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고다르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곧 영화를 얘기한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에 대해 다르게 얘기하거나 영화라는 것을 배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는, 영화가 영화 아닌 것과 내통하거나 영화 자체가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꾸로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상한 말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일말의 의심이나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궤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이상한 말을 나는 하고 있는 걸까.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고다르는 영화 작가(영화감독을 ‘작가’라 칭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인 동시에, 영화를 영화 아닌 것으로 ‘발명’한 사람이다. 역시 이상한 말이다. 영화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장 뤽 고다르가 태어나기 반세기 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그 반세기 동안 영화는 특정한 형식적 체계와 규칙들을 만들어가면서 발전했다.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고다르가 활동할 당시엔 미국 할리우드가 영화의 제국으로 성장해 대중을 현혹시켰다. 온갖 영화적 기법이 실험되다가 일정한 서사 구조와 카메라 워킹, 캐릭터 구성 및 갈등 양상 등이 체계화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런데, 1930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고다르는 그게 다 영화의 근본 원칙이 아니라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전 세계 영화계의 혁신적인 이단아, 혹은 고집불통 반골로 자리매김했다.

고다르의 영화를 일반 대중에게 익숙한 서사 원칙이나 구성으로 이해하려 들면 재미도 의미도 찾기 힘들다. 고다르는 그 익숙한 ‘재미’와 ‘의미’ 또는 ‘흥미’에 반기를 드는 영화를 줄곧 만들었다. 그것은 곧 영화에서 사람들이 찾게 되는 여러 삶의 기저들–가령, 행복이나 사랑, 불행이나 기쁨, 삶과 죽음 등이 가공된 픽션 안에서 거짓되거나 기만된 것이라는 나름의 통찰에 기반한다. 삶은 영화에서처럼 잘 짜여진 플롯이나 맞춤한 개연성 등으로 고조되는 극적 긴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불연속적인 우연과 조각난 인상이나 사건들이 좌충우돌하다가 어느 순간 느닷없이 익히 알고 있던 삶의 궤적이 해체되거나 분열될 뿐이다.

사람은 그 안에서 어떤 일관성도 찾기 힘들 정도로 운명에 이끌린다. 또는 그렇기에 그 운명에 저항하다가 대체로 실패한다. 삶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답은 영원히 없다. 끝없이 낭비되듯 던져지는 질문과 불분명한 확신과 그로 인한 방황뿐이다. 그러한 삶의 흐름을 특정한 얼개 안에 짜맞추어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영화는 삶도 영화도 기만하는 가짜 형식일 뿐이다. 이러한 전제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고다르의 영화는 카메라라는 도구로 아무렇게나 꿰어맞춘 엉터리 퍼즐처럼 여겨질 뿐이다. 이건 굉장히 역설적인 얘기다. 고다르는 영화를 엉터리처럼 만들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가 실상은 인위적인 질서 안에 갇힌 채 공감을 강요하는 엉터리 시스템이라는 걸 폭로한다. 거기엔 모종의 전체주의나 일방적 도덕률을 뒤흔드는 정치적 함의도 숨어 있다. 특정 영화가 한 달도 채 못되어 전 인구의 4분의 1이 관람하게 되는 걸 문화적 쾌거라 자주 일컫는 이 나라 사람이었다면 고다르는 진즉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농담만은 아니다.


광대의 가면은 구경하는 이의 속심

고다르의 영화 중 그나마 서사 줄기와 극적 긴장이 도드라지는 작품은 <미치광이 피에로>(1965)일 것이다. 한 부르주아 남성이 가족을 버리고 한 젊은 여인과 일탈 행위를 벌이다 비극을 맞는 이야기다. 1930년대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보니와 클라이드’ 사건과 닮아 있는데 그 사건을 가지고 미국의 아서 펜 감독은 1967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만들었다. 2년 차를 두고 만들어진 두 작품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명작으로 남았다. 아서 펜의 작품은 이른바 할리우드 누아르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남녀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강도와 살인 행각을 벌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 이후 비슷한 설정의 영화가 여러 차례 제작되었다. (올리버 스톤의 <내츄럴 본 킬러>(한국 개봉 제목 <올리버 스톤의 킬러>)가 대표적이다) 마지막 총격 장면은 영화사적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미치광이 피에르>는 영화 팬들에겐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는 영화다. 60여 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풍부한 색채감과 역동적인 영상은 향후 영화의 촬영 기법이나 미장센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에서부터 호흡을 맞춘 장 폴 벨몽도와 안나 카리나의 연기는 고다르 특유의 ‘연기를 연기하는’ 공식에 자연스럽게 투철하다. 이 말도 역시 이상하다.

고다르는 배우들이 감정을 쏟아붓어 연기하는 걸 배제했다. 배우들은 연기를 하는 듯 그 자신이고 그 자신인 듯 배역의 틀을 쓴 이른바 ‘속이 드러난 광대’에 가깝다. 벨몽도는 벨몽도인 동시에 배역인 페르디낭이다. 안나 카리나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모든 배우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인 동시에 배역의 탈을 쓴다. 그러나 대체로 극 안에서는 자신임을 숨긴 채 ‘탈’만 보여준다. 그럼에도 관객은 자주 착각한다. 배우가 배역과 똑같은 사람이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예전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온 배우(특히 악역)를 실제로 보고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영화는 바로 그 착각과 혼동을 기저로 관객에게 판타지를 제공한다. 그게 일종의 할리우드 공식이다. 그런데 고다르는 그러한 특성을 교묘히 풍자한다.


“누구한테 말한 거야?” “관객들한테!”

고다르의 작품 대부분은 ‘영화에 대해 고찰하는 영화’다. 요즘 흔한 말로 ‘메타 영화’인 셈이다. 고다르는 이게 단지 영화일 뿐이고, 사실은 영화와 하나도 똑같지 않으며, “이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보고 있는 당신은 주지해야 한다”라고 거듭 확인시킨다. <미치광이 피에로>에서도 그런 장면이 있다.

두 주인공이 오픈카를 타고 가면서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벨몽도가 뒤돌아 보며 뭐라 한 마디 던진다. 둘이 나누던 대화와는 다른 맥락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안나 카리나가 묻는다. “누구에게 한 말이야?” 벨몽도가 히죽 웃으며 답한다. “관객들한테.” 이런 장면은 고다르의 작품에서 흔하다. 고다르는 스스로를 ‘영화에세이스트’라 자주 칭했다. 영화를 통해 허구를 전달하기보다 삶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통찰들을 전한다는 뜻이다. 자주 사용되는 내레이션 기법과 극적 맥락과는 무관해 보이는 성찰들을 뜬금없이 던지는 형식은 거의 시적 아포리즘에 가깝다. 그렇다고 어떤 무게감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 따윈 없어 보인다. 그저 어떤 상황이나 느낌에 대한 언어적 뇌까림에 불과할 뿐이다. 그 뇌까림조차 기존 언어 맥락과는 많이 다르다. 단어와 구문이 뒤죽박죽 뒤섞인 채 조각난 언어들이 산발적으로 출몰한다. 거기서 프랑스 문학 특유의 사변과 언어유희를 캐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치광이 피에로>는 멀쩡해 보이는 누군가가 세계와 삶의 관성에 저항해 일탈하고 갈등하다가 스스로 자멸하는 이야기다. 피에로는 타인을 울고 웃기면서 정작 스스로는 탈 뒤로 숨는 자다. 또는 자신을 숨긴 채로 세계가 뒤집어쓰고 있는 탈을 벗기려 드는 자다. 슬픔을 웃음으로 표현하고 분노를 코미디로 바꾸어 일반 사람들이 감추거나 숨기고 있는 인간 본성의 어둡고 일그러진 측면을 몸을 통해 대리 만족시켜 주는 자. 그런 사람의 ‘쇼’를 보는 것은 즐겁고 우스울 수 있으나 그 웃음과 즐거움은 결국 내재된 슬픔과 분노가 오래 삭힌 거름처럼 불타올라 삶의 실체를 발가벗겨지는 걸 목도하는 일이 된다.


영혼, 그것은 사람도 허구도 모두 아우른 코미디

얼굴에 시퍼런 황칠을 하곤 머리에 다이너마이트를 두른 채 자폭하는 벨몽도-페르디낭은 아무런 극적 효과도 없이 갑자기 ‘펑!’하고 바닷가에서 사라진다.

관객은 그저 그걸 향유하고 소비할 뿐이다. 관객(일반 사람)들은 결코 자신 안의 피에로를 들키지 않으려 한다. 영화는 그러한 자기기만적인 판타지로 소비자들의 영악한 속심을 들추어 판돈을 키운다. 한때,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대신 충족시켜 주던 피에로는 결국 소모되고 버림받는다. 또는 숫제 그 ‘판’에서 스스로를 이탈시킨다. 얼굴에 시퍼런 황칠을 하곤 머리에 다이너마이트를 두른 채 자폭하는 벨몽도-페르디낭은 아무런 극적 효과도 없이 갑자기 ‘펑!’하고 바닷가에서 사라진다. 얼굴 없는 두 주인공이 바다를 배경으로 랭보의 시를 듀엣으로 낭송한다. “그것을 되찾았다/ 무엇을?/ 그것은 태양과 섞인 바다” 그 시의 제목은 「영원」이다. 바다가 있는 한, 그리고 태양이 있는 한, 피에로는 죽어 영원히 산다. 비극과 코미디는 그렇게 섞인다. 그것을 삶도 허구도 모두 아우른 ‘영혼’이라 일컬으면 어떨까.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