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첨밀밀〉(1996)을 보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높은 확률로 보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의 작은누나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첨밀밀〉을 함께 보자고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왔는데, 내가 “나중에 보자”고 미뤘다. 작은누나는 영화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남은 우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했다. 그 뒤로 25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영화를 볼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그건 함께 보기로 했었던 영화니까.
세상엔 그런 식으로 기억되는 영화도 있다.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누군가가 훌쩍 곁을 떠나고 나면,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과 그와 함께 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들이 모조리 그 사람이라는 키워드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애니메이션 〈아나스타샤〉(1997)를 누나와 함께 극장에서 본 드문 영화로 기억한다. (누나는 휠체어 사용자였고, 90년대만 해도 장애인의 접근성이 보장된 극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천녀유혼〉(1987)은 귀신이 나온다는 이유 때문에 무섭다고 누나 등 뒤에 숨어서 보았던 영화로 기억한다. 집에 비디오테이프가 있어서 수십 번 함께 돌려봤던 영화로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1998)가 한국에 개봉한 건 작은누나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쯤 되었을 때인 2001년 12월이었다. 다행인 건지 괘씸한 건지, 누나가 세상에 없다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온몸으로 관통 중인 고등학생이었고, 본디 그 시기에는 자기 자신 하나 돌보기도 바쁜 법이니까. 하지만 〈원더풀 라이프〉를 보면서는 조금 울었더랬다. 아마 누나 생각을 피하기가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원더풀 라이프〉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보내는 일주일을 다룬 영화다. 사후 세계. 천국으로 떠나기 전 망자들은 림보에 머문다. 림보라고 해서 대단히 아름답거나 특별하진 않다. 림보는 오래된 폐교 건물이고, 죄의 무게를 재는 판관 대신 성실하게 일하는 직장인인 림보 직원들이 망자들을 반긴다. 망자들은 림보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3일 동안 제 인생을 되돌아보며 가장 기억하고 싶은 단 한 순간을 추려낸다. 그러면 림보 직원들은 그 순간을 성실하게 재연하기 위해 세트를 꾸미고 소품을 준비한다. 금요일이 되면 망자들은 림보 직원들이 마련한 세트장에 들어와 자신이 고른 순간을 다시 한번 살아내고, 그 좋았던 기억만을 간직한 채 나머지를 잊고 천국으로 떠난다. 일주일이 다 가도록 어느 한 순간을 고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순간을 찾을 때까지 림보에 머무르며 림보의 직원이 된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힌 망자들의 인터뷰 장면에서, 망자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제 생에 좋았던 순간들, 보고 싶었던 사람들, 구비구비 접힌 사연들을 풀어낸다. 그 장면을 한참 보다가 나는 눈물을 훔쳤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 가는 공간이 정말로 저런 곳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옥도 영원한 심판도 없고, 죄의 무게를 재는 판관도 형벌도 없는, 그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해내면 되는 그런 공간이라면 좋겠다고. 봄이 되면 벚꽃이 날리고 겨울이면 눈이 내리며, 밤이면 환하게 달이 떠오르는 곳. 그래서 작은누나도 그런 공간에서 고통 없이 제 삶에서 행복했던 순간만을 곱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누나가 고른 행복한 순간 안에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울었다.
〈원더풀 라이프〉는 죽음에 관한 영화인 동시에 이야기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떤 망자들은 자신의 삶을 보다 근사한 것으로 기억하고 싶어서 림보 직원들에게 거짓을 말한다. 추억하고 싶은 순간의 나이를 몇 살 정도 속인다거나, 사실 기다리던 상대가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음에도 상대가 왔었다고 거짓말을 한다거나. 망자들은 제 삶을 더 화려하게 연출하고 싶은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 최종적으로는 어머니가 귀를 파주던 순간의 평화로움을 선택했던 여학생도, 처음에는 디즈니랜드에서의 추억을 꼽았더랬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조금씩 거짓을 말한다. 자신이 더 근사한 사람인 것으로 포장하고 싶어서, 보다 덜 나쁜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하지만 〈원더풀 라이프〉 속 망자들의 스토리텔링은 결국 금요일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살아낼 한 순간을 고르기 위한 과정이다. 최종 관객이 자기 자신인데, 이 사람들은 그 순간에도 왜 근사한 거짓을 이야기하고 더 화려한 순간을 선택하려 할까? 아마, 우리의 기억이 우리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 삶을 실제보다 덜 초라한 것으로 기억하고 싶은 마음, 덜 불행하고 덜 시시한 것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
나는 누나와 함께 보았던 수많은 영화들과 드라마들을 떠올렸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누나가 지어냈던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행복했었고, 우리의 삶도 조금은 덜 초라해보였다.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단짝이었던 누나가 죽고 난 뒤, 죽음과 이야기에 관해 다루는 영화를 본 나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사실 이 영화조차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사후세계를 덜 무섭고 덜 불행한 공간으로 상상하기 위해 지어낸 근사한 거짓말 아닌가. 문득, 누나와 함께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긴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최근 한 지인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떤 영화를 봐야 좋으냐고. 나는 이렇다 할 답을 고르지 못해 오랫동안 헤맸다. 세상 어떤 영화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위로할 수 있으랴. 이야기는 힘이 세지만, 내 경험상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초극할 만큼 힘이 세지는 않다. 나는 끝내 그 어떤 영화도 추천하지 못했다. 그러니 오늘 내가 새삼스레 〈원더풀 라이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뒤늦게서야 어설픈 답을 떠올린 사람이 서둘러 덧붙인 추신인 셈이다. 이야기가 우리를 죽음의 슬픔으로부터 구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상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제 삶을 복기하며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곱씹는 공간을,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순간 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우리를.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