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들의 악명을 떨치고, 원작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이하 <던전 앤 드래곤>)를 먼저 본 기자가 대답하길, 답은 '예스'다. 주사위를 던져 크리티컬 히트가 뜬 것처럼, <던전 앤 드래곤>은 그동안 '던전 앤 드래곤' 실사 영화가 망친 족보를 완전히 탈피했다. 겜덕이나 판타지덕후였다면 이 영화만큼 기대되는, 그러면서 불안한 것도 없었을 텐데 어느 정도 안심해도 좋을 듯하다. 3월 29일 개봉한 <던전 앤 드래곤>. 그 원작과 이 영화의 특징을 정리했다.
원조? X 원로? O
<던전 앤 드래곤>은 동명의 게임 '던전 앤 드래곤'을 기반으로 한다. '던전 앤 드래곤'(이하 D&D)은 사실 이제는 '게임'이라고 부르기보다 IP, 미디어믹스, 프랜차이즈에 가까울 것이다. 대부분의 중세 판타지는 D&D의 명사나 설정, 시스템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으니까. 원작 D&D는 국내에선 거의 접하기도 힘들 뿐더러, 이를 기반으로 한 오락실 아케이드 게임,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가 더 유명할 정도니까.
아무래도 D&D를 논할 때, '원조'라는 단어를 많이 접하게 된다. 중세 판타지 대부분이 이 시리즈에 빚지고 있기 때문인데, 굳이 따지자면 '던전 앤 드래곤'이 원조는 아니다. 이 시리즈 전에도 수많은 판타지 작품이 있었고, 그 유명한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또한 D&D보다 먼저 나왔다(그래서 D&D는 표절 시비를 겪기도). 그럼에도 D&D가 때때로 원조로 칭송받는 건, 그런 수많은 판타지의 설정을 정립하고 그것을 게임의 형식으로 승화시켰기 때문. 이 시리즈가 중세 판타지의 원조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판타지계의 원로나 대부인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원작 D&D는 한 명의 마스터와 여러 명의 플레이어로 진행하는 테이블 게임이다. 테이블에서 하는 롤플레잉, 줄여서 TRPG라고 한다. 흔히들 말하는 '보드게임'의 일종인데 마스터가 전체적인 전개와 장면의 설정을 부여하면 플레이어들이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지 논의하고 진행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게임스러운 부분은 플레이어가 어떤 행동을 하려면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 것. 예를 들어 '적을 밀치겠다'며 주사위를 던졌을 때, 높은 수치가 나오지 못하면 상대를 밀려다 자신이 밀쳐지거나, 혹은 넘어진다는 식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렇게 설명을 봐도 이해가 안된다면,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를 돌이켜보자. 특히 이번 시즌 4의 '헬파이어 클럽'은 이런 D&D의 장단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게임 마스터 에디(조셉 퀸)가 '악역 베크나의 부활'을 팀원들에게 제시하면, 팀원들은 의견을 나눠 전체적인 전략을 수립 후 각자 행동을 취해 주사위를 던진다. 기본적으로 다 같이 모여서 하는 게임이기에 멤버를 모으기 힘들다는 단점(많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접는 이유 중 하나), 그렇지만 다 같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위기를 극복했을 때 쾌감이란 장점 모두 1화 '그들의 클럽'에서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외에도 D&D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각종 서브컬처를 재기발랄하게 녹인 미드 <커뮤니티>는 시즌 2에서 주인공 일행이 D&D 덕후에게 자신감을 주고자 D&D 플레이에 도전하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물론 언제나 그렇듯 뜻대로 되지 않지만). 톰 행크스가 출연한 <미로>는 'M&M'(Mazes & Monsters)이란 가상의 게임이 소재인데, 누가 봐도 저작권 때문에 'D&D'를 쓰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변경한 것 같다. <더 게이머스>(The Gamers)라는 독립 영화도 D&D 플레이어들의 일화를 그리며 컬트적인 인기를 얻어 3편까지 나온 바 있다.
<던전 앤 드래곤>, 중세 판타지 어드벤처의 성공적 귀환
이번 <던전 앤 드래곤>의 핵심은 원작 D&D의 재치와 기발함, 예측불허의 상황을 훌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이전에 영화화를 시도한 <던전 드래곤>(2000)은 한 왕국을 둘러싼 음모 같은 무거운 소재와 주인공 일행의 모험이란 어드벤처를 동시에 다루려 했고, 결과적으로 D&D의 스케일에만 집착하며 실패했다. 이번 <던전 앤 드래곤>은 음모와 모험을 동시에 취하지만, 좀 더 즉흥적이고 '파티 게임'다운 면모에 집중했다. 파티를 모으고 퀘스트를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순간들이 반짝이는 재치로 가득하다. 영화가 가볍지 않나 싶을 때마다 액션 장면이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특히 추격전이나 하이스트 무비에 버금가는 팀플레이 액션이 일품이다.
등장인물들 또한 완벽함보다는 어딘가 흠집 있는 편이다. 예를 들면 주인공 에드긴(크리스 파인)은 신체나 지력 모두 뛰어나지만 직업이 '바드'(음유시인)이고, 이상적인 기사상의 젠크(레게장 페이지)는 사실 타고난 혈통이 문제인 것처럼. 이런 식으로 각 캐릭터들은 (플레이어들이 만들 법한) 어딘가 '넋빠진' 구석이 있는데, 매력 넘치는 배우와 만나 시너지를 낸다. 평소 흠 있는 캐릭터에게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 속 주인공 일행을 아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통 원작을 '알면' 더 재밌다고 하는데, <던전 앤 드래곤>은 원작을 '상상하면'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서러 사이먼(저스티스 스미스)이 주문을 영창했지만 실패하는 장면에서, 주사위를 굴렸지만 수치가 낮아 실패한 플레이어가 상상되곤 한다. 기껏 문제를 해결하는가 했더니, 그림이 넘어지는 바람에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는 전개는 기고만장한 마스터와 이를 갈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느껴진다고 할까.
알면 더 재밌는 지점도 있다. 게임 제목으로 유명한 지명들이 언급될 때면 괜스레 추억에 젖고, 소서러와 위자드를 얘기할 때면 '그치그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몇몇 아이템이나 몬스터의 특징으로 위기를 헤쳐나갈 때면 자신 또한 파티의 일원이 된 것처럼 뿌듯하기도.
물론 당연히, '원작'의 지식이 전무해도 주인공이 모험하는 과정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중세 판타지가 주는 이세계의 매력과 에드긴 일행이 겪는 위기의 순간들, 그리고 이 위기를 타파하는 과정까지. <던전 앤 드래곤>을 최고의 판타지 영화라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로서는 갖출 것을 다 갖췄다고 단언할 수 있다. 대체로 가벼운 분위기를 이어가지만 진지한 메시지도 놓치지 않는데, 영화 속 메시지가 다소 구태의연하긴 하나, 그 메시지를 끄집어내는 방식이나 감성은 인상적이다. 코미디가 많다 보니 각자의 웃음 코드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단 걱정이 들지만, 기자가 참석한 일반 시사회에선 꽤 많은 관객들이 여러 장면에서 '현웃'을 터뜨렸으니 그조차도 기자의 기우인지 모르겠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