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각 웨이브 헤어가 멋진 2022년의 피노키오

윤태호 작가의 웹툰 <오리진>에는 고도화된 AI의 발달로 인하여 인류의 생산 활동은 전면 자동화되고 건강의 수준이 매우 높아져 거의 영생의 단계에 들어선다. 그런데, 그 미래의 인류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살이 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은 한 과학자는 인류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며 발달의 초입 단계에 속하는 21세기로 학습용 로봇을 타임머신으로 보낸다. 5세쯤으로 설정된 로봇은 부도난 집안의 10살 난 아이와 함께 자라며 인간의 면면을 공부해 정보를 수집해 나간다. 인간은 왜 비루함에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멕시코 제2의 도시라 불리는 과달라하라 출신의 델 토로 감독은 유년기에 예수회 계열의 학교에 다녔다. 이 동네에는 스페인 내전(1936~1939) 때문에 멕시코로 도피한 피난민들의 2세들이 많았다. 여기서 싸움이라도 나면 짱돌은 물론이고 죽창까지 동원됐다는 감독의 증언이 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그가 만들었던 (잔혹한) 동화인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 이하 <판의 미로>)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판타지 동화처럼 보이지만 병으로 사람 얼굴을 짓이겨 죽이는 평범한… 장면도 등장한다. 이 영화는 당시 <해리 포터> 시리즈나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와 더불어 가족단위로 볼 수 있는 판타지 동화로 포장되어 개봉했다. 그런데 거대한 괴물의 내장이 폭발하고 날아다니던 요정이 산 채로 잡아 뜯기는 장면으로 상영관 내부의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고 부모들은 극장에 항의하는, 마케팅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 좀 잔혹하긴 하지. 재개봉을 하며 포스터의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실제로 연출자 기예르모 델 토로의 취향은 기괴함이 끝을 찍고 일종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면이 있다. 연금술로 기괴한 영생을 꿈꾸는 <크로노스>(1992), 개미와 사마귀의 교배로 거대 바퀴벌레 같은 동물이 뉴욕을 활개하는 <미믹>(1997),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악마가 등장하는 <헬보이>(2004)를 거쳐 인간과 온몸이 비늘로 덮인 괴생명체의 사랑을 그려 기어이 오스카를 수상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을 보면 그가 추구하는 괴상야릇함은 곱고 눈부신 경지에까지 닿는다. 그랬던 그가 <판의 미로>에서 톤 조절의 시행착오를 겪고 (개인적으로 여전히 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아이들에게 동화를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 넷플릭스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2022)다. 영원한 악동답게 그가 그려낸 (진짜) 동화의 세계는 원작이 품었던 이분열법을 도려내고 괴이함과 삶의 역설을 배치시켰다.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이탈리아, 그곳의 작은 마을엔 카를로라는 어린 아들과 사는 목수 제페토가 있다. 그는 폭격에 혈육을 잃고 시신조차 찾지 못한다. 무덤에는 아들이 생전에 좋아하던 솔방울이 묻혔고, 20년간 비통에 잠겨 살던 그는 묘비 옆에 크게 자란 소나무를 베어 목각인형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엔 생명이 깃들어 마치 사람 인형처럼 행동하는 피노키오가 탄생하게 된다.

스톱모션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움직임이 부드럽고 수려하다


너는 왜 카를로처럼 하지 못하니

관절의 가동 범위가 넓고 통나무를 그대로 조각해 멋지게 웨이브 헤어가 들어간 피노키오지만, 모든 사람들로부터 볼멘소리를 듣는다. 그를 만들어준 제페토조차 아들인 카를로라는 기준이 있다. 그는 피노키오를 핀잔하며 왜 카를로처럼 하지 못하냐고 구박한다.

그러나 피노키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빠뿐만이 아니다. 시장이자 파시스트인 포데스타는 저런 나무괴물에게는 교육이 필요하다며 파시즘 체제를 가르칠 학교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포데스타는 피노키오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불사의 몸을 가진 것을 이용하여 2차 세계대전의 전쟁터로 내모려고 한다.

파시스트 시장 포데스타(왼쪽), 서커스단 단장 볼프 백자

유랑 서커스단의 단장인 볼프 백작은 어떠한가, 글도 모르는 피노키오에게 혹독한 조건이 언급된 노동 계약서를 내밀며 살아있는 이 꼭두각시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데 열중한다. 이렇게 피노키오는 아버지 같은 세 명의 존재를 만난다. 그러나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듯한 이 존재들은 피노키오라는 처음 보는 존재에게 경외에 가까운 신비감을 느끼거나 폭력성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부당한 돈벌이의 수단 정도로 여겨버린다. 모두 피노키오를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요구에 맞게 맞추려고만 하는 것이다.

이 행태는 피노키오라는 후세대에게 가하는 통제처럼 보인다. 그리고 피노키오는 세 명의 부당한 윗세대에게 대항해 세 명의 친구인 귀뚜라미 크리켓, 원숭이 스파자투라, 포데스타의 아들 캔들윅과 연대하여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이 존재는 결국 어떤 기존 세대의 바람대로 흘러가주지 않는다. 심지어 누구나 바래 마지않는 영생의 삶도 가져가지 않는다.

스파자투라의 성우를 케이트 블란쳇으로 기용하는 굉장한 감독님


나는 피노키오로 살게요, 아빠는 제 아빠가 되어주세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기쿠지로의 여름>(2002)은 소년 마사오의 이야기인 줄 알고 보게 되지만, 실은 철없는 어른 기쿠지로의 성장담이다. 마찬가지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피노키오의 여정을 담고 있지만, 이 또한 아빠인 제페토의 성장담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정의 끝에서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비로소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이 목각인형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아빠-아들의 인연의 타래를 풀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피노키오의 희생과 더불어서 어떤 감응을 제공해준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피노키오는 죽음이라는 이별을 맞이하며 세상으로 나아간다. 아마 세상은 그 아이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준 존재들의 말처럼, 인간이 가지는 가치는 유한함에서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피노키오만큼 제페토 또한 성장한다.


산다는 것

앞서 언급한 <오리진>의 메세지는 결말을 맺진 않았지만,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는 진리를 주려고 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혹은 죽음이라고 일컬어진 끝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란의 영화계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말하길, 삶을 즐기려면 죽음이 쫓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다. 한계를 인지하고 안분지족하라는 말이 아니라 삶의 본질적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생의 가장 큰 공산은 아마 최후의 그 순간까지 알 수 없겠지만, 사회라는 것이 이어지는 이상 그 밑바탕을 찾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 까마득함들이 언젠가 우리의 피부에 닿기를 기원하며.

깜깜한 암흑 속에도

여전히 시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