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민 케인>을 안 볼 수 있죠?”
“그러는 당신은 <사운드 오브 뮤직> 봤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가 나눈 대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적이 없고, 마고 로비도 <시민 케인>을 안 봤다며 놀림을 당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는 수식을 단 채 오래도록 칭송되는 영화들은 많지만, "그 영화 봤어?"라는 질문에 이들처럼 우물쭈물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묻는다. 혹시 당신에게도 안 봤다기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봤냐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영화들이 있는가? 그런 고전 혹은 명작들을 소개하는 '솔아안 시네마'로 안내한다.
* 영화 <세렌디피티>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유독 '영화적인' 도시들이 있다. 영화의 크고 작은 배경으로 등장하면서도 그 내러티브에 지지 않는 매력을 뿜어내는 곳들 말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여행자를 꿈꾸게 하는 여러 도시 가운데서도, 미국 뉴욕은 독특하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조단 벨포트(<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욕망이 들끓고, 브로드웨이에서는 리건 톰슨(<버드맨>, 마이클 키튼)이 무대에서 미쳐버린다. 뒷골목을 전전하던 뮤지션을 하루아침에 벼락스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이곳이다. 마블과 DC를 막론하고 영웅이란 영웅은 죄다 이곳으로 모이는 바람에 '뉴욕은 슈퍼히어로 포화 상태'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처럼 영화 속의 뉴욕은 거대하며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무서운 동력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하지만 뉴욕을 배경으로 한 그 수많은 영화들의 진가는 현실의 시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나온다.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미국의 심장으로 모인 사람들, 또 그들이 미국 문화 속에서 낳은 코스모폴리탄 후손을 향한 냉소와 찬사가 뉴욕 영화에 공존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대개 배경에 비해 매우 작지만, 그만큼 선명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함께 뉴욕으로 향했던 해리와 샐리(<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빌리 크리스탈-맥 라이언), 그리고 부자 남편을 찾아 뉴욕으로 온 홀리와 가난한 작가 폴(<티파니에서 아침을>, 오드리 헵번-조지 페파드)의 러브스토리가 그렇다. 저마다의 뉴욕을 품은 주인공들의 작지만 선명한 이야기는 특히 1990년대 즈음부터 2000년대까지 집중적으로 쏟아진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존재한다.
이때 나온 작품 가운데는 미국인과 유럽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도 많았다. 물론 모종의 선입견이나 환상에 근거한 '쉬운' 설정이라는 인상도 지울 순 없다. 어느 한 쪽은 자유분방하고, 다른 쪽은 다소 고지식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욕이 아니어도 될 것 같은 사건들이 굳이 뉴욕에서 펼쳐질 때 도시는 특별함을 입는다. 영화 <세렌디피티>는 미국인 남자와 영국인 여자의 우연한 만남이 인생의 중대한 발견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뉴욕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려낸 작품인데, 블루밍데일스 59번가점과 월도프 호텔 그리고 세렌디피티 3 카페가 이 흔해 보이는 이야기를 채색한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블루밍데일스는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활기가 넘친다. 각자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사기 위해 이곳에 모인 덕이다. 미국 남자 조나단(존 쿠삭)과 영국 여자 사라(케이트 베킨세일)는 가판대에 단 한 장 남은 검은 장갑을 동시에 잡는다. 서로가 장갑을 양보하려는 훈훈한 실랑이를 하던 중, 한 노신사가 나타나 장갑을 가져가려고 한다. 직전까지의 양보심은 온데간데없이 승부욕이 불탄 두 사람은 즉석에서 지어낸 이상한 거짓말로 노신사를 포기시킨다. 그 짧은 몇 마디의 대화에서, 조나단과 사라는 운명을 감지한다.
처음 본 사람에게 적용되는 '운명'이란 단어는 모두에게 비슷한 무게감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양까지 비슷하지는 않다. 조나단에게 '운명'은 우연히 발견한 네잎클로버 같은 것이어서, 찾기까지의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 즉 그의 '운명'은 찾은 후부터 시작된다. 반면 사라는 '운명'이 자신에게 어떻게 도달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진짜 운명이라면 세상의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계획'과도 같다는 것이다. 플레밍의 페니실린과 콜럼버스의 신대륙이 '세렌디피티(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임에 동의하는 두 운명론자는 서로가 서로의 운명인지 아닌지를 두고 난상토론을 벌인다.
애인이 있지만 지금의 운명을 시작으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조나단과, 애인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우연이 운명일지 확신할 수 없는 사라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단 몇 시간 사이 여러 실험을 벌이게 된다. 블루밍데일스에서의 장갑 쟁탈전(?)이 끝나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조나단은 이름과 전화번호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하지만 사라는 "만날 운명이라면 만나게 돼 있다"라며 이를 거절한 채 카페를 떠난다. 조나단은 풀 죽은 채 집으로 돌아가던 중 사라와 이야기를 나누던 카페에 목도리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시 카페에 간 조나단은 자신이 양보한 장갑을 찾기 위해 돌아온 사라와 재회한다.
운명 같은 우연에 사라는 마음을 열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주려 하지만, 불어온 강풍에 쪽지가 날아가 버린다. 다시 써 주면 될 법도 하지만 사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5달러 지폐에 조나단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후 가게에서 사탕을 사는데 이를 지불한다. 지폐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면 운명이 맞을 것이라면서. 터무니없는 확률에 조나단이 반발하자, 사라는 가방에 있던 소설책을 꺼내 맨 앞 페이지에 스스로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쓴다. 날이 밝는 대로 책을 헌책방에 팔 것이고, 운명이라면 책이 조나단의 손에 들어올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책의 제목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 청년 시절 첫눈에 반한 운명의 여자와 안타깝게 헤어진 한 남자가 무려 52년 가까이 그 첫사랑을 기다렸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월도프 호텔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같은 층에서 내릴 수 있는지를 두고 운명을 시험하던 두 사람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처럼 헤어지고, 오랜 기다림을 시작한다. 7년 후의 그들은 모두 결혼을 코앞에 둔 상태지만 이루지 못한 운명에 대한 미련을 남겨두고 있기도 하다. 7년 전의 짧은 밤을 떠오르게 하는 우연들이 뉴욕의 곳곳에서 운명처럼 피어오르고, 결국 조나단과 사라는 그리움에서 비롯된 노력으로 운명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진짜 운명이었냐고? 그건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조나단과 사라의 우연을 운명으로 빛내 준 뉴욕에서라면 또 다른 운명이 찾아왔을지도.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