수도 있는 것. 쓸모 없어지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살지 않는 용기를 내봐야 한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천국에서 곱씹을 추억을 쌓아가는 여정이라면, 후회보다는 희열이 가득한 추억이기를 바란다.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