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감독은 청년 시인 시절이던 1980년대 후반, “프로레슬링은 쑈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유하 감독이 1989년 발표한 시-편집자 주). 군사 정권 말기였다. 사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거짓이었고, 숨겨진 사실들이 거짓 포장으로 시대의 외곽에서 썩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썩어가는 사실들에 불을 지피면서 군부 독재가 밑동부터 타들어갔다.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향락과 자유의 불꽃이 타오르며 1990년대가 시작되었다. 서태지가 등장했고, 얼마 안 가 일본 대중 문화가 전면 개방되었다. 무슨 엄청난 문화의 곳간이 일시에 열리는 느낌이었다. 돌이켜보건대 해방 이후 남한 역사에서 가장 리버럴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게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였다고?
당시 가장 젊었던 사람들은 이제 4~50대를 지나고 있다. 정신도 몸도 골수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나이가 된 것인데, 그 사이 세상은 급속도로 변화했다. 어떤 문화적 향유나 흐름 또한 전방위로 분산되고 파편화되면서 이른바 정보의 쓰나미가 세상의 모든 빈틈을 까발리고 뒤집고, 다시 메우고 있을 정도다. 향수에 빠져 과거를 회상하거나 지나간 가치와 개성을 아래 세대에게 강요하는 건 스스로 퇴물이 되는 지름길이 될 뿐이다. 과거는 감옥이 되고,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현재는 비루하고 왜소하고 처참하다. 단지 빈부나 유,무명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나, 결국 모든 문제는 명예와 돈, 그로 인한 자존감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미키 루크 주연의 <더 레슬러>(2008)는 그렇게 망가진 중년의 초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감독이 대런 애로노프스키였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전혀 그가 만든 영화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로지 미키 루크만 보고 중상급 이상의 평가를 내렸다는 한 평론가의 얘기도 들은 적 있다.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전작들을 본 사람들이라면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무슨 환각과 환영에 둘러싸인 듯 어둡고 암울한 인간의 내면,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냉소적 표현으로 일관하던 그의 영화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냉철하되 온기가 느껴지는 고전 드라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2년 후 제작되어 고평가받은 <블랙 스완>(2011)에서 본래의 몽환적인 사이코스릴러 풍의 연출로 되돌아왔으나 이 작품은 그의 이름과 잘 매칭이 되지 않는 요소가 많다. 솔직히 감독 이름을 잊고 미키 루크의 연기에만 몰입해도 1시간 50분이 전혀 지겹지 않을 정도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레슬러 랜디 램이 주인공이다. 여전한 장발의 거구지만,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온갖 진통제와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을 과잉 복용하는 탓에 심장병을 앓고 있다. 식료품 가게에서 앞치마와 모자를 쓰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모습은 연민을 넘어 우스꽝스러울 지경이다. 독립 레슬링 단체에서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레슬링 경기에 참가해 푼돈을 벌지만, 그에겐 과거의 영광도, 가족도 없다. 아내는 떠났고, 혼자 독립해 떠난 딸과도 소원한 상태다.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그에게 유일한 취미는 스트립 바에 들르는 일이다. 거기서 스트리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를 알게 된다. 그녀 역시 랜디와 비슷하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나이 먹고 언제 퇴물 취급받을지 모르는 상태다. 이 외로운 돌싱남녀의 로맨스가 이 영화의 주요 맥락이다. 하지만, 더 치고 들어오는 건 그들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이다.
배우와 배역, 서로를 연기하다
미키 루크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섹시 가이였다.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나인 하프 위크>(1986)에서 보여준 그의 매력은 동시대 그 어떤 남성 배우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독창적인 퇴폐미의 절정이었다. 이후 그는 스타의 삶을 마음껏, 방종하게 누렸다. 프로 복서에도 도전했고, 체육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형중독 및 나태한 생활이 발목을 붙잡았다. 절륜한 섹시미가 괴물의 형상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서 그를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나 역시 한참 잊고 있다가 빈센트 갈로가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버팔로 66>(1998)에 악당 두목 역할로 카메오 출연한 그를 보고 처음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능글거리고 사악한 악당의 얼굴 그 자체였다는 표현이 연기력에 대한 찬사가 아님을 강조한다.
마리사 토메이 역시 비슷하게 굴곡진 삶을 산 것으로 알고 있다. 요컨대 두 배우 공히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배역과 거의 딱 맞아떨어지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다분히 의도된 캐스팅이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배우의 실제 삶을 모르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울러 배우가 자신을 배역에 정대입하여 그대로 쏟아내는 연기가 딱히 좋은 연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역과 배우는 서로가 서로를 연기하는 느낌을 준다. 프로 레슬러와 스트립 걸이라는 설정도 그렇다. 둘 다 다른 이에게 자신의 특정한 부분을 몸을 통해 보여주는 직업이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사는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객을 어떤 느낌으로 대하는지 알릴 수도 없고, 알려서도 안된다. 그 역시 일종의 연기다. 결국, 그들은 ‘쇼’가 몸에 밴 사람들인 것이다.
쇼를 하며 먹고사는 사람은 결국 남의 시선을 먹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목받지 못할 때 그들은 급속히 시든다. 동물적 육감과 활력, 그리고 인간 평균의 육체적 능력 이상의 것을 선보여야 하는 이들이지만, 누가 보아주지 않을 때 그들은 세계로부터 지워진다. ‘잡초’라는 표현이 진부할 것임을 알지만, 결국 잡초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식물에 가깝다. 아무도 물 주지 않으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들은 시든다. ‘비’도 ‘눈’도 그들에겐 다만 고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시간의 녹이며 세월의 칼날이다. 결국 남아있는 건 한때 최고의 도구이자 무기이자 삶의 핵심이었던 몸,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짊어진 짐 덩어리일 뿐인, 녹슬고 상처투성이가 된 몸밖에 안 남았다. 그래도 살기 위해 다시 몸을 혹사한다. 그럴수록 몸은 더 망가지고, 생활은 갈수록 비루해지며 내면은 황폐해져 간다. 갈 데까지 가고 마는 것이다.
프로레슬링 윌 네버 바이?!
삶의 어떤 비정한 단면이나 쇠락해가는 누군가의 음영을 씁쓸하게 목도하는 것만이 이 영화의 핵심은 아니다. 랜디와 캐시디가 바에서 맥주를 마실 때, 노래가 흐른다. 1980년대 중반을 풍미했던 LA 메탈 밴드 래트(Ratt)의 ‘Round And Round’. 영화상으론 랜디가, 실제로는 미키 루크가 절정의 인기를 누릴 무렵 히트한 노래다. 신나고 가벼운 전형적인 LA 메탈풍 사운드. 다소 서먹하던 랜디와 캐시디가 이 노래가 나오는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돈다. 둘이 쿵짝 맞춰 맥주를 홀짝이며 춤을 춘다. 이때 랜디가 이런 말을 한다. “역시 음악은 80년대가 최고였어. 90년대 음악은 다 쓰레기야! 커트 코베인 그 자식이 음악을 다 망쳐놓은 거야. 맨날 우울한 소리나 끼적대고 말야.”
그러면서 모틀리 크루(Motley Crue) 등등 당대의 인기 밴드들 이름이 호명된다. 듣기에 따라 엄청 꼰대 같은 소리일 수도 있고,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누군가에겐 쌍수를 들고 반가워할 소리일 수도 있다. 랜디가 딸과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요소일 수도 있고, 그런 만큼 자기 연민에 빠진 중년 남자의 누추한 향수일 수도 있다. 음악적(?)으로 옳을 수도, 그를 수도, 편견에 가득 찬 외곬의 한탄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모든 방식으로 들을 수 있고, 모든 방식으로 외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랜디가 죽어도 놓을 수 없는 모종의 가치와 의미를 여전히 스스로 놓고 있지 못하고(또는 놓지 않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국 한 시대, 그리고 한 세대의 시대정신을 의미한다. 랜디는 결국 진정한 ‘쇼맨’일 때 자기 자신이다. 그의 삶이 그릇되고 스스로 파멸했고 그리하여 자신의 함정 안에서 여전히 자기만의 환상과 자존심으로 버티고 있다 한들, 그 역시 그의 선택이고 소명인 것이다.
쇼가 멈추는 순간, 그의 삶도 멈춘다
쇼는 그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아니, 쇼가 끝날 때 그도 끝난다. 랜디는 결국 다시 정식으로 링에 오른다. 계속 삐걱거리기만 하는 캐시디와도, 여전히 소원하나 애정의 밑바닥을 완전히 걸러내지 못한 딸과의 관계도 결국 링을 통해 재정립할 수밖에 없다. 살아도 링에서 살아야 하고 죽어도 링에서 죽어야 한다. 그 링은 애초부터 그의 토대였고 그의 무덤이었다. 프로레슬링이 아무리 조작된 쇼에 한물간 자본주의 유흥의 엉터리 상품이더라도 랜디는 그 안에서 자신을 찾고, 삶의 내용을 추슬러야 한다.
그가 코너에 올라 몸을 날린다. 그의 뒤편 펜스에 다양한 형태의 상징들이 흐릿하게 전시되어 있다. 어떤 명예나 역사와 관련한 표식들일 것이나, 랜디에게 이제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날린다. 허공에 뜬 거구가 꾸물거리는 물고기나 원시에서 발굴된 무슨 공룡의 화석처럼도 보인다. 어쨌거나 그가 날았다. 추락일지 재도약일지는 역시, 보거나 듣는 이의 몫. 한 시대는 가도 또 되돌아온다. 오늘만이 이 시대의 첨단은 아닌 것이다. 다만, 첨단인 척하는 쇼들이 반복 복제되며 지속될 뿐. Round And Round!!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