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커피는 스댕에 먹어야 제맛. <나의 해방일지 9화>

'에이, 누가 요즘 믹스 커피를 먹어'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를 듣던 중 한국 커피 소비량의 90%를 인스턴트 커피가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갓 로스팅 된 원두를 강박처럼 찾아 마시고, 산미가 강한 커피 맛을 선호하는, 나름의 커피 세계를 구축해온 나에게 90이라는 숫자는 커피를 통해 체화된 경험치를 산산이 깨는,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돌아 보니 커피 믹스를 생존의 연료 삼아 매몰된 갱도 속에서 9일을 버텨 구조된 광부들 곁에도, 믹스커피를 얼음이 든 사발에 붓고 벌컥벌컥 들이켜던 <나의 해방일지> 구씨 옆에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분투하는 동료의 책상 위에도 커피 믹스는 항상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던 수많은 인스턴트 커피들을 못 보고 지나친 나는 원두를 즐기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올해의 밈인 동시에 '최악의 밈': 누칼협

신문사설에서 ‘누칼협’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받은 충격도 생생하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의 줄임말인 '누칼협'은 게임 커뮤니티에서 유래한 밈으로 의미하는 바는 “너한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사람 없으니 불평하지 말라” 정도가 되겠다. '누칼협'에 담긴 함의는 '각자도생'의 시대정신이자, 사회적 결과와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지우겠다는 선언이며, 연대의 거부이다. 서울 한복판 젊은이들의 죽음은 '누가 이태원에 가라고 했냐'라는 비아냥이 되고, '밤 늦게 돌아다닌 네가 잘못이지.'라는 냉소가 된다. 고통에 대한 선긋기는 이미 충분히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에 더 깊은 자상을 남긴다. 팬데믹의 진통 끝에 얻은 교훈이라는 것이 진정 이런 후퇴한 시대정신이란 말인가. 누칼협은 단연 올해의 밈인 동시에 '최악의 밈'이다.

다시, 다큐멘터리

'단절'을 핵심 사상으로, '거리두기'를 행동 지침으로 우리는 3년의 팬데믹을 살아냈다. 고립이 기본값이 된 사회에서 몰이해는 '누칼협'으로 발현된다. 상대를 '자세히 보아야' 예쁜 줄도 안다. 커피 믹스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나에게, '누칼협'으로 이미 상처 입은 상대를 기어코 저격하고 마는 우리에게 다시 다큐멘터리 '자세히' 보기를 권하는 이유다.

다큐멘터리도 여러 갈래가 있지만, 많은 수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는 주류 언론과 미디어 나아가 국가권력이 비켜간 재난과 참사를 다룬다.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의도적으로 침묵된 재난을 기억하고, 잊힌 인물들, 목소리 없는 사람들을 소환한다. 사건의 이면을 들추고, 그것을 둘러싼 맥락을 추적하고, 나아가 상실을 애도하는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나면 '아직도 믹스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고 편협한 경험 밖의 세계가 보이는 것은 물론, '누칼협'이 얼마나 졸렬한 무기인지 쉽게 알게 된다.

그동안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는 네 건의 사회적 참사에 집중해 왔다. 제주 4.3항쟁, 518광주 민주화운동, 용산참사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그것이다. 이 영화들은 단순히 과거 사건의 재현을 넘어,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현재적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성찰하며 미래를 만들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 <두 개의 문>. 10년도 더 된 작품이지만, 다큐 속 몇몇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다.

수 많은 다큐 영화 중 여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개의 문>과 518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김군> <외롭고 높고 쓸쓸한>같은 작품들이다. 2009년 1월 경찰 특공대원 1명과 철거민 5명이 사망한 '용산 참사'의 진실을 추적하는 작품 <두 개의 문>를 본 사람이라면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의 죽음이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됐으니 죽음의 책임도 개인이 져야 한다 간단히 말할 수 없을 것이며, '518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외롭고 높고 쓸쓸한>을 본 이라면 '북한개입설'이니 '무장폭동설'과 같은 조롱 섞인 주장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는 국가 주도의 개발정책과 자본이 결탁해 서민의 삶터가 붕괴되는 '재난 자본주의', 구조적으로 예방 가능했던 '사회적 타살'을 충실히 기록해 왜곡과 망각에 대항하고, 말 되어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세밀하게 탐사한다.

세 이름으로 삶을 산 남자, <요한, 씨돌, 용현>

SBS 스페셜-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

사회적 참사를 다룬 다큐 영화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아직도 '세월호 참사' 관련 다큐는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 개인을 중심으로 교차되는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좀 더 가벼운 작품은 어떨까. 2019년 6월부터 방송된 <SBS 스페셜-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은 현대사의 지독한 곤경의 자리마다 어림없이 나타나 몸을 불사르다 조용히 사라진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87년 민주화운동 군 의문사 진상 규명 싸움, 삼풍백화점 구조 현장, 구미 산동 골프장 반대 시위 등 일평생 불의에 항거하고 타인의 고통에 기꺼이 나섰지만 자취를 남기지 않은 의인의 이야기는 '누칼협'이 회자되는 이 시대에 특별한 울림을 준다. <요한, 씨돌, 용현>은 웨이브에서 시청 가능하다.

자발적 헌신과 무조건적 사랑의 고귀함 <다시 태어나도 우리>

말이 칼처럼 꽂힐 때는 인간애를 재빨리 되살려줄 작품도 괜찮겠다. 린포체(전생의 업을 이어가기 위해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난 티베트 불가의 고승이자 살아있는 부처) '앙뚜'와 그를 돌보는 스승 '우르갼'의 이야기를 담은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자발적 헌신과 무조건적 사랑의 고귀함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 티베트 캄으로 두 달 반가량 여정을 함께하는 두 사람의 모습과 린포체 교육을 받으러 입소하는 앙뚜와 이별 세레머니로 눈싸움을 하는 척하다 통곡하는 우르갼을 비추는 장면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에 대해 생각케 한다.

가장 행복한 건, 편안히 누워 시청하는 바로 너

<다시 태어나도 우리> 스승 '우르갼'

다큐멘터리 영화 <시간을 꿈꾸는 소녀>는 주인공 '수진'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3학년부터 대학 입학 후 졸업을 하기까지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을 스크린에 담았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제작 기간만 무려 9년이 소요됐고, 인도 라다크에서 티베트 시킴에 이르는 3000km의 긴 여정을 따라간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사건 추적에 대한 집요함으로 점철된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의 노고를 훔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가도, 체화된 세상이 붕괴되는 경험에 늘 짜릿하다. <유퀴즈>에 출연한 '복세편달' 장항준이 말하지 않았는가?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사람은 유재석처럼 열심히 웃겨주는 이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편안히 누워 시청하는 사람이라고. 좋은 다큐멘터리 '편안히 누워' 시청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우리는 이 권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모르던 세계를 알아 가고, 다른 이의 삶에 더 깊숙이 관여할 때 인류애는 쌓인다. 다큐를 보는 것만으로 '누칼협'의 후퇴한 시대정신은 한 발짝 전진할 것이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