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불황기를 통과하고 있는 2023년에도 눈길을 잡아끄는 영화 포스터는 있기 마련. 지난 1년간 선보인 포스터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들을 모아서 소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년 최고 화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포스터부터 화려하다. 미국에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주인공 에블린(양자경)이 하루아침에 수만 개의 멀티버스에 빠져들면서 벌어지는 난리법석 가족 드라마를 한곳에 모두 담아냈다. 영화를 보기 전보다 보고 난 후 하나하나 뜯어볼 때 더욱 흥미로워지는 포스터다. <마더!>(2017)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의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연 바 있는 아티스트 제임스 진의 작품이다.


3000년의 기다림

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조지 밀러 감독이 7년 만에 내놓은 신작 <3000년의 기다림> 포스터 역시 프레임 주변 곳곳을 메운 구도가 눈길을 끈다.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사는 민속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가 이스탄불에서 산 병에서 깨어난 지니(이드리스 엘바)가 들려주는 3천 년의 이야기의 면면이 퍼져 있다. 한가운데 큼직하게 서 있는 알리테아와 지니가 맞잡은 두 손은 이 거대한 서사가 곧 사랑 이야기임을 드러낸다.


뮤직

Music

올해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독일을 대표하는 여성감독 앙헬라 샤넬렉의 신작 <뮤직>의 포스터는 단출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두 남녀를 무심하게 그린 모습 위에 영화 제목 M u s i c이 불규칙하게 떠다닌다. 아니, 둘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폭풍우가 치던 밤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려진 존이 훗날 감옥에서 교도관 이로를 만나고 존은 점차 시력을 잃어가지만 어느 때보다 온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모호한 시놉시스에 대한 시적인 해석처럼 보인다. 영화의 순간을 수채화의 터치가 물씬한 이미지로 재해석 해온 토니 스텔라의 솜씨.


X

X

슬래셔 무비 <X>는 한국에선 개봉은커녕 영화제를 통해서도 상영되지 않았지만, 작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공포영화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3부작의 두 번째 편 <펄>이 개봉됐고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할 <맥신>이 벌써 후반 작업 중이라는 사실이 열띤 반응의 증거다. 1979년 성인영화를 만드는 무리들이 외딴 텍사스 노부부가 사는 가정집에서 촬영을 하다가 하나씩 죽음을 맞는 과정을 관능적이고 잔혹하게 그린다. 온통 피로 물든 듯 시뻘건 가운데 X자로 서 있는 맨다리가 영화가 표방하는 혼종의 매력을 자랑한다.


성적표의 김민영

알쏭달쏭한 제목의 <성적표의 김민영>은 고등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썼던 정희와 민영이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다른 시간을 보내며 소원해지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 독립영화다. 대학에 가지 않고 자기 삶을 모색하던 정희는 서울에 사는 민영이네 집에 놀러가지만, 낮은 성적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민영은 정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디자인을 담당한 '빛나는' 스튜디오는 제목 속 성적표를 활용해 영화 제목이 그려진 OMR 답안지를 상단에, 그 아래 여름방학에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두 친구의 모습을 큼직하게 배치하고 주변에 자유분방한 픽셀 아트를 곁들였다.


돈 워리 달링

Don't Worry Darling

플로렌스 퓨와 해리 스타일스 주연의 <돈 워리 달링>은 2019년 데뷔작 <북스마트>로 준수한 연출 실력을 자랑한 배우 올리비아 와일드의 신작이다. 신혼부부인 앨리스와 잭은 유토피아를 표방한 공동체 빅토리 마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마을에서 진행되는 '빅토리 프로젝트'의 충격적인 실체를 알게 된다. 평화로운 아침 입을 맞추고 있는 커플과 주변의 풍경 위로, 비행기가 수면에서 곤두박질쳐 하늘 아래로 낙하하는 초현실적인 모습이 조합된 기기묘묘한 포스터. 두 주연배우의 얼굴은 물론 영화 제목조차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엘비스

Elvis

절제 따위 추구하지 않는 화려함의 대명사 바즈 루어만 감독이 9년 만에 내놓는 신작 <엘비스>. 불세출의 로큰롤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의 생애를 파고든 전기영화인데, 뭐가 더 필요할까. <엘비스> 포스터는 그저 우리가 익히 아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구현한 오스틴 버틀러의 모습을 세 가지 버전으로 큼직하게 놓고 그 주변을 블링블링 번쩍이들로 채웠다. 온몸을 휘감은 하얀 바디수트, 무성한 구레나룻, 누가 봐도 록스타인 간드러진 표정. 영락 없이 엘비스 그 자체다.


이마 베프

Irma Vep

이번엔 외국 영화의 한국판 포스터다. 장만옥이 주연을 맡고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연출한 프랑스 영화 <이마 베프>는 1996년 처음 공개돼, 한국에선 올해 2월 1일 처음 개봉했다. 전설적인 무성영화 <뱀파이어>(1915) 속 무시도라처럼 딱 붙은 블랙 바디수트를 입고서 어느 높은 곳에서 먼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장만옥의 모습 주변에 검정과 빨강의 글씨와 문양이 정신 사납게 흩어져 있는 조화, 아름답기 그지없다.


본즈 앤 올

Bones and All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과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다시 만난 로맨스 <본즈 앤 올>. 티모시 샬라메와 타일러 러셀의 아름다운 초상이 하트 모양으로 담긴 메인 포스터도 그럭저럭 귀엽지만, 베니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그림과 포스터뿐인 이 버전에 대할 순 없다. 유명 인사들과 친구들을 가녀린 모습으로 그린 일련의 회화 작업으로 잘 알려진 화가 엘리자베스 페이튼이 두 청춘 매런과 리의 격렬한 키스를 추상화처럼 그린 이미지와 묘하게 관능적인 글씨들이 정갈하게 모여 있다.


화산만큼 사랑해

Fire of Love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화산만큼 사랑해>는 평생 화산 연구에 몰두하다가 1991년 일본 운젠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카티아와 모리스 부부를 기록한 푸티지들을 편집했다. 용암 호수, 재로 가득한 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산을 촬영한 생경한 이미지들이 출몰한다. 달달한 (한국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fire'만큼이나 'love'에 실리는 무게가 상당하다. 사람의 형체를 알 수 없는 방호복을 입은 두 사람과 그 배경의 타오르는 불길만 크게 버티고 있는데도 부부의 사랑이 보는 이에게도 전달되는 포스터다.


타르

Tár

<타르>는 여성 최초로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가 된 (가상인물) 리디아 타르의 이야기다. 제목처럼 포스터도 단명하다. 그리고 과감하다. 리디아가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 까만 배경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그 위로 '토드 필드의 영화', '블란쳇', '타르'가 다른 크기로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포토제닉한 배우가 출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는 얼굴이 아닌 텍스트로 대체되고, 성별조차 가늠하기 힘든 지휘자의 격정적인 몸짓만 남아 있다. 영화 자체는 포스터와는 다른 결의 에너지로 가득해서 더 재미있다.


온 더 라인: 리차드 윌리엄스 스토리

On the Line: The Richard Williams Story

세레나/바네사 윌리엄스 자매를 세계적인 선수로 키운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온 더 라인: 리차드 윌리엄스 스토리>의 포스터는 <타르>의 그것과 같이 놓고 보면 흥미가 배가 된다. 피부색을 도드라지게 하는 새하얀 테니스복을 입은 흑인 남성이 새하얀 배경에 수직으로 서 있는 형상은 부러 <타르>의 정반대를 의도하고 만든 것처럼 보일 정도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이제 그만 끝낼까 해>(2020) 등의 포스터를 작업한 아키코 스테렌버거의 작품.


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마지막 포스터는 눈호강과 멀지도 모르겠다. 2017년에 이어 다시 한번 작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루벤 외스틀룬드의 최신작 <슬픔의 삼각형>의 포스터다. 사회주의자인 선장이 이끄는 초호화 크루즈가 무인도에 좌초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상황을 그린 블랙코미디에 걸맞은 이 버전을 골랐다. 러시아 고위층의 아내 베라가 구토를 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포착한 모습에 토사물을 황금색으로 처리해 더러움을 유머로 대체하는 기지가 빛난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