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정신 나간 영화(또는 감독)’라는 타이틀로 순위를 매겨본다고 치자. 어떤 영화들이 차트에 오르게 될까. 사람마다 퍼뜩 떠오르는 여러 감독, 여러 작품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관적이다. ‘정신이 나갔다’

라는 걸 여러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거다. 딱히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거나,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것들을 영화로 만들거나, 영화 제작 자체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로 떠올려 본 가정이다.


세상에서 가장 정신 나간 영화감독?

나로선 베르너 헤어조크가 가정 먼저 떠오른다. 많은 이들이 동의할 거라 여긴다. 그는 한마디로 미친 감독이다. 물론 경솔한 속단이자 편견일 수도 있다.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거나 실현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함부로 단정하는 건 나 자신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의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을 세상은 미쳤다고 조롱하곤 하는 일이 잦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웬만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뤄내는 사람은 다 미친 사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너 헤어조크는 아무래도 상궤를 벗어나는 측면이 강한 인물이다. <위대한 피츠카랄도>(1982)는 제대로 정신 나간 영화임에 분명하다.

<위대한 피츠카랄도>는 속담 그대로 ‘배가 산으로 가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 속담이 가지고 있는 본래 의미와는 별 상관없다. 실제로 그냥 배가 산으로 갈 뿐이다. 헤어조크의 페르소나이자 철천지원수이자 둘도 없는 동료인 클라우스 킨스키가 연기한 피츠카랄도는 1900년대 초반 페루에서 실존했던, 아마존에서 고무나무 사업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를 모티프 삼았을 뿐,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설정이 흥미롭다.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을 모델로 실제로 없었던 일, 혹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을 실제로 실현한 영화. 영화를 찍으면서 실제로 배를 산으로 옮긴 것이다.

제작 기간은 4년이 걸렸다. 수천 명의 인디언 원주민이 등장하고, 아마존에서 뱀과 맹수, 급류와 밀림과 싸우며 만든 영화다. 촬영 중 사망자도 다수 발생했고, 헤어조크와 킨스키의 갈등은 극에 달했었다. 아마존을 배경으로 제작된 또 하나의 미친 작품 <아귀레, 신의 분노>(1972) 촬영 당시에도 둘은 살인을 불사할 각오로 대립했었다. 둘의 관계 또한 제정신이면 도저히 유지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러한 사정은 헤어조크가 킨스키를 추억하면 만든 다큐멘터리 <나의 친애하는 적 – 클라우스 킨스키>(1999)에 잘 드러나 있다.


배가 정말 산으로 간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오페라(특히 엔리코 카루소)에 미친 사업가 피츠카랄도가 아마존 선상에서 장대한 오페라를 공연하기 위해 전 재산과 목숨을 건다는 스토리. 158분의 긴 러닝타임이 오로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만 점철돼 있다. 20세기 초반 유럽의 제국주의가 남미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억압하고 부려 먹는 이야기라는 맥락을 갖다 대 비판할 소지도 다분하지만, 피츠카랄도의 광기에 적극 협력하는 원주민들의 모습을 보면 별 설득력이 없어진다. 원주민들에게 피츠카랄도는 모종의 불가사의한 신적 존재로 비쳤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보상도 대가도 없이 그의 미친 짓에 동참하는 모습을 이해하긴 힘들다. 피츠카랄도는 줄곧 하얀 정장을 하고 등장한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하얀 신을 숭배한다.

피츠카랄도는 애인 돌리(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와 함께 페루의 정·관계 인사들에게 자신의 사업을 설득시키려 동분서주한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다. 정글과 원주민들을 자기 소유화하는 과정들이 잘 드러나는데, 작품 초반부의 주된 내용이다. 클라우스 킨스키 특유의 산만하고 다층적인 인물 구현이 입체감 있고,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능글맞을 정도로 새침한 연기가 일품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면서 점점 괴이한 설정들이 이어진다.

처음에 동참했던 인물들이 하나 둘 나가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계획은 난관에 봉착한다. 이때 원주민들이 합류한다. 그러면서 사업은 모종의 제의(祭儀)적인 느낌을 띠게 되는데, 자연의 완강한 한계와 법칙을 거슬러 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막 비행기가 발명되고 증기선이 대양을 가로지르는 20세기 초반의 세계가 불현듯 원시적 욕망의 구현과 그것을 위한 분투의 장으로 변하게 만든다. 설상가상 밀림에 득실대는 식인종의 등장은 인간 문명의 거함을 침몰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암초가 된다. 식인종을 피해 목적지까지 배를 옮기려면 지름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게 결국 산을 넘는 일. 그렇게 배가 산으로 간다.


영화 만드는 과정 자체가 더 극적인 영화였다

그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밀림의 나무를 실제로 베고 커다란 배를 인력을 동원해 산으로 옮긴다. 영화에서 드러난 장면은 극히 일부일 것이다. 편집된 영화보다 그 장면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를 상상하는 게 나로선 더 광대하고 어이없고 거대한 망상의 장이라 여겨진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꼭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렇게 해서 어떤 내적·외적 성과를 노렸던 것인지 어이없어하다가도, 그것을 결국 해내고야 마는, 그리하여 거대하고 불가능한 꿈을 정신적·육체적 고난과 실질적 구상으로 이뤄내고야 마는 집념과 의지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물론 헤어조크 감독의 개인적 야심에서 출발한 일일 테지만, 동원된 배우 및 스태프, 그리고 수많은 원주민들에겐 어떤 동기가 작동했던 건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이 작품은 어떤 특수 장치 없이 인간의 육체적 분투가 실제로 이뤄지지 않으면 도무지 완성될 수 없는 영화였다. 연기하고 있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니만큼 단순한 연기가 아니고, 삶의 끝을 바로 코앞까지 끌어와야만 가능한 일이니만큼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듯한 상태를 이겨내야만 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그 어떤 치명적 홀림이나 사명 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 무시무시한 타나토스의 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못 지리할 수도 있는 긴 러닝타임을 홀리듯 견디게 만드는 것도 인간 본성에 내재한 그 강렬한 욕구 때문일 것이다. 대개 그 욕구는 잠재되어 있거나 은폐되어 있거나 여러 사회적 규약에 의해 제한되어 금기시되곤 한다. 문명사회는 대체로 사람에게 안온한 삶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그 안에서 사람은 이중적이다. 안온함을 추구하면서도 그 안에선 충족될 수 없는 내밀한 욕구와 그것을 추동하는 본원적 힘에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나 일탈, 축제나 폭동 등은 그러한 작용에 기반한다.

그것들은 대체로 사람을 모종의 극지로 이끌고 간다.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감정 고양 상태는 사람을 종종 미치게 만든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것을 꿈꾸게 하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정해진 질서 바깥으로 내몰기도 한다. 그렇게 한번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오면 문득 세계가 달리 보인다. 자신도 이미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로 변해 있다. 그것은 외부에서 씌워진 가면이라기보다는 여태껏 평온하게 쓰게 있던 가면을 내던진 자신의 진짜 모습일 수 있다. 그렇게 마주한 세계 역시 이전의 가면을 벗은 날것의 실체이다. 없었던 게 아니라 숨겨져 있었던 것이고, 몰랐던 게 아니라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 본성의 투철한 원 지점인 것이다.


스스로를 정복한 자 피츠카랄도, 혹은 헤어조크

마침내 선상에서 카루소의 오페라를 공연하게 된 피츠카랄도의 옷 색깔이 바뀌었다. 검은색이다. 하얀 신의 가면으로 원주민들을 현혹시키고선 비로소 본질을 드러낸 것일까. 커다란 시가를 입에 물고 득의만면하는 그가 문득 악마 같기도 신 같기도 하다.

헤어조크는 바로 그러한 삶의 심원한 지대를 줄곧 들여다본 감독이다. 그는 영화라는 인류 첨단의 도구로 인간의 본원적 원시성을 투시했다. 그러기 위해선 때로 실재를 환각으로 바꾸어야 한다. 거대한 오페라를 실연하기 위해선 기존의 예의 바른 어법을 버려야 하고, 장구한 인간의 심연을 통찰하기 위해선 새하얀 정장을 시뻘건 진흙으로 칠갑해야 한다. 마침내 선상에서 카루소의 오페라를 공연하게 된 피츠카랄도의 옷 색깔이 바뀌었다. 검은색이다. 하얀 신의 가면으로 원주민들을 현혹시키고선 비로소 본질을 드러낸 것일까. 커다란 시가를 입에 물고 득의만면하는 그가 문득 악마 같기도 신 같기도 하다. 또는. 그 둘에 휘말려 자신을 밀림과 강 한가운데 홀로 띄운 어떤 인간의 발가벗은 실체 같기도 하다. 미쳤던 제정신이든 그는 그 스스로를 정복했다. 이 사람을 보라!


강정 시인